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종 시인의 고백..."나는 죄악감을 품고 살아갑니다"
김시종 시인의 고백..."나는 죄악감을 품고 살아갑니다"
  • 김은애 기자
  • 승인 2019.06.01 01: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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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종 재일시인, <4·3과 경계, 재일의 선상에서> 주제로 제주포럼 찾아
“내 눈에 생생한 4·3 희생자의 참담한 모습”, 죄악감으로 일평생 산 시인

[미디어제주 김은애 기자]

김시종 시인은 '희생자는 숭고한 존재가 아닌, 취약한 존재'라고 말했다.

"희생자는 결코 그리 숭고한 존재가 아닙니다. 눈으로 보았을 때, 희생자는 아주 취약한 존재입니다. (죽어서) 방치된 사람처럼 추악한 것이 없습니다. 내 눈에 새겨진 것은 그런 시체들, 파묻으려 던져버린 시체가 80채 이상입니다. 그 썩은 시체에 손을 대면 냄새가 일주일, 이주일까지 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희생자의 취약하고 참을 수 없는 추함이 눈앞에 있었다는 '실감'을 말입니다."

한평생 자신에 대한 ‘죄악감’을 품고 살아왔다는 김시종 시인의 고백을 정리한 내용이다.

90세 노시인의 고백에는 후회와 미안함, 슬픔, 애통함, 아픔의 감정이 모두 담겨있다. 그는 도대체 왜, 처참했던 4·3 현장을 곱씹으려는 걸까. 4월 3일 '그날' 이후 반세기가 훌쩍 지난 시점에 인제 조금쯤은 편해져도 좋을 텐데. 왜 오늘도 ‘참을 수 없는 추함’을 애써 실감하려 하는 걸까.

제주포럼을 찾은 시인의 강연에는 절절한 그의 마음이 녹아 있었다.

제주포럼의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인 5월 31일 오후 5시 10분. 제주특별자치도가 주최하고, 제주4·3연구소가 주관하는 ‘4·3과 경계, 재일의 선상에서’ 토론 자리에 김시종 시인이 참석했다.

김시종은 일제강점기 시절인 1929년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고향을 ‘제주도’라고 말한다. 이유는 있다. 태어난 곳은 부산이지만, 시인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기억에는 제주가 자리하고 있어서다. 그는 어머니의 고향, 제주에서 4·3을 몸으로 겪었다. 그는 4·3의 혼잡한 상황 속에서 1949년 6월 6일 일본으로 밀항했고, 지금까지 일본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시인의 삶은 늘 ‘경계’를 넘고, 또 넘는 행동의 연속이었다. 남한과 북한, 일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아슬아슬한 경계의 지점에 있던 시절도 수십년 세월이다.

시인은 조선인이지만, 일제 아래 식민지 시대를 살았고, 조선어보다는 일본어가 익숙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인은 '육지'인 부산에서 '바다'라는 경계를 거쳐 섬인 '제주'를 찾았고, 청년 시인은 4·3 때 '국경'을 넘어 '일본'으로 향했다.

김시종은 일본에서 일본어로 시를 썼지만, 일본식 문체가 아닌데다 반일본적인 내용으로 일본 문단의 경계선 끝에 오랜 시간 걸쳐 있었다. 4·3을 연상시키는 표현으로 무수한 시를 발표했지만, 시인의 고백이 제주에 도착한 것은 최근에 이르러서다.

이날 자리에서는 "시인의 부치지 못한 편지는 이제야 제주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직 바다에 떠도는 유리병 속에 담긴 편지가 더 있을 지 모른다"라는 표현이 나오기도 했다.

어쩌면 북한에도 4·3을 증언하는 이들이 존재할 수 있다. 아니,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편지를 유리병에서 꺼내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국가와 우리 모두가 애써야 할 일이 아닐까.

김시종 시인은 일제강점기, '천황의 은혜에 감사'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을 고백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동화된 국민은 비단 그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시인은 광복절인 1945년 8월 15일을 이렇게 회상한다. 그의 말을 옮겨 표현하자면 17살 소년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같은’ 해방을 맞이하게 됐다고.

“저는 지금도 ‘무엇으로부터 해방되어 왔는가’라는 자문을 이따금 합니다. 바란 바도 없는 청천벽력의 ‘해방’에 마주쳤을 때. 저는 자기 감성의 원천이기도 한 소중한 언어, ‘일본어’로부터 처참하게 단절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지배를 받던 시절, 소년에게 일본어는 모국어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찾아온 ‘해방’은 그에게 커다란 혼란이었다. 어릴 적부터 배워온 ‘애정 어린 일본어’ 대신, ‘생소한 조선어’를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자서전 ‘조선과 일본에 살다’에 따르면, 그는 해방 전까지 일본의 식민지 교육에 동화된 ‘일본 제국의 소년’이었다. 어린 소년은 자신의 모국이 ‘식민지 지배’를 당하고 있다는 상황을 알지 못했고, 일본 동요를 부르며 천황의 은혜에 감사했다. 대한민국이 자신의 나라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온전한 식민지 시대’에 동화된 삶을 산 것이다.

