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쉬 걸>과 「완전한 항해」
<대니쉬 걸>과 「완전한 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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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7.16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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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혹은 녹차 <6>

2016년 개봉한 톰 후퍼 감독의 <대니쉬 걸>은 세계 최초의 성전환 수술자로 알려진 릴리 엘베(본명 에이나르 모겐스 베게너, 1882~1931.)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성 정체성을 깨달아가는 인물과 그 주변인의 흔들리는 심리를 표현한 주연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 중에서도 릴리의 ‘미소’는 독특하고 인상적이다.

영화 속에서 릴리는 자주 웃지만, 릴리의 미소는 대부분의 장면에서 위화감을 일으킨다. 그 미소는 주로 그가 ‘에이나르’와 ‘릴리’의 경계에 있을 때, 그로 인해 상대방에게서 상처를 받거나 상대(주로 아내 게르다)에게 상처를 줄 때 나타나기 때문이다. 성 정체성의 혼돈을 겪으며 기행을 저지르는 남편을 지키려 애쓰는 게르다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다. 게르다가 무너질 듯한 표정으로 비난이나 애원의 말을 던질 때 릴리는 수줍고 싱그럽게 씩 웃는다. 다음 순간 그의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릴리의 미소는 양가적이다. 영화 속에서 그가 마지막 수술을 앞두었을 때 게르다에게서 여성용 스카프를 돌려받고 미소를 머금다가 오열하는 장면은 미소가 감추던 균열을 보여준다. 수술의 성공은 그가 원했던 정체성으로의 완전한 이행을 의미하는 동시에 두 정체성의 경계에서 고통 받던 자신과 끝까지 함께 해준 게르다와의 결별을 의미했다. 대담하고 경박한 모델 릴리와 숫기 없고 섬약한 화가 에이나르 사이에 있는 미소. 그것이 내포하는 것은 나를 매혹하는 것이 나를 파멸시키리라는 예감이다.

윤이형의 『큰 늑대 파랑』(2011)에 수록된 「완전한 항해」는 SF적 상상력이 눈에 띄는 단편이다. 손톱만큼 작지만 빛처럼 빠르게 비행하는 종족 ‘루’의 소녀 창과, ‘튜닝’을 통해 그의 자아를 통합해서 더욱 완전한 지성을 갖추고자 하는 대부호 창연의 이야기는 예정된 창의 죽음을 매개로 교차한다.

‘루’는 빗방울로도 압사당할 만큼 작은 종족이다. 창의 친구들은 거대한 존재감과 문명을 가진 인간들을 증오하거나 동경하며 자신들의 짧고 유약한 생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러나 창은 친구들과 달리 종족의 부흥이나 문명 같은 것에 큰 관심이 없다.

창의 관심사는 오로지 더 빨리, 더 멀리 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창이 가장 갈망하는 것은 달이다. 가장 거대하며 닿을 수 없을 만큼 멀고 완전한 그곳까지 날아가는 것이 그의 꿈이지만 그것은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허황된 공상이다. 더군다나 창은 루 족의 길지 않은 수명에 비추어서도 너무 이른 나이에 죽음을 예고 받는다. 그 때 창에게 다가온 ‘튜닝’이라는 제안은 분명 합리적이다.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창연과 자아를 통합하면 창 자신의 육체는 소멸될지언정 그들의 자아는 불멸하며, 그들의 삶은 더욱 ‘완전’해진다. 창연은 루 족이 염원하던 종족인 인간일 뿐 아니라 인간 중에서도 존경 받는 삶을 살고 있는 여성이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창은 튜닝을 망설인다. 인간은 비행 능력이 없는 종족이다. 여전히 창을 매혹하는 것은 닿을 수 없는, 그를 빗방울이나 눈송이, 바람과 날벌레에 의해 죽게 만들 창공 너머에 있는 달이다.

실패한 유혹은 유혹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인물들은 무지한 오이디푸스가 아니다. 명백한 파멸을 앞두고도 그들은 그것에 이끌린다. 이유는 기묘하지만 그들을 유혹하는 것이 이미 그들 안에 있기 때문에, 혹은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섬세하고 내향적인 에이나르는 언제나 고향의 늪 풍경만을 그린다. 게르다가 당신이 그림 속 늪으로 사라질 것 같다고 넌지시 염려하자 에이나르가 건네는 대답은 후에 ‘릴리’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상황을 암시한다.

“난 늪 속으로 안 사라져. 늪은 내 마음 속에 있어(I won’t disappear into the bog. Bog is in me).”

에이나르가 같은 장소를 반복해서 그렸던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그는 어렸을 때 이미 여장을 하고 소년과 입맞춤을 했던 기억을 갖고 있었다. 자신이 한 순간 ‘릴리’였던 기억에 사로잡혀 그는 끝없이 그 고향의 늪을 그렸다. 그렇기에 수술을 받고 백화점 여급으로 일하며 ‘릴리’로서의 삶을 시작한 그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당신이 릴리를 나오게 했지만, 릴리는 항상 거기 있었어. 항상 기다리면서(You help lily to live, but she’s always there. She’s always waiting).” 라는 그의 말처럼, 창 또한 처음부터 루의 비행사였다. 그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날 수 있는 존재였고, 그에게는 단지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이 필요했다.

욕망은 때때로 지나치게 낯선 얼굴을 갖는다. 여성으로 살고 싶다는 에이나르의 지난한 노력이 정신병으로 취급받는 것처럼, 달에 가고 싶다는 욕망은 창에게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다. 문자를 갖지 못한 루 족은 그가 아무리 빨리, 멀리 난다고 해도 그것을 기록할 수 없으므로 그에게는 명예가 남지 않으며 속도를 높일수록 그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아진다. 그럼에도 창이 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어떤 의미의 ‘완전함’이다. 그것은 창연이 수십 개의 자아를 축적해가면서 얻은 비대하고 견고한 존재감이나, 인정받는 화가이자 금슬 좋은 남편이었던 에이나르의 안정된 삶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 있다. 그러나 창은 눈 사이를 헤치며 악을 써서 날아오를 때, 자신을 죽게 만들 거라고 생각했던 눈조차 금세 녹아내리는 연약한 결정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달처럼 거대하고 멀리 있는 존재 역시 닿을 수 없을 만큼 완전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으로 창은 죽음으로 뛰어든다. 100% 완전한 것이라는 개념이 허상에 불과하다면 완전함에 대한 수많은 목소리조차 편견과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창이 추구하는 완전함 또한 ‘완전한 항해’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사람은 단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 수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정상적인지, 심지어 행복한지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릴리가 마지막 수술의 실패로 죽음을 맞이한 뒤, 그가 평생 동안 그렸던 고향을 방문한 게르다는 그곳의 하늘에서 그의 유품인 스카프가 날아가버리는 것을 본다. 영화의 마지막은 눈물이 고인 게르다의 시선에서 스카프가 새처럼 허공에 나부끼며 멀어지는 장면을 오래도록 비추어준다. 완전한 내가 된다는 욕망은 허무하고 고통스러우며 끝내는 고독하다. 그럼에도 그것은 뜻하지 않게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다. 나를 매혹하는 것에게 끝내 내 모든 것을 불살라주는, 실패를 멈추지 않았기에 실패로 끝나지 않는 삶에는 사람을 움직이는 진실함이 있다.

팝콘 혹은 녹차

최다의 칼럼니스트

- 제주대학교 국문학 석사
- 동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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