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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전쟁이어도 아이들에겐 우정이 싹터요”
“광기의 전쟁이어도 아이들에겐 우정이 싹터요”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0.05.19 0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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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의 책가방] <3> 나카와키 하쓰에의 ‘세상 끝의 아이들’

살다 보면 ‘욕’을 먹거나 ‘욕’을 할 일이 생긴다. 우리나라는 ‘육두문자’를 쓰는 욕이 주를 이루는데, 이웃 나라인 일본은 그러지 않은가 보다. 일본 생활을 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쓰는 욕이 어떤지는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실제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로부터 듣기로는 우리와 같은 욕은 없다고 한다. 우리는 육두문자가 난무해야 제대로 된 욕으로 대접을 받는데, 일본은 대체 어떤 욕을 해야 욕다울까.

일본을 들여다보면 나를 남과 구별하는 용어 선택이 욕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표적으로 재일동포를 부를 때 쓰는 ‘조센징’이다. ‘조센징’은 한자어로 ‘조선인(朝鮮人)’인데, 재일동포들에게 최상의 욕이 된다. 조센징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조센징이라는 용어엔 일본인과 그러지 않은 이들을 구분하고, 일본인들은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도를 풍긴다.

‘히고쿠민’이라는 욕도 있다. 한자로는 ‘비국민(非國民)’이 되는데, 일본어로 읽게 되면 ‘히고쿠민’이라는 발음이 나온다. 히고쿠민도 일본의 대표적 욕설 가운데 하나이다. 히고쿠민은 말 그대로 “국민이 아니다”는 뜻인데, 어찌 그게 욕설일까. ‘조센징’처럼 ‘히고쿠민’도 일본인들이 화자(話者)를 남과 구분하려는 용어 선택이다.

히고쿠민의 역사는 전쟁과 함께한다. 일본이 제국주의 야망을 드러내며 아시아를 침략, 식민지를 구축하던 시절이 있었다. 조선은 물론 타이완도 일본의 식민지였다. 만주엔 일제의 괴뢰국이 들어섰다. 이때 등장한 단어가 히고쿠민이다. 일본 정부는 국민으로서 본분을 제대로 하지 않은 이들을 향해 “히고쿠민”이라고 했다. 히고쿠민은 식민지배를 받던 이들은 물론, 일본인 신분임에도 불리곤 했다.

일제가 1930년대 후반에 국가총동원령을 내릴 때, 무조건 ‘황국’에 충성하는 애국시민이 필요했다. 일제는 전쟁을 치러야 했고, 희생자도 필요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충성’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이들은 히고쿠민이었다. 21세기 들어서도 일본내 방송에서 히고쿠민이라는 발언을 하다가 수정되는 일도 있었다. 아직도 일본내에서 히고쿠민은 엄청난 욕설로 간주된다.

우리에겐 일본이라는 나라가 이상하게 보이는데, 특히 따돌림에 관해서는 남다르다. 집단내에서 지켜야 하는 질서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동료(나카마)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나카마하즈레’가 된다. 지역내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 촌락에서 규칙을 위반하는 이들은 ‘무라하치부’를 당한다. ‘히고쿠민’도 ‘나카마하즈레’나 ‘무라하치부’에 해당한다.

나카와키 하쓰에가 쓴 소설 <세상 끝의 아이들>에도 히고쿠민은 등장한다. 그 단어가 소설에 등장하는 횟수는 극히 미미하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의 삶 자체가 히고쿠민이다.

<세상 끝의 아이들>은 어린 소녀들이 전쟁을 겪고, 살아가는 일상을 묵직하게 그리고 있다. 전쟁의 참화를 겪는 이들은 가엾은 히고쿠민이 될 수밖에 없음을 소설은 말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조센징’ 미자, 일본인이지만 반강제적으로 만주국을 개척하러 만주에 정착한 다마코, 일본에서 주로 생활하지만 1945년 미군의 공습으로 부모와 이웃을 잃은 마리. 이렇게 세 명의 소녀를 등장시켜 이야기를 풀어간다.

