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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을 통해 ‘지금’이라는 시대를 생각한다
오현을 통해 ‘지금’이라는 시대를 생각한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9.09.20 1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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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제주 이야기] <14> ‘송자’로 불린 송시열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오현의 마지막 인물은 우암 송시열이다. 그는 당쟁을 배울 때 늘 등장한다. 서론의 영수였고, 노론의 영수이기도 했다. 성리학의 대가라는 이름도 그에겐 늘 붙어다닌다. 또한 ‘송자(宋子)’로도 불린다. 중국의 대학자들을 공자, 맹자, 노자, 주자라는 부르는데, 송시열을 일컬어 ‘송자’로 부를 정도이니, 어느 정도 대단한 인물인지를 알게 만든다.

송시열이 조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그의 이름이 엄청 많이 등장한다. 송시열이라는 이름은 무려 2847번이나 나온다.

송시열은 선조 40년(1607)에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주자, 이이, 조광조 등을 배워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 그러다가 27세에 생원시에 나서 1등으로 합격한다. 최명길의 추천을 받아 관직에 나서지만 곧바로 사직을 한다. 그러다가 42세 때 봉림대군의 스승이 된다. 당시 봉림대군 나이는 17세였다. 봉림대군은 나중에 효종이 되는 인물이다.

봉림대군을 가르친 그 다음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간다. 8년간 인질로 있다가 조선으로 돌아오는데, 봉림대군은 같이 붙잡혀 간 소현세자와 달리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 어찌 됐건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송시열은 핵심 인물로 부상한다.

하지만 송시열은 시대가 흐르면서 숙종 때 제주로 유배를 오게 된다. 장희빈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숙종은 세 명의 중전을 둔다. 인경왕후 김씨,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 등이다. 첫째 왕비인 인경왕후는 딸만 셋을 낳고 천연두에 걸려 죽는다. 숙종은 인경왕후가 죽은 뒤 1년 뒤인 1681년(숙종 8) 인현왕후를 맞아들인다. 인현왕후 나이 15세였다.

인현왕후는 8년이 지나도 자식을 낳지 못하는데, 장희빈이 30세에 아들을 얻는다. 나중에 경종이 되는 왕자 균이다. 숙종은 기다리지 않고, 균을 원자로 책봉한다. 이때 여러 신하들이 반대를 한다. 송시열도 마찬가지였다. 후궁의 아들을 원자로 올린 것과 관련해 송시열은 아주 긴 상소를 쓴다. 그 상소가 숙종을 화나게 만들었다.

송시열이 쓴 상소를 보면 중국 송나라 신종 이야기가 들어 있다. 신종은 28세에 철종을 낳는다. 철종의 어머니는 후궁이었다. 그러나 신종은 철종을 곧바로 태자로 삼지 않고, 신종이 병이 들어서야 철종을 태자로 삼았다는 내용의 상소였다. 숙종은 엄청 화가 났다. 숙종은 송시열을 그대로 둘 경우엔 임금을 무시하는 세력들이 연달아 일어나기에 관직을 박탈하고 유배를 보내라고 한다. 당시 송시열의 나이는 83세였다.

송시열은 1689년 2월 4일 제주 안치를 명령받았다가 얼마 후엔 다시 서울로 압송된다. 서울로 돌아가는 와중에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리려고 오던 금부도사 일행과 정읍에서 만나게 된다. 이때가 6월 3일이다. 송시열은 사약 두 사발을 마시고 죽었다고 한다. 송시열이 제주에 오고간 시간을 제외한다면 실제 제주에 머문 기간은 길어야 3개월이다. 어쨌든 송시열은 대단한 인물이었고, 5년 뒤에 일어난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곧바로 복권된다.

오현단에 있는 '증주벽립' 마애명. 송시열의 글을 탁본해서 오현단에 새겨놓았다. 미디어제주
오현단에 있는 '증주벽립' 마애명. 송시열의 글을 탁본해서 오현단에 새겨놓았다. ⓒ미디어제주

오현단에 ‘증주벽립(曾朱壁立)’이라는 마애명이 있다. 송시열이 서울 명륜동에 살 때 머물던 집의 뒤 바위산에 새긴 글이다. 오현단에 있는 ‘증주벽립’은 19세기 변성우라는 인물이 탁본을 해서 귤림서원에 기증했다고 한다. 그걸 제주목사 채동건과 판관 홍경섭이 철종 7년(1856) 귤림서원 서쪽 병풍바위에 새겨놓아 우리가 지금 그걸 볼 수 있게 됐다. ‘증주벽립’은 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 있듯이 존경하고 따르라는 뜻이다. 쉽게 와닿는 내용은 아니지만 구부러지거나 흔들림없는 송시열의 생각을 알게 된다.

오현은 지금을 사는 이들에게 뭘 생각하게 만들까. 역사가 E.H.카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우리들의 답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우리 자신이 처해 있는 시대적 위치를 반영하게 되는 것이고, 또한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를 어떠한 관점에서 보고 있는가라는 보다 광범한 문제에 대한 우리들의 답의 일부를 이루게 된다”고 했다.

우리는 제주도라는 땅에 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이 처한 위치를 알아야 하고, 그 전제조건은 바로 역사일 수밖에 없다. 아울러 제주도라는 사회를 알기 위해서라도 E.H.카의 말처럼 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게 역사일 수밖에 없다.

조선을 관통한 사상은 성리학이다. 이념이라는 건 어렵지만 ‘성리학’이라는 철학은 조선을 세계적인 나라로 성장시킨 원동력이었다. 철학이 없으면 정신이 없고,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는 나라가 온전하게 자리를 잡을 수 없다. 성리학이라는 이념은 갈등만 있다고 알고 있지만, 그 갈등을 해소하면서 성장시킨 원동력이 바로 성리학이었다.

특히 오현을 모신 귤림서원은 나라에서 내려준 서원이었다. 나라의 공인을 받은 서원은 그리 많지 않다.

더욱이 오현에 배향된 인물의 면면을 보면 꿋꿋한 기개가 엿보인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마음가짐은 바로 성리학이라는 철학이 바탕이 되어 있기에 그렇다. 오현, 어쩌면 지금 우리가 알아야 할 시대정신을 그들에게서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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