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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와 「그랑 주떼」
<빌리 엘리어트>와 「그랑 주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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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2.13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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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혹은 녹차 <11>

발레는 어떤 면에서 시대착오적일 정도로 고아한 예술이다. 그것은 인체를 비현실적인 경지로 끌어올려 그 몸의 육체성을 잊게 한다. 무용수들의 도약은 가볍고 우아한 팔다리에서는 땀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그러한 착각은 그 몸에 현실의 중력이 가해지며 근육들이 생생한 압력과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감춘다. 예술의 장르와 표현이 훨씬 다양해진 현대에 와서 발레 특유의 그와 같은 작위적인 전형성은 취향을 타는 부분이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편 그렇기에 발레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참 많다. 그 인위적인 형상에는 인간에게 본래 주어진 것(중력, 신체)을 초월한 어딘가에 닿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 달드리의 <빌리 엘리어트>(2000)와 김혜나의 『청귤』(은행나무, 2018)에 실린 단편 「그랑 주떼」는 둘 모두 발레를 소재로 삼고 있다. 그래서인지 주인공들의 입에서 상당히 유사한 대사가 나온다. <빌리 엘리어트>의 주인공 빌리는 대처 시대 영국 탄광촌의 열한 살 소년이다. 가망 없는 파업이 이어지는 궁핍한 나날 속에서 빌리는 우연히 동네 교습소의 발레 연습에 관심을 보이고, 이내 두각을 드러낸다. 그러나 영화는 소년의 삶을 동화적인 인생역전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토슈즈를 신은 빌리가 꿈처럼 뛰어오르는 장면과 형과 아버지의 힘겨운 파업과 시위, 더럽고 낡은 세간살이, 경찰 진압으로 피투성이가 되는 시위대 등은 끊임없이 교차된다. 어딘가에서 기적이 일어나든 말든 세상은 변함없이 계속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가 희망에 부푼 순진무구한 천재일 수는 없다. 일찌감치 어머니를 잃은 빌리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엉뚱한 묘비를 찾아가거나 아버지가 어머니의 유품이었던 피아노를 부숴서 장작으로 태우는 것을 보면서도 울지 않을 만큼 철이 든 현실주의자다. 발레를 배운 뒤로 시종일관 빌리는 아무데서나 미친 듯이 춤을 춘다. 빌리의 춤은 영감과 재능이 가득하지만 치유할 길 없는 울분으로 들끓는다. 동화 속의 ‘빨간 구두’처럼 빌리는 걸으면서도 춤을 멈출 수가 없다.

「그랑 주떼」의 주인공인 ‘예정’의 유소년기는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온갖 억압과 폭력으로 일그러져 있다. 그녀는 보기 흉한 신체 탓에 또래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하며 겉돌다가 학교 바깥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그 사건을 수치스러워하는 가족들은 아이의 기억을 억압하고 부정한다. 우울한 중학교 시절을 보내던 예정 앞에 갑자기 아름다운 전학생 리나가 나타난다. 그녀는 다른 세상, 무언가 특별하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온 존재처럼 보이고, 그녀가 예정에게 쏟는 애정과 관심 또한 비현실적으로 달콤하다. 예정은 무용수가 될 재능도 욕심도 없었지만 리나처럼 토슈즈를 신고 뛰어오르는 순간 그녀와 같은 세계에 속한 듯한 그 꿈결 같은 착각이 너무나 행복하다. 그것이 착각임을 예정은 잘 안다. 언젠가 프로 무용수가 될 리나는 예술고등학교로 떠날 것이고, 그들의 결별은 예고되어 있었다.

