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 메이커>와 「너무 한낮의 연애」
<케이크 메이커>와 「너무 한낮의 연애」
  • 최다의
  • 승인 2020.03.13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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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혹은 녹차 <14>

좀 엉뚱한 얘기지만 오피르 라울 그라이저의 <케이크 메이커>(2017)를 보고 받은 첫인상은 ‘음식들이 맛있어보인다’는 것이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주인공 토마스는 파티셰이고, 영화는 빵 반죽을 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토마스가 굽는 쿠키나 케이크 외에도 영화상에는 이런저런 음식들과 그것을 먹는 장면이 조명되지만 이는 인물들의 사회상이나 계급성을 환기하기 위한 관습적인 연출과는 무관하다. 영화는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명백하게 드러내지 않는, 아주 민감한 부위 어딘가를 살짝 간질이는 미묘함으로 가득 차 있다.

토마스가 운영하는 <카페 크레덴츠>에 오렌이 들어오는 장면으로 영화는 본격적인 서사에 접어든다. 오렌이 케이크를 먹는 장면은 꽤 긴 쇼트로 조명되지만 이렇다 할 리액션 없이 덤덤하고 조용하다. 관객들은 오렌이 자르는 케이크의 부드러운 크림과 진하고 촉촉한 시트를 자세히 볼 수 있고, 포크가 오가며 오렌이 느끼는 것을 상상하게 된다. 말없이 음미하는 달콤함, 사소한 것에서 예기치 않은 기쁨을 느낄 때의 작은 설렘과 어떤 열없는 망설임. 그리고 그 감각들로 매개되는 관계의 은유까지. 얼마 뒤 영화는 두 사람이 어두운 방에서 말없이 키스하는 것을 보여준다. <케이크 메이커>에는 의미가 명백한 프로파간다나 감정의 과잉이 없다. 그보다 이것은 사소한 세부들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알아차릴 수 있는 섬약한 감각이다.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문학동네, 2016.) 표제작은 “인사이동을 통보받았을 때 필용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십육 년 전 종로의 맥도날드였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먹을 것’의 상징성에서 대중적인 패스트푸드가 환기하는 정서는 다소 상투적이다. 그것은 16년 전 가난한 학생이었던 필용과 “집이라기보다는 굴에 가까”운 본가에 살던 양희의 궁핍하고 불안했던 형편과 멀리 있지 않지만, 소설은 그 이상을 조명한다. 「너무 한낮의 연애」는 진부하기에 언뜻 더욱 현실적인 세계의 상투성을 배경으로 낯설고 정교한 미묘함을, 세계에 동화되지 않는 ‘차이’를 드러낸다. ‘한낮의 연애’라는 제목에는 이질감이 있다. 연애라는 단어는 저녁이나 밤이라는 단어와 더 자주 쓰이는데, 사랑은 조용함이나 어두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연인 각자를 정의해오던 배경이 어둠 너머로 물러나고 오로지 단둘만이 남을 수 있는 오붓함, 둘마저도 너무 많아 하나가 되고마는 온화한 맹목이다. 책의 해설에서 강지희 평론가는 이 ‘한낮’을 “우리가 완벽하게 하나되었던 시간이 아니라, 드리우고 있는 그림자의 농도마저 다르다는 잔혹한 사실을 숨길 수 없었던 시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필용과 양희는 서로 화해될 수 없는 세계의 이방인이다. 같은 어학원에서 만나 같은 맥도날드에 마주앉아서 매일 비슷비슷한 세트메뉴를 먹고 있지만 양희가 보는 것은 “앞으로 펼쳐질 인생, 그 과정에서 반드시 이겨내야 할 어려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나서야 얻게 될 성취와 인정”이 아니다. 그녀가 살아가는 시간은 “분명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게 풀풀 흩어지는” 비루한 현재 뿐이다.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도 뭔가를 숨기려 들지도 않”으며 덤덤히 살아가는 사람의 세계는 언뜻 상투적인 세계의 명징하고 압도적인 목소리에 밀려 투명하게 사라지는 것 같다. 필용의 난폭한 속물성(그의 “양희의 외모나 한심스러움, 생기 없음, 무기력함, 가난에 대한 은근한 경멸”은 후에 “최소한이라도 꾸미고 다녀. 널 위해서 하는 얘기야. (……) 좀 있으면 값 떨어져.” 라는 수준 낮고 무례한 모욕으로 발화된다)에 양희는 하얗게 질리고, 버려지고, 남겨진다. 그래서 그것은 언뜻 수동적이고 연약해보이지만 사라지지 않고 유령처럼 남는다. 어딘가 보이지 않는 자리에 새겨진 듯, 흐릿하지만 아주 오래.

