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9 17:38 (금)
경험으로의 건축
경험으로의 건축
  • 미디어제주
  • 승인 2020.03.1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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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건축 [2019년 9월호] 건축칼럼
고선영/포유 건축사사무소

나는 주로 라디오를 듣는다. 컴퓨터 앞에서 오랜 시간 작업할 때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이나 뉴스는 틱탁거리는 키보드 소리와 함께 나를 심심치 않게 한다. 최근에 듣는 라디오 방송 중에서 재밌는 프로그램을 알게 됐다. 변호사들에게 사회 이슈에 대한 의견을 묻는 코너이다. 특이한 점은 여기에 출연하는 변호인들의 조건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법대를 나오고 사시 혹은 로스쿨을 졸업해서 변호사가 된 이들이 아니고 전직이 따로 존재한다. 한 사람은 기자에서 변호사가 된 경우이고 다른 이는 판사에서 변호사가 된 경우이다. 지금은 둘 다 변호사지만 그들의 다양한 경험은 같은 사건에서 다른 시각차를 보인다. 단순히 옳고 그름이 아니라 왜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각자의 통찰은 그들의 전직을 알고 있는 이에게는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나 역시 건축사가 되기까지 여러 직업을 거쳤다. 건축사사무소에서 건축사보로 일한 것은 물론이고 한동안 전업주부 생활도 했고 단기간이지만 와이파이를 보급하는 초창기에는 안테나를 설치하는 곳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경험은 건축설계를 하고 있는 지금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 건축사보로서의 경험을 제외하고 지금의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직업이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나는 창호회사를 다닌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잠깐 경험이나 쌓아야지’라는 생각으로 다닌 회사에서 나는 건축설계와는 또 다른 설계의 세계를 접할 수 있었다. 단순히 설계의 한 요소로 ‘조망 및 채광과 환기를 주목적으로 하고 입면의 한 부분을 구성한다’라고만 알고 있던 창호는 창호설계라는 말이 존재할 정도로 다양한 형태와 종류가 존재했다. 물론, 내가 모든 창호를 다뤄본 것도 아니고 다 알지도 못하지만 나의 작은 경험만으로도 창호의 변화무쌍함과 섬세함을 알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창호설계를 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할 일은 건축도면을 검토하는 일이다. 전국에 있는 건축사사무소, 시공회사 혹은 건축주들이 실시설계나 견적을 요청하는 도면을 보내온다.

그러면 창호도와 창호일람표를 살펴본 후 건물의 평면과 입면, 단면 때로는 구조도면까지 검토해서 창호의 적합성을 판단한다. 창호나 유리의 규격이 적정한지, 설계위치에 맞는 적절한 종류의 창호가 적용됐는지, 생산 및 운반은 가능한지(제주도라는 특성상 운반 제약이 타 지역보다 심하다) 등을 검토한다. 여기까지는 건축설계와 비교하면 기본설계 정도에 해당된다.

창호 사양 및 종류에 대한 검토가 끝나면 좀 더 디테일하게 들어간다. 유리와 유리가 만나는 부분의 처리라든가, 창호와 창호가 만나는 부분, 창호와 벽체가 만나는 부분에 대한 디테일을 검토하고 창에 삽입되는 유리의 위치를 정해서 금형을 결정하고 그에 따른 부자재들을 선정한다. 그 후에 창호를 고정할 수 있는 위치를 찾고 그 방법을 결정한다. 고정 간격이 너무 크다면 보강을 고려하거나 창호에 슬리브를 주어 끊어가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는 창호뿐만 아니라 화스너나 앙카 같은 부자재의 구조검토도 필요하다. 이 밖에도 많은 과정들이 존재하지만 글이 너무 나의 전직 쪽으로 치우치는 것 같아 생략하겠다.

건축의 기본은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도를 가지고 공간을 설계하고 그 공간이 내가 구성한 모습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일단 구조적으로 안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설비들을 설치할 공간도 확보해 주어야 하고 재료도 선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구조나 설비, 전기 등은 사실 전문가들이 따로 있다. 건축사가 그들에게 요구사항(도면)을 알려준 후 상호 협의를 통해 조율해가면 된다. 하지만 재료는 별개의 문제이다. 공간을 구성하는 재료를 철로 할 것인지 콘크리트로 할 것인지 혹은 목재나 유리로 할 것인지 어떤 재료로 마감을 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건축사가 결정한다.(물론 건축주와의 협의는 당연하다) 그래서인지 내가 이제까지 계획한 건물들은 (단독주택부터 주차장까지) 모두 커튼월이나 혹은 그와 비슷한 시스템을 갖춘 재료들이 사용되었다.

설계를 하다보면 의도대로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처음에는 넓고 날렵한 공간을 생각했는데 도면으로 구현하다 보니 점점 좁아지고 둔탁하게 변해서 설계의도를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재료를 바꾸거나 형태를 수정하기도 한다. 이때 재료의 물성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도움이 된다. 수학에 비유하자면 공식을 아는 것과 같다. 어려운 수학문제도 적합한 공식을 대입하면 쉽게 풀 수 있는 것처럼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미지를 재료의 물성이라는 공식을 통해 도면에 그려낼 수 있다. 물론 공식을 안다고 다 풀 수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재료를 안다고 다 가능한 것은 아니다. 기술과 자본의 한계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물성을 잘 안다면 그만큼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설계에는 창호가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경주에 있는 분황사에서 모전석탑을 본 적이 있다. 지금은 3층만 남아 있지만 처음에는 9층이었을 것이라는 이 탑은 신라를 대표하는 탑 중의 하나로 석재를 벽돌모양으로 가공하여 전탑방식으로 쌓아올렸다.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우리나라 탑을 재료면에서 분류한다면 목탑, 석탑, 전탑 3종류가 있다고 알고 있다.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면 분황사 모전석탑은 탑을 세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석공에게 요즘 유행하는 벽돌로 탑을 세워달라는 의뢰인의 강력한 요구가 결합되어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시작이야 어쨌든 모전석탑이 석재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온 결과물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한 길을 걸어오며 많은 경험을 한 이도 있을 것이고, 여러 분야에 발을 담그며 경험을 쌓아온 이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경험이 결국에는 각자의 개성으로 자신의 설계에서 발현된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책을 통해 자신의 사상과 삶을 얘기하듯이 건축사는 건축물로 자신의 생각을 나타낸다. 거기에 경험이 더해져 건물의 표정이 더욱 풍부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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