끝내 빌리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는 아들을 로열발레학교 오디션에 데려간다. 대기실에서부터 불안을 주체하지 못하던 빌리는 이 모든 짓이 바보 같다며 악을 쓰다가 자신을 위로해주려는 아이를 때리고 욕설을 퍼붓는다. 중산층의 넉넉한 가정에서 자라 자연스럽게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을 그 아이의 따스한 어른스러움과 빌리의 가시 돋친 무례함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빌리가 아이의 위로에 격노한 건 그러한 지점이었으리라. 아이는 ‘다음이 있으니 괜찮아’라고 말하지만 빌리가 알아왔던 삶에 ‘다음’ 같은 건 없기에. 빌리는 자신의 현실이 이 학교의 비현실적이기 그지없는 우아한 풍경들(학교의 인테리어는 옛 왕정시대 즈음의 저택을 연상시키며, 1980년대 현실의 탄광촌 빈민가 집안의 풍경과 분명하게 대비된다)과 동떨어져 있음을 잘 안다. 될 대로 되라는 태도로 일관하다가 짐을 챙겨 일어서던 빌리에게 심사위원의 마지막 질문이 던져진다. 춤을 출 때 어떤 기분이냐는 것이다.

“모르겠어요. 그냥 기분이 좋아요. 처음엔 좀 어색하지만…… 일단 추게 되면 모든 걸 잊게 돼요. 그리고…… 사라져요. 사라져요. (Don't know. Sorta feels good. Sorta stiff and that, but once I get going…… then I like, forget everything. And…… sorta disappear. Sorta disappear.)”

예정은 고향에 돌아와 예전 리나와 함께 다녔던 무용원에서 강사로 일하면서 몸을 풀 때마다 신체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일부러 얼음이 가득한 양동이에 맨발을 담가 스스로를 고문하다시피 그 고통스런 감각에 집중하기도 한다. “서서히 어둠이 몰려오고, 그 어둠에 앞이 보이질 않는 순간. 그럴 때면 정말이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고 “생각이 사라지고, 몸이 사라지고, 내 존재가 모두 사라져버렸”(『청귤』, p.147.)다고 그녀는 말한다. 신체가 그 본래의 영역, 생존을 위해 걷고 뛰며 생존하기 위해 고통을 느끼는 영역을 벗어나버렸을 때, 그것을 뛰어넘어서 사라져버렸을 때 그들은 현실 너머를 본다. 그것은 희망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짧은 찰나에 반짝이는 섬광이다. 그것은 빌리가 처음으로 피루엣 동작에 성공했을 때 얼굴에 떠오르던 순수한 미소이고 예정이 리나와 함께 있던 순간들에, 아픈 리나를 업고 달릴 때 예정에게 끓어오르던 거대한 애정이다.

리나야, 어디든 가줄게. 너의 발이 되어줄게. 네가 가고 싶은 곳 어디든, 내가 다 가게 해줄게. 태어나 처음으로 나는,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바로 너와 함께 있는 거야. (『청귤』, p.215.)

현실은 잊어버릴 수 있을지라도 사라지지는 않는다. 빌리가 로열발레학교로 떠난 뒤 아버지와 형은 광산으로 되돌아가 다시 어두운 갱도를 내려가고, 리나와 결별하고 예정은 여전히 외롭고 가난한 삶을 이어간다. 장밋빛 환상을 걷어낸 현실이란 그런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저 동물일 뿐이고 문명과 윤리가 이기적인 허위에 지나지 않다면, 우리의 하루하루가 먹고 자고 생존하는 것 이상이 아니라면 우리가 그 이상을 어떻게 볼 수 있으며 그 이상을 어떻게 바랄 수 있겠는가. 우리가 누구이든 이곳이 어디이든, 그 모든 현실이 사라지는 섬광의 순간에 우리는 무언가가 되고 싶어진다. 드높게 뛰어오르는 그랑 주떼는 결국 다시 땅으로 떨어지지만, 그럴지라도 그 한 순간만은 우리는 우리가 아닌 존재가 된다.

팝콘 혹은 녹차

최다의 칼럼니스트

- 제주대학교 국문학 석사
- 동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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