<케이크 메이커>의 관계들은 단순히 명명하면 삼류 신파극처럼 단순하다. 바람을 피우는 남자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남자 연인이 있다. 남자가 사고로 죽은 뒤 그의 고향에 찾아온 연인은 미망인을 만나 새로이 관계를 맺는다. 자극적이기 짝이 없는 전개인데 막상 영화에서는 화면과 소리가 담담하고 조용해서 과잉된 신파조가 느껴지지 않는다. 사랑이나 연애라는 개념은 흔하게 통용되는 만큼 어떤 절차에 따른 예측이 명료하기 마련인데, 감정의 세부는 그렇지 않다. 르네 지라르가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말했듯, “무엇을 말하건 간에 이 언어는 언제나 지나치게 많이 말하지만 충분치는 않다.”

오렌이 즐겨 먹었던 케이크를 그의 아내였던 아나트와 아들 이타이를 위해 다시 한 번 구울 때 토마스가 짓는 미소의 미세한 차이,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자신을 배신한 남편과 사별한 뒤 지쳐 있던 아나트가 토마스의 디저트를 먹고 깜짝 놀라듯 즐거워하던 순간, 접시에 묻은 케이크까지 핥아먹는 장면은 그녀가 마음을 여는 과정을 보여준다. 오렌의 흔적은 새로운 사랑을 저지하는 방해물인 동시에 행복과 사랑을 다시 느끼게 하는 근원이다. 이 양가적 사실 또한 오렌이 좋아했던 케이크, 오렌이 아나트에게 사다주었던 쿠키 등으로 끊임없이 환기된다. 그러한 디테일은 아나트가 토마스가 남편의 불륜 상대였음을 알아차리고 두 번째 배신을 맞닥뜨리는 순간을 한층 더 복잡한 시선으로 보게 만든다.

영화는 그 진실의 순간에 그녀가 어떻게 ‘폭발’했는지 생략하고 있기에 관객은 다만 남겨진 토마스를 통해 아나트의 감정을 상상하게 된다.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토마스의 감정이 색유리처럼 덧씌워진 채 ‘아나트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화가 났을까, 괴로울까, 그렇다면 얼마나?’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후에 <카페 크레덴츠>를 검색하고 사진 속 흐릿한 옆모습을 보면서 아나트가 떠올리는 것은 남편의 연인일까, 자신의 연인일까. 그녀의 모호하지만 어딘지 외롭고 괴로워보이는 표정은 스크린 밖으로 명료하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한낮의 유령 같은 선득한 낯섦은 소설의 맥도날드에도 조금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권고사직과 다름없는 인사이동을 받은 필용은 대낮에 펑펑 눈물을 쏟으며 맥도날드로 향한다. 일차적으로는 그곳이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패스트푸드점이라 회사 사람들을 마주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그 맞은편 건물에 양희가 연출하고 출연하는 연극 현수막이 걸린 것을 발견하면서 필용은 자신이 그 시간 그곳에 와있는 이유를 깨닫는다. 맥도날드는 양희가 있던 곳이었다. 모든 상투성들 속에 파묻힌 미세한 ‘차이’처럼 양희는 그곳에서 필용을 사랑했다. 필용이 지금 삶이 자신에게 내동댕이치는 모욕에 얻어맞아 허우적대고 있는 장소에서.

양희는 필용을 사랑했고 필용은 양희를 사랑해서 그녀의 본가가 있는 시골까지 찾아왔지만 토굴처럼 무너져가는 그녀의 빈궁한 집을 보자마자 속절없이 사랑을 접어버린다. 그 나약한 비굴함을 비난하는 대신 “선배,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봐요.” “언제 봐도 나무 앞에서는 부끄럽질 않으니까, 비웃질 않으니까 나무나 보라고요.”라고 했던 양희는 무대 위에서 나무가 된다. 그저 제 감정이 북받쳐 우는 관객들을 비웃지 않았듯 다시 속물적인 세계로 도망치는 필용을 비웃지 않고 그녀는 “그 어느 밤의 느티나무처럼” 다정하게 팔을 흔들어준다. 그것은 마치 사랑해요, 라든가 괜찮아요, 라는 한 마디만 전하려고 이승에 남아 있던 유령 같아서, 대답할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너무 투명하고 희미한 위로이다. 해설의 말처럼 “웃기에는 서늘하고 울기에는 좀 따뜻한” 감정만이 줄 수 있는 어떤 미묘하지만 섬세하고 정직한 위안이 이 모든 진부한 세계에 필요하다.

팝콘 혹은 녹차

최다의 칼럼니스트

- 제주대학교 국문학 석사
- 동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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