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치>와 「입동」
<서치>와 「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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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8.16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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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혹은 녹차 <7>

상실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도넛으로부터 도넛의 구멍만을, “물건에서 기능을 뺀 나머지를,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를”(김애란, 「입동」, 『바깥은 여름』, 문학동네, 2017, p.16.) 말하려는 것과 같다. “안 온 사람 손들어봐”라는 진부한 농담의 역설처럼, 오지 않은 아이는 손을 들지 않는다. 옆자리가 비어있는 아이, 남겨진 아이만이 ‘안 온 사람’에 대해 말하게 될 것이다. 남겨진 목소리로만 사라진 것을 이야기할 수 있기에 그것은 어렵고, ‘사라진 그것을 빼고 세상에 남은 모든 것’ 만큼 다양하다.

아니쉬 차간티 감독의 <서치>(2017)와 김애란의 단편 「입동」(2014)의 구조는 아이의 상실 앞에 남겨진 아버지의 시점을 쫓아간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2017년 출간된 김애란의 단편집 『바깥은 여름』은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남겨지는 과정에 대한 일곱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었다.

그 첫 번째 순서로 배치된 「입동」은 개중 가장 시의적인 작품이다. 소시민 가장인 ‘나’가 1년 전 사고로 네 살배기 아들을 잃었다는 결정적인 상실이 드러나기까지 소설은 ‘나’와 아내의 ‘내 집 장만’ 분투기를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의자 뺏기에서 떨어져나가지 않으려 용을 썼지만 “그래봤자 하우스푸어”다. 재치 있는 친구는 그냥 푸어가 아니라 하우스푸어니 얼마나 좋으냐고 면박을 주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언제나 “있어야 할 것은 모두 제자리에 있는지, 지켜야 할 것은 또 그대로 있는지” 불안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와 아내는 그토록 바랐던 주택을 장만했던 봄에 아이를 잃는다. 주택과 인테리어에 대한 속물적이고 희극적인 집착은 그들이 실제로 붙잡으려 애썼던 것이 집이 아니라 집이라는 허상이 가려왔던 무언가라는 점을 명백히 보여줄 뿐이다. 마치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처럼 아이는 그들에게 분리가 가능할 것 같지 않았던 공백이 된다.

<서치>의 주인공인 데이빗은 미국 이민자가정의 중년 가장이다. 그는 암으로 아내를 잃은 뒤 추억이 담긴 영상을 ‘검색 결과에서 숨김’ 처리하듯 그 상처를 닫는다. 아내의 생일에조차 아내에 대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엄마와 유독 각별했던 딸 마고에게 보내는 문자 메시지에서 끝내 ‘엄마도 널 자랑스러워 할 거야’라는 문구를 지워버린다. 사춘기 딸과 아빠 사이의 거리감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깊은 골이 그와 마고 사이에 있다. 여상하게 어색한 통화를 끝낸 어느 날 밤, 마고가 실종된다. 딸을 찾는 데이빗의 분투를 오직 웹 정보와 영상이 나오는 기기 화면만을 통해 보여주는 실험적인 연출, 그리고 방대하게 연결된 사생활을 추적해가는 관음적 긴장감은 영화적 재미를 더한다.

그렇게 ‘가상현실’로만 포착되는 화면 기법이 온라인에 매몰된 현대인의 실상을 꼬집고 있다는 점 또한 익히 언급되었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영화의 풍자는 가상적인 관계나 정체성에 중독되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 허위와 폭력을 직접적으로 생산해내는 ‘익명의 다수’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빗이 딸의 최종 목격자를 찾는 동안 연락을 받은 마고의 동급생들은 노골적으로 무관심을 드러낸다. 그러나 실종 사건이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자 그들은 sns와 유튜브 영상 속에서 갑작스레 마고의 ‘가장 친한 친구’로 돌변한다. 마고는 늘 혼자 다니는 아이였다는 말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데이빗은 그 아이들의 영상이 수천개의 ‘좋아요’를 받는 것을 본다. 실제로 아무도 마고를 찾지 못했으며 찾으려하지 않았음에도 가상 세계에서는 그를 향한 애도가 휘몰아친다. 다른 한편으로 ‘마고의 실종에 대한 진실’이라는 미명 하에 익명의 네티즌들은 근거도 책임도 없이 피해자를 모독하는 가십을 쏟아낸다. 경찰 수사가 마고의 죽음을 확신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을 때 ‘올 해 최고의 아버지’라며 데이빗의 사진을 sns에 올려 유머를 삼는 것 또한 화면 속의 그들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런 사고로 아이를 잃은 「입동」의 ‘나’는 보험회사 직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입에 담을 수 없는 추문에 휩싸인다. 아내는 모든 사람들이 “아이 잃은 사람”이 어떻게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해나가는지 감시하고 비난하는 것 같다며 집에 틀어박혀 시들어간다. 익명의 목소리와 눈길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악의로 던져놓은 국화”가 된다.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는 역겨운 냉정함은 데이빗에게 쏟아지는 인신공격과 딸의 죽음을 모욕하는 유머들처럼 그저 군중의 익명성 뒤에서 한 두 마디 툭툭 던지는 말, 한 번 던지는 시선, ‘좋아요’를 누르는 한 번의 클릭에 불과하다.

망가진 벽에 새 도배를 하다가 그들은 벽 구석에 아이가 미처 다 쓰지 못한 제 이름 낙서를 발견한다. 아내는 오열하다가 “다른 사람들은 몰라” 라고 말한다. ‘나’는 그저 “다른 사람들은 몰라”라고 아내의 말을 따라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한다는, 그 누구도 주지 못한 위로를 공유한다. “다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상실 뒤에 남겨진 사람을 위안하고,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쩌면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도넛의 중간에 뚫린 도넛의 구멍이나 물건에서 기능을 뺀 나머지,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처럼,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좋아요’를 눌러대는 유머 뒤편에 살아있고, 고통 받고, 웃을 수 있고, 어쩌면 당신을 고소할 수도 있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닐 것이다. 단지 사람들은 자주, 어쩌면 일부러 그것을 무시한다.

‘나’는 힘들게 마련했던 주택의 대출금으로 허덕이던 와중에 사고 가해자 측으로부터 아이의 보험금을 받지만 그 돈을 건드리지 못한다. 그 돈을 쓰자고 하면 “아내가 나를 괴물로 보지 않을까” 뒤척이던 ‘나’와 같은 마음이 한 번의 클릭 이전에 떠오르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그렇게 사소한 이유로 사람들은 괴물이 된다.

팝콘 혹은 녹차

최다의 칼럼니스트

- 제주대학교 국문학 석사
- 동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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