소설은 전쟁광이던 일제로 인해 목숨을 잃고, 자의식마저 파괴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을 비춘다. 미자는 조선에서 만주로, 다시 만주에서 일본으로 정착하면서 ‘조센징’이라는 멸시를 받아야 하는 ‘히고쿠민’이다. 다마코는 일제 패망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아로 남는 ‘히고쿠민’이 된다. 마리는 미군 공습으로 죽어간 이들의 모습이 ‘영광’이 아닌, ‘개죽음’임을 깨닫고 독신으로 살아간다. 마리는 스스로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마리는 스스로 ‘히고쿠민’을 택한 셈이다. 마리는 소설에서 다음처럼 이야기한다.

“다들 행복하게 살 생각이었다. 전쟁해서 행복하게 살 생각이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고자 다들 공장에서 무기를 만들고 먹고 싶은 음식도 먹지 못하고 참아야 했다.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도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불행해졌다.”

전쟁은 끝난다. 끝나게 되어 있다.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왜 고통은 평범한 이들에게 자주 찾아올까. 조센’ 미자와 전쟁 고아로 만주에 남겨진 다마코는 전쟁 이후 역시 고통의 늪에서 살아야 했다. 중국은 공산당 세상이 되고, 조선은 남북으로 분열된다. 다마코는 일본인 전쟁 고아라는 점이 늘 걸림돌이었고, 미자에겐 남북 분단으로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자이니치(在日)’라는 또다른 신분이 되고 만다.

‘조센징’ 미자는 부모의 고깃집을 이어받는다. 미자는 붕수라는 조선인 청년을 만났고, 아들 붕근을 낳는다. 아들 붕근은 일본인 아가씨를 사귀었으나, 그건 가능한 일이 되지 못했다.

“미자는 조센징이라고 놀림당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붕근의 어린시절을 떠올렸다. 그날 오후 붕수는 역도산과 하시모토 이사오의 이름을 거론하며 붕근을 격려했다. 당시 미자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성공한 조선인 이야기 정도로는 얼버무릴 수 없는 현실이 아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붕근은 대창을 씻고 한입 크기로 잘라 미자가 만든 특제 양념에 재워두었다. 인생이 와르르 무너질 상황에서도 가게를 위해 고기를 손질해야 한다. 그것이 붕근이 이곳에서 현실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미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이 땅에서 어떤 설움을 당하든 미자에게도 붕수에게도, 그리고 붕근에게도 이곳 말고는 살아갈 곳이 없다.”

전쟁은 모든 이들에게 인간이기를 거부하게 만든다. 전쟁 와중에 즐거운 삶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이들에겐 그럴 여유가 없다. 다만 아이들에겐 그런 여유가 주어진다. 이유는 있다. 아무리 전쟁이라고 하더라도, 아이에게서 놀이를 뺏을 수 없어서다. 소설은 만주에 정착한 전쟁 고아 다마코, 조선에서 태어난 미자, 일본에서 줄곤 살아가는 마리의 연결고리를 ‘주먹밥’에서 찾고 있다. 마리가 아빠랑 만주국에 잠깐 들른 시점에 세 소녀가 만나게 되고, 주먹밥을 나눠 먹는 장면을 내내 기억하게 만든다. 자신의 주먹밥을 나눠준 건 ‘조센징’ 미자였고, 그 주먹밥은 그들의 질긴 인연을 이야기한다. 커서도 그 주먹밥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어준다. 전쟁은 모든 걸 앗아갔지만 주먹밥이라는 연결고리는 결국 그들을 만나게 해주는 동력이 된다.

<세상 끝의 아이들>은 저자 나카와키 하쓰에의 발품이 가득한 작품이다. 그는 20여년간 한중일 3국을 돌며 취재를 해왔다. 소설에 등장하는 재일동포 미자의 삶만 봐도 그렇다. 재일동포로 살고 있는 미자의 삶은 일본인이 아닌, 재일동포나 한국사람이 쓴 듯하다. 다시는 광기를 부리던 일제의 만행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세상 끝’이라는 제목을 달았을까.

광기의 전쟁은 지금도 지구라는 하늘 아래서 벌어지고 있다. 수많은 난민들이 나오고, ‘히고쿠민’처럼 취급받는 이들도 물론 있다. <세상 끝의 아이들>이 보여주는 그런 아이들이 지구 하늘아래 있다. 아이들은 죄가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일까. 서로 다른 환경, 서로 다른 문화, 서로 다른 민족임에도 아이들에겐 경계가 없다. 그들에겐 ‘히고쿠민’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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