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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론(冊論)
책론(冊論)
  • 홍기확
  • 승인 2019.11.15 0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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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조각모음]<22>

서울에서 제주도로 이주한지 10년째다. 이주를 고려하며 집을 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근처에 도서관이 있는지 여부였다. 고민 없이 도서관 옆의 빌라중 하나를 구했다. 지금 사는 집은 제주도에서 세 번째 집으로 8년째 살고 있는데, 역시 도서관이 옆에 있다.

어릴 적. 집에는 항상 책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주워온 책, 얻어온 책은 물론이요, 고모이모삼촌외삼촌 등이 우리 집에서 출가하며 남기고간 책들까지 다양한 장르의 책이 있었다. 이것도 부족하여 나는 새마을도서관, 이동도서관 등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 책이 귀한 시절이라 친구와 책을 바꾸어 읽고, 책대여점에서 책을 빌려 읽고, 멀찍이 떨어진 공공도서관에서까지 책을 빌려 읽었다.

이제 밥벌이도 하고 여유가 생겼지만 여전히 가장 편한 장소는 집, 다음이 도서관이다. 틈만 나면 책을 빌려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과거현재미래를 살펴본다.

책은 동시에 5권 이상을 읽는다. 예전부터 이렇게 읽었는데 각종 독서법 관련 책을 읽어보니 이런 방법을 ‘병독(倂讀)’이라고 명명한단다. 한 번에 한 권의 책을 죽 읽으면 내 생각이나 가치관이 급속히 바뀌는 것을 경험한 어느 시점 이후로, 나는 작가의 생각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조금 조금씩 5~15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버릇이 생겼다. 1시간에 1권이 아닌, 10분씩 5권을 읽는다.

물론 책들의 장르는 다르다. 철학, 인문학, 과학, 수학, 외국어, 수필 등 서로 관련이 없는 책들을 주로 읽는다. 이렇게 하면 새로운 생각이 탄생하고, 기존의 사고가 연결된다. 가령 개미의 사회적 행동에서 인간의 정치적 행태를 접목하거나, 동양철학책인 순자(荀子)를 읽으면서, 통계학 중 회귀분석의 논리체계를 더 깊이 이해한다든다 하는 식이다.

하지만 나를 통해 나온 아이는 나와는 퍽이나 다르다.

아이는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기 전에는 뒤가 궁금해 식음을 전폐하고 읽는다. 밥 먹으란 말도 듣지 못한다. 심지어 읽던 책이 있으면 학교에 가져간다. 쉬는 시간에 책을 읽다 수업을 시작한지도 모르고, 점심을 먹고도 짬을 내어 학교 도서관에 틀어 박혀 책을 읽는다. 게다가 같은 책을 여러 번 읽기도 한다.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으나, 아이는 나름의 독서법이 있는 것이다.

아이가 내가 빌려온 리처드 리브스의 『20 VS 80의 사회 : 상위 20퍼센트는 어떻게 불평등을 유지하는가』라는 책을 우연히 보고는 읽기 시작했다. ‘폴리티코’에서 선정한 ‘미국의 사상가 50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한 그의 책은, 나로써도 읽기 쉽지 않은 책이다. 아이는 머리말을 읽고 이내 읽기 시작하더니 이틀 만에 완독을 했다.

내친 김에 역시 내가 빌려온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라는 책도 추천해 주었더니, 하루 만에 다 읽었다. 하지만 읽는 내내 질문 공세에 시달렸다.

“아메리칸 드림이 뭐야? 왜 부자는 가난을 외면하는 거지? 20대 80의 법칙이 뭐야? 자본주의라는 게 뭐지? 칼 마르크스, 샤르트르의 책들을 아빠는 읽어봤어? 난 왜 이렇게 모르는 게 많지?”

나는 아는 건 대답하고 하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올해 한국에서만 3만권의 책이 나왔어. 세계적으로 보면 200만권 쯤 되리라 생각하는데, 그걸 어떻게 다 읽을 수 있을까? 아는 것 보다는 모르는 게 많은 게 당연한 일이겠지.”

그러자 아이의 말이 걸작이다. 진심으로 심드렁한 녀석이다.

“세상에 모르는 게 1억 가지는 있을 거야. 아빠도 만날 책 읽고 공부하는 데 모르는 게 더 많으니까. 나도 마찬가지로 지금은 모르는 게 더 많은 게 당연하겠네. 그냥 모르면 모르는 대로 읽어야겠어.”

아이의 질문공세는 거세지고, 점점 철학적 사유에까지 옮겨간다. 수많은 질문과 답변이 오가고, 아이의 뇌에 있는 시냅스가 단숨에 확장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의 ‘책론(冊論)’이 점점 형성되고 있다. 이제 아이는 어린이에서 청소년을 뛰어 넘어, 순식간에 청년이 된 느낌이다.

그럼 나의 책론은 무엇일까?

첫 번째. 아주 간단하다.

다다익선(多多益善)

뽑기처럼 책에는 ‘꽝’이 훨씬 많다. 포장만 좋고 내용은 부실한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책이 많다는 얘기다. 따라서 좋은 책을 읽으려면 많이 읽는 수밖에 없다. 닥치는 대로 읽다보면 뭐라도 월척이 걸리겠지.

10권 중에 9권이 꽝이라면, 꽝이 아닌 확률은 10%다. 다시 말하자면 이 경우 10권을 읽으면 1권을 건진다. 그래서 나는 매년 1,000권의 머리말을 읽고, 그 중 100권을 골라 읽은 후 10권의 좋은 책을 건진다.

두 번째.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이다.

그 다음으로 무서운 사람은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다.

모르면 무섭고, 알면 조심스럽다.

집에 있는 책꽂이들에 읽지 않은 책들이 가득하다. 이 책을 언제 읽을까 걱정이고, 내가 왜 이렇게 많은 책을 샀을까하고 자괴감이 든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잠시 뿐. 어떤 책을 읽을까 책장을 기웃대다가 갑자기 김영하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책을 읽으려고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 있는 것이다.’라고.

나의 책론. 마지막 세 번째.

책은 물건이요, 서점과 도서관은 쇼핑몰이다. 책을 쇼핑하라!

쇼핑몰에 가면 충동구매를 한다. 충동구매는 마케팅 효과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자신의 욕망을 모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충동구매를 반복하면서 본인의 욕망을, 진정 사고 싶었던 것들을 발견할 수도 있다.

처음 서점, 도서관에 가면 충동구매 및 충동대출을 한다. 자신의 욕망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동구매 및 충동대출을 수십 번 하다보면 자신의 길이 보인다. 즉 어떠한 ‘분야’에 자신의 욕망과 관심이 있는지 알게 된다. 그런 종류의 책만 사고 빌리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직원이 책이 잔뜩 든 내 택배가 사무실에 도착하자 좋은 책 있으면 추천해 달라고 했다. 나는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답변은 책론(冊論)의 마지막과 같았다.

물론 내가 쓴 ‘좋은’ 3권의 책을 읽으면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참았다는 말을 꾹 눌러 참은 건 말할 수 없는 비밀이다.


 

일상의 조각모음

홍기확 칼럼니스트

2004~2010 : (주)빙그레, 파주시, 고양시, 국방부 근무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박물관 및 미술관 준학예사, 관광통역안내사(영어)
현 서귀포시 감귤박물관운영담당
현 서귀포시 공무원노동조합 사무국장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지식과감성#
         『느리게 걷는 사람』, 2016년, 지식과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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