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도심’은 제주시 동지역에만 존재하진 않아요
‘원도심’은 제주시 동지역에만 존재하진 않아요
  • 김형훈
  • 승인 2019.11.11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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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재생, 또 다른 이야기] <7> 조천읍의 역사성

수눌엉멩글엉팀이 조천리에 사업을 하는 이유

"제주도내 마을은 곧 핵심 역할을 하는 도심"

19세기 후반엔 기왓집 가장 많은 곳이 조천리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사람들은 원도심에 대한 오해를 많이 한다. 여러 오해 가운데 한 가지만 든다면 ‘원도심’을 ‘단 하나’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시는 사람이 살아서 만들어진다. 작은 단위의 마을이 이어지고, 다시 이어지는 과정을 거쳐야 도시가 된다. 때문에 마을과 마을이 이어져 만들어진 도시는 여러 도심을 두고 있다. 쉽게 정리를 하면 마을이 곧 도심이다. 하나의 도시에 하나의 도심이 아닌, 수없이 많은 도심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우린 도심을 하나로만 생각한다. 도심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지니느냐에 따라 우린 ‘도심’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외곽’으로 부르기도 한다. 어찌 보면 이같은 생각은 매우 중앙집중적 사고방식이다. 서울이 아니면, 모두 지방으로 전락하는 식이다.

도심에 대한 생각도 변화를 줘야 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 곧 도심이고, 도심에 활력을 입히는 일은 행정가의 몫이기도 하다.

다시 원도심 이야기를 해보자. 앞서 도심을 얘기했으니 원도심은 단 하나가 아닌 걸 알게 된다. 제주도엔 수많은 원도심이 존재한다. 더구나 예전엔 사람이나 물자의 이동이 지금과 달랐기에 지역의 중심이 되는 마을의 역할이 무척 컸다.

원도심은 ‘핵’으로 표현 가능하다. 제주시 도심의 핵은 ‘성안’ 등으로 불리곤 했던 지금의 제주시 원도심이다. 그 핵은 신제주라는 곳으로 옮겨졌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이다. 제주시 동지역에 사람이 몰리면서 읍면의 중심 마을이 힘을 잃었다. 때문에 읍면의 핵심지역도 원도심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원도심을 어떻게 살릴까. 제주시 원도심만이 아니라, 읍면 지역을 포함한 원도심에도 관심을 기울여보자. 제주시 문화도시 문화기획자 ‘수눌엉멩글엉’팀의 도시재생 사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한창 작업중인 공간은 조천북1길이다.

수눌엉멩글엉팀은 조천읍 역시 원도심 지역이라고 판단, 도시재생 사업을 진행중이다. 조천읍은 어떤 지역이었길래 수눌엉멩글엉의 눈에 들어왔을까.

조천읍은 제주도내에서 가장 큰 마을 가운데 하나였다. 19세기말의 사료를 들여다보면 어떤 마을인지 답이 나온다. 조선시대 때도 호구 조사를 진행하고, 기록을 남겼다. 그 가운데 <삼군호구가간총책(三郡戶口家間總册)>이라는 게 있다.

<삼군호구가간총책>은 제주도내 마을별 남녀 인구와 집의 크기를 담고 있다. 집은 기와를 얹은 와가인지, 제주전통의 새를 쓴 초가가 몇 칸으로 돼 있는지를 담았다. 개개인 집안의 크기를 담진 않았고, 마을 전체 통계가 여기에 보인다.

대상 마을은 제주도내 171곳이며, 당시 전체 인구는 8만5330명임을 확인하게 된다. 사료 자체가 단편적이기에 어느 마을이 어떤 위세를 지녔는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눈으로 확인 가능한 게 있다. 바로 ‘와가’이다. 당시에 초가가 아닌 와가에 산다는 건 어려웠다. 경제력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했다.

<삼군호구가간총책>에 등장하는 제주도내 171곳 마을 가운데 기와를 얹혀 살았던 마을은 14개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전체 와가의 칸수는 237칸이었다. 14개 마을 중엔 조천리가 61칸으로 가장 많았다. 다음이 삼도리로 57칸이었다.

<삼군호구가간총책>을 들여다보면 조천리의 위세가 만만치 않았음을 읽게 된다. 아무래도 육지부와의 교류가 활발한 지역이 조천이었기에 경제력 역시 다른 지역보다 앞선 곳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일제강점기 때는 항일운동의 전진기지라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조천만세운동은 조천리 출신 휘문보고 학생이던 김장환이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뒤 조천리에 내려와서 조천리 유지들과 뜻을 모아 시작됐다고 전한다. 김장환의 아버지인 김시학은 유학파이기도 했다. 조천 출신 항일운동가는 김장환을 필두로 김명식, 고순흠, 김문준, 김시숙, 안세훈 등 셀 수 없이 많다.

조천리가 다른 지역과 달리 유별나게 항일운동가가 많은 이유는 바다를 통해 오가면서 다양한 문물을 접했기 때문이다. 그런 배경엔 경제적 이유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제주4·3등 현대의 굴곡을 경험하며 차츰 제주 시내로 정치·경제가 더욱 쏠리는 현상이 가속화됐다.

도심의 쇠락은 조천리만 경험하는 일은 아니다. 모든 마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도시의 발달은 ‘핵’이 되는 곳을 더욱 강화시키고, 그렇지 않은 지역은 약해지는 경향이 있다. 수눌엉멩글엉팀이 주시하는 건 약화된 옛 핵을 들여다보는 데 있다. 조천리 지역도 원도심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제주시 동지역 외곽에서 도시재생이 이뤄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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