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8 23:58 (목)
“4·3이 추념일로 정해졌는데 왜 이름이 없죠?”
“4·3이 추념일로 정해졌는데 왜 이름이 없죠?”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0.02.12 1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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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청년들, 제주4·3을 담은 웹다큐멘터리 제작
파리에스트-마른라발레大 대학원생 6명 공동연출
<제주봉기>라는 이름으로 사건의 실체 제대로 담아
“미국이 관여했다는 증거의 존재도 확인할 수 있어”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제주 사람에겐 늘 아픔이 있다. 바로 4·3이다. 멍에와도 같다. 올해 4·3도 여지없이 찾아오지만 제대로 알려지는 게 중요하다.

연간 1500만명이 찾는 관광지 제주도. 외국인 관광객도 200만명이 찾는다. 관광객 숫자로는 ‘세계적’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4·3은 다르다. 모르는 이들이 많고, 외국인들에겐 더더욱 그렇다.

외국인들에게 제주4·3은 어떻게 보일까. 그런 궁금증을 해소하려고 ‘웹다큐멘터리’를 만든 프랑스 청년들이 있어 관심을 끈다.

제주4.3사건을 조명한 웹 다큐멘터리 '제주봉기'를 제작한 이들. 밑줄 6명이 프랑스 파리에스트-마른라발레 대학교 대학원생들이다. 미디어제주
제주4.3사건을 조명한 웹 다큐멘터리 '제주봉기'를 제작한 이들. 밑줄 6명이 프랑스 파리에스트-마른라발레 대학교 대학원생들이다. ⓒ미디어제주

프랑스 파리에스트-마른라발레 대학교 대학원생들이 연출을 한 웹다큐멘터리는 <제주봉기(Le soulèvement de Jeju)>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제주봉기>는 옥산 니타럼, 벤자망 로그로, 리사 뤼박, 아드리앙 라노, 에글랑틴 르노, 다프네 조앙쿠앙 등 6명의 대학원생이 공동 연출했다. 여기에 동의대학교 영화학과 학생들도 함께했다.

30여분의 다큐멘터리는 제주4·3평화공원의 외관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1948년 4월 3일 제주4·3이 일어난 시점을 이야기하고, 제주4·3의 도화선이 됐던 1947년 3월 1일의 모습도 담고 있다.

프랑스 청년들은 제주4·3평화기념관에 있는 ‘백비’의 실체를 들여다보고 의문을 제기한다. 프랑스 청년들이 품은 첫 의문점이기도 하다.

“기념관에 위치한 둥근 방에 들어가자 하얀 비석이 우리 앞에 누워있었다. 비석엔 어떤 내용도 새겨지지 않았다. 백비를 바라보며 사건 발생 70년이 지났지만 이름마저 정해지지 못한 제주4·3사건의 현주소를 마주할 수 있었다. 어째서일까. 백비에 그 이름이 새겨지는 날이 찾아올까.”

4·3에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주자는 ‘정명(正名)’을 그들이 말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4·3을 추념일로 정했음에도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지지 못한 사실이 그들에겐 의문일 뿐이다.

<제주봉기>에서 청년들은 제주4·3을 프랑스 청년들의 시각으로 바라보면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 봉기가 일어난 이유와 미군정이 개입된 사실을 말한다. 아울러 사건 발생 이후 50년간 말하지 못한 사연도 <제주봉기>에 담았다. 프랑스 청년의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은 의미심장하다.

“1950년대 초에 제주도에서 벌어진 일은 참혹한 학살이었다. 비극적인 사건이 진행되던 당시에 미국이 관여했다는 증거들의 존재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사건이 지난 지금에도 제주4·3사건 논란에 마침표를 찍고 싶어하는 도민들의 싸움은 여전히 길게만 느껴진다.”

프랑스 청년들은 제주4·3을 직접 느끼기 위해 관련 유적지를 탐방하며 70년 전에 발생한 이야기를 직접 느껴보기도 했다.

프랑스 청년들에게 제주4·3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프랑스 청년들은 유족을 만나고, 4·3을 제대로 알리려는 이들을 만나면서 4·3의 다양한 시각도 알게 됐다. 그들에겐 결국 다큐 시작점에서 보여준 의문점이었다. 바로 백비에 새겨질 ‘정명’이다. 그 의문점은 다큐의 마지막 장면에도 내레이션으로 보여준다.

“언제면 백비에 4·3의 새로운 이름이 새겨질 수 있을까. 그날은 분명 오겠지만 아직도 필요한 시간이 많고, 어떤 이름이 새겨진들 모든 도민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프랑스 청년들이 공동 연출한 다큐 <제주봉기> 제작엔 (사)제주국제문화교류협회 고영림 회장의 역할이 컸다. 고영림 회장은 “프랑스 대학원생들이 제주4·3을 제대로 알릴 수 있도록 현지 코디 역할을 하게 됐다. 제주4·3평화재단을 연결했고, 4·3의 전문가를 섭외하느라 고심했다”면서 “4·3을 프랑스어권에 알리는 게 중요하다는 사명감이 작동됐다”고 다큐 탄생의 배경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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