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11:28 (금)
여한유감(旅恨有感)
여한유감(旅恨有感)
  • 홍기확
  • 승인 2019.08.14 15: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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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조각모음]<15>

흔히 노인들의 임종 전, 특히 영화 장면 중 유언을 남기는 대목에서 나오는 말이 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여한이 없어? 사실일까? 진위를 확인해 보자.

임종 전 자식이 결혼을 했다. 늘그막에 얻은 자식에 막둥이라 결혼하는 것만 보고 죽으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죽음 앞에서 과연 여한이 없을까? 아니다. 자기가 오롯이 혼자 결혼을 시킨 것이 아니다.

결혼은 자식과 며느리 될 사람이 한 것이다. 자기가 한 것처럼 하면 자식과 며느리는 무엇을 했나. 그리고 자식은 혼자 다 키웠을까? 아니다. 부부가 함께 키운 것이다. 굳이 지분을 따지자면 부부 각각 50% 씩의 역할을 한 것이다. 자신이 아이 다 키우고 결혼시켰다면 ‘여한이 없다’는 말에 공감할 수 있으나, 이건 아니지 않은가?

죽음을 앞두고 여한이 없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결혼은 쌍방합의, 자식은 부부가 키운 게 5할, 자식이 스스로 자라난 게 5할이다. 심지어 사고가 나도 쌍방과실이지, 일방과실은 극히 드물다.

내 경우를 살펴본다.

나는 죽으면 억울하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은 꾸준히 늘어나기만 한다. 반면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이것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변함없는 진실이다.) 억울하다. 왜 미리 말 안 해줬어! 내가 태어날 때부터 앞으로는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고 미리 말해줬다면, 지구인이 되는 걸 다시 생각해봤을 터인데! 하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 뭐, 살다보니 지구생활도 나쁘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래도 억울하다. 소소하게는 가봐야 할 맛집이 꾸준히 늘어나며(심지어 아내가 같이 가자고 하는 맛집만도 15만 4,854개다!), 배우고 싶은 외국어도 아직 두 개 정도 남아있다.(사실은 전 세계의 언어를 맛보기로 배우고 싶다.) 어렸을 때부터 공상과학영화를 보며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타고 싶었는데 아직 지구인의 과학은 시기상조고(미련한 녀석들!), 솔직히 말하자면 지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슈퍼히어로로 변신해 지구인들을 구하고도 싶다.(같이 구하실 분은 연락바람. 010-6373-XXXX)

이처럼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은 세상에 비겁하고,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어렸을 적의 꿈을 잊고 살며, 세상의 모든 일들을 자신이 홀로 했다는 착각에 빠진 것이다.

대학교 입학하면 해야지. 직장 잡으면 해야지. 결혼하면 해야지. 아이 다 크면 해야지. 자 그 이후를 반복해보자.

아이가 대학교 입학하면 해야지. 아이가 직장 잡으면 해야지. 아이가 결혼하면 해야지. 아이의 손주 보면 해야지. 내가 죽으면 해야지(?)

해야지 했던 것들 모두 어디로 갔나? 이래도 여한이 없으신가? 이제 솔직하게 여한이 많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만.

하고 싶은 것 하나가 늘면, 세상에 대한 미련도 하나가 는다.

미련 없는 인생을 살라는 거짓부렁에 놀아나지 않는다. 불가능.

하고 싶은 수많은 것 중 몇 개만을 하고 가는 것이 인생.

미련하게 살며, 많은 미련을 남긴다.

그리고 미리 유언으로 유감 한마디.

‘남기다.’

 


 

일상의 조각모음

홍기확 칼럼니스트

2004~2010 : (주)빙그레, 파주시, 고양시, 국방부 근무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박물관 및 미술관 준학예사, 관광통역안내사(영어)
현 서귀포시 감귤박물관운영담당
현 서귀포시 공무원노동조합 사무국장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지식과감성#
         『느리게 걷는 사람』, 2016년, 지식과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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