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목사로 발령받았다가 곧바로 고향으로 간 사연은?
제주목사로 발령받았다가 곧바로 고향으로 간 사연은?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9.08.08 0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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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제주 이야기 <11> 규암 송인수

오현단 이야기를 하다가 오랜기간 글을 멈췄다. 다시 오현단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쯤에서 오현으로 모셔진 기록을 다시 정리해볼 필요가 있겠다. 충암 김정 선생은 선조 11년(1578)에 모셔진다. 이어 현종 10년(1669)엔 김상헌과 정온 선생이 추가된다. 숙종 4년(1678)엔 송인수가 추가되며, 마지막으로 숙종 22년(1696)에 송시열이 배향된다. 이로써 제주 오현은 완전체를 갖추게 된다.

처음에 충암 김정 선생에 대해 알아봤고, 잠깐 배향됐다가 결국엔 오현에 들지 못한 이약동 목사에 대해서도 알아봤다.

오현단에 있는 규암 송인수 시비(詩碑). 미디어제주
오현단에 있는 규암 송인수 시비(詩碑). ⓒ미디어제주

이번엔 규암 송인수 선생을 알아보자. 오현은 연령 순서로 배향이 되는데 두 번째가 바로 규암 선생이다.

규암 송인수는 1487년 태어난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다고 한다. 우리 나이로 36세 때 과거에 합격한다. 참고로 충암 김정은 22세 때 과거에 급제하고, 36세 나이에 사약을 받고 죽는다. 김정 선생이 규암보다 나이가 한 살 많았다. 충암 선생이 기묘사화 등 어지러울 때 개혁에 나섰다가 죽게 되고, 규암 송인수는 충암이 죽은 그 다음해에 과거에 합격을 한 셈이 된다.

제주 오현은 제주와 연관이 있기에 배향된다. 규암은 어떤 인연을 지녔을까. 그는 제주목사로 부임한 인물이었다.

규암은 중종 29년(1534) 3월에 제주목사로 내려온다. 그가 제주에 왔을 때 나이가 마흔일곱이다. 목사 임기는 대체로 2년인데, 이상하게도 제주목사로 부임한지 수십일만에 육지로 올라가 버린다.

규암이 제주목사로 부임을 받았다가 곧장 자신의 고향인 청주로 올라가자 논란이 일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 그때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쓸만한 인물이기에 제주의 중요한 일을 맡기려 했다. 그런데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병에 걸렸다고 사임하다니, 그가 병에 걸렸는지 알 수 없다. 이토록 제주를 싫어한다면 난리 때 죽음으로써 지켜 죽을 수 있겠는가.” (중종실록 77권, 중종 29년(1534) 6월 23일 무오 2번째기사)

위와 같은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데, 조정에서는 송인수의 행동에 대해 법률 자문도 하게 된다. 법을 관장하는 형조에 예속된 율관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율관은 다음처럼 답을 했다고 한다.

“제멋대로 이탈하면 장 백대를 때리고 변방으로 보내면 되지만, 임금을 업신여긴 죄이기 때문에 사형을 시켜야 한다.” (중종실록 77권, 중종 29년(1534) 7월 19일 갑신 2번째기사 )

율관의 답변대로라면 규암은 사형이라는 극형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된다. 정말 그랬을까. 다행히도 규암은 사형은 면한다. 대신 경남 사천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정말 궁금한 게 있다. 왜 규암은 제주목사로 오자마자 제주를 떠났을까. 분명 이유가 있을테다. 제주목사 직을 훌훌 벗어던지고 제주를 떠난다면 뻔히 고통 받을 앞날이 예상됐을텐데 말이다.

그 이유를 알려면 당시 정치상황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 중심엔 김안로라는 인물이 우뚝 서 있다. 김안로는 자신의 아들을 중종의 딸인 효혜공주에게 장가를 보낸다. 자신의 아들이 중종의 사위가 된 셈이며, 따라서 김안로와 중종은 사돈이 된다. 김안로는 그런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숱한 나쁜 일을 많이 저지른다. 그러다 김안로는 유배형을 받지만 다시 정계에 복귀해 승승장구한다. 그를 막을 자가 없었다. 다들 김안로의 눈밖에 나지 않으려 했다. 송인수는 달랐다. 성리학자로 이름을 날리던 송인수였고, 목소리를 낼 줄 알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송인수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박홍린을 험악하다고 한다. 그는 바로 김안로의 당이다. 본디 물망에 없었는데 아부하여 갑자기 재상의 반열에 오르니, 다들 비루하게 여겼다. 그러나 김안로의 당을 무서워해서 감히 입을 열지는 못하였다. (중략) 송인수는 가는 곳마다 박홍린의 음흉함을 말하였는데, 당시의 여론은 도리어 송인수를 그르게 여겼다. 송인수는 얼마 안 가서 제주도로 좌천되었다. 이때 요직에 있는 자는 모두 안로의 눈에 들어야 했고, 조금만 말이 거슬려도 모두 배척되었다. 심지어는 죽기까지 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무어라고 말하지 못하였다.” (중종실록 75권, 중종 28년(1533) 7월 29일 경오 5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내용을 보면 왜 송인수가 제주목사로 내려오게 되었는지를 알게 된다. 송인수는 김안로 일파를 계속 공격하고, 그로 인해 김안로의 눈에 거슬리게 되었다. 결국 제주목사로 발령을 받게 되지만 송인수는 제주목사로 내려왔다가 곧장 병을 핑계로 고향에 되돌아감으로써 암묵적 시위를 벌였던 셈이다. 꿋꿋한 성리학자였고, 불의에 항거할 줄 알았던 그였기에 오현에 배향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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