빨간머리앤
빨간머리앤
  • 홍기확
  • 승인 2020.05.21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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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조각모음]<30>

얼마 전 빨간머리 앤을 읽었다. 물론 소설을 즐기지 않는 터라, 아이가 보는 만화책으로 말이다.

빨간머리 앤을 오랜만에 읽고, 어릴 적 만화영화로 봤던 빨간머리앤을 찾아보았다. 무려 1979년에 방영되었다. 내 나이랑 동갑이니 이것 참. 그때 참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40년의 추억이 되었다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관련된 정보를 인터넷으로 아무 생각 없이 검색을 하다가 멈칫했다.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 이게 재미있는 건가?

예전에 노래가사나 영화 제목이 생각나지 않으면 30분이든 한 시간이든 기억을 조합해서 꺼내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역사인물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경우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이며 기어코 찾아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기억이 기억을 물고, 책에서는 필요한 정보 외에 주변의 정보까지 공부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궁금하면 스마트폰을 꺼내든다. 그리고 답을 즉흥적으로 찾는다. 쉽다.

대화중에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스마트폰을 꺼낸다. 그리고 검색한다. 이야기가 멈춘다. 대화가 줄어든다.

대학교 1학년 때 기억.

친구 2명과 술자리에서 수입차 브랜드인 아우디의 로고에 있는 원의 개수가 몇 개인지 논쟁이 벌어졌다. 나와 친구 한 명은 원이 4개라고 했고, 다른 한 명은 원이 5개라고 우겨댔다. 하지만 서로 목소리를 높일 뿐이었다. 추억의 삐삐 세대였던 우리들은 불행히도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해서 정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답을 맞힌 사람이 술을 얻어먹기로 내기를 하고는, 1차를 마치고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수입차 중에서 아우디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드물었던 수입차들, 게다가 서울의 변두리인 우리 동네에 아우디가 있을 리 만무했다. 30분간 길을 싸돌아다니다가 실패. 그래서 우리는 나름 전략을 짜서 비교적 잘 산다는 아파트의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몇 개 동을 샅샅이 뒤진 후 우리는 1시간 만에 아우디를 발견했다. 로고의 원은 4개. 나는 술을 얻어먹었다.

중요한 건 정답이 아니었다. 궁금증이고, 호기심이고, 설렘이고, 짜릿함이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얻을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빨간머리 앤에 나온 글귀 하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참 멋진 일이에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거잖아요?”

빨간머리 앤은 고아로 고생을 많이 했고, 그런 선입견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는 캐릭터로 나오지만 긍정대마왕이다. 세상의 선입견과 정답을 비껴나가는 캐릭터다. 내가 만화책에서 읽은 한 구절은 만화가가 소설 원작에서 놓치기 싫었던 것이었을 터.

어찌 보면 스마트폰은 어느 통신광고의 ‘생각대로○’처럼 정확하게, 모두 다 생각대로 이루어지게 해 준다. 하지만 앤의 말처럼 생각대로 되지 않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있어나는 것도 참 멋진 일이지 않을까?

그때 원이 5개라고 우겨대던 친구와는 만나지 않는다. 아니, 만날 수가 없다. 항상 우겨대는 것이 특징이자 성격, 품성, 개성이었던 녀석이었다. 그 녀석은 스마트폰으로 인해 우길 수가 없게 되었다. 만나서 할 얘기가 없게 되었다. 대화에서 스스로 격리되었다.

가짜뉴스, 팩트체크. 인터넷에서는 정확성만 강조한다. 건들지 말라, 애들은 가라는 얘기다. 인터넷을 신성시하고 믿게끔 만들려는 전략이다. 성경의 다양한 해석을 막은 종교개혁 이전, 사제들의 전략과 동일하다.

이번 스마트폰이 고장 나면 그때는 전화와 문자만 되는 휴대폰으로 바꿀 작정이다. 뜬금없는 사건이, 엉뚱한 상상이,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자주 벌어질 것만 같다.


 

일상의 조각모음

홍기확 칼럼니스트

2004~2010 : (주)빙그레, 파주시, 고양시, 국방부 근무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박물관 및 미술관 준학예사, 관광통역안내사(영어)
현 서귀포시 감귤박물관운영담당
현 서귀포시 공무원노동조합 사무국장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지식과감성#
         『느리게 걷는 사람』, 2016년, 지식과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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