그렇게 해방을 맞이한 시인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이 제주 시민을 향해 총을 쏜 ‘3.1발포사건’을 기점으로 4·3을 겪게 된다.

그의 자서전에는 당시 사정이 상세히 나와 있다. 시인이 남로당에 몸담았다는 이유로 ‘빨갱이’라고 불린 이야기, 목숨을 걸고 제주를 탈출해 일본으로 밀항한 일화는 1세대 재일조선인이 경험한 그리 드물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다.

“한때는 언어상실에 빠져 제 나라 언어인 조선어를 허겁지겁 익히기도 했지만, 저의 소년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식민지 종주국의 언어인 ‘일본어’입니다.”

시인은 광복 이후, 점차 자신이 ‘일본 제국의 소년’이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1945년 9월에는 광주의 학교에서 조선어를 배우기도 하는데, 이를 계기로 민족 시인들의 시를 접하며 새 가치관을 정립한다.

청년이 되어 올바른 역사 의식을 갖게 된 시인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일본어로 시를 썼다. 그가 시의 언어로 ‘일본어’를 택한 이유에는 어쩔 수 없는, 비통한 사정이 있다.

“저의 ‘재일’ 생활은 일본어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에서 시작됐습니다. 저는 저를 키워낸 일본어에 대한 보복으로 문필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안다. 언어란 곧, 사람의 의식이 담긴 그릇이자 이를 주관하는 힘을 가진 매개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런 그의 원초적인 의식을 담고 있는 그릇은 다름아닌 ‘일본어’였다.

도무지 어쩔 도리 없이, 그는 일본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했던 조선인이었고, 해방 후에는 제주를 벗어나야 했던 재일조선인이었던 것이다.

모국어로 형성된 고유의 정서는 어릴 적부터 자리를 잡아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진다. 어느날 언어를 바꾼다 하더라도, 본래 사용하던 언어로 습득한 정서를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한국인의 문화와 정서에 익숙한 아이에게 갑자기 서양의 사고방식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그래도 시인은 일본어로 습득한 의식의 경계를 깨뜨리려 부단히 애썼다. 일본어로 집필 활동을 하면서도, 일본식 문체를 버리려 노력한 것이다.

세련되고 유창한, 감정이 과다한 일본식 문체. 시인은 이러한 일본식 문체를 지양하기 위해, “매끄럽지 못한 일본어로 시를 써왔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시인의 노력 덕에 그의 시는 일본의 현대시와 확연히 다른 모습을 띤다.

일본의 현대시는 섬세한 감정, 사념을 표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시인은 간결하고 응축된 표현 방식을 선호한다. 이러한 시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반일본적 서정성이 담긴, 이전에 없던 새로운 표현 방식”이라는 평을 받는다.

김시종 시인은 자신의 의식 밑바탕에 있는 일본어로 시를 쓴다. 그리고 이 일본어 시에는 제주4·3의 참상이 기록되어 있다.

“분명 저는 일제의 굴레에서 벗어나 70여년 전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 의식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일본어와 결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일본어를 쓰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제 나라를 빼앗은 나라의 언어로 사고할 수밖에 없는 현실. 그래서 일본어로 시를 써온 시인. 그의 집필 행위는 조선과 일본 간 그어진 역사의 경계를 넘는 소리 없는 태동이었다.

“저는 ‘4·3의 비참하고 참혹한 사태를 일으킨 한 사람’으로 ‘죄악감’을 언제나 갖고, 마음속 깊이 쌓고 있습니다.”

토론회의 끝이 다가오고, 마지막 인사를 통해 언급한 그의 말이다.

시인이 가진 죄악감은 1949년 6월, 4·3 학살의 현장에서 자신만 벗어나 일본으로 피신했다는 사실. 그리고 여름날 '콩비지처럼 부풀어 오른' 시체를 무시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에 근거한다.

“제가 어찌하면 제주와 가까이하고, 제주가 내 마음 속에서 다시 살아날까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분단이 눈앞에 있는 것을 참지 못해서, 그리고 ‘3·1발포사건’을 참지 못해서 궐기했습니다만, 그것에 대한 참담한 결과로 죄악감을 갖고 있습니다.”

시인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4·3희생자’라는 단어에는 숭고한 심정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인이 본 희생자는 결코 숭고한 모습이 아니었다. "구더기가 눈에 기어 다니고", "썩은 냄새를 풍기는 송장" 과 같았다.

“나는 참혹한 (4·3이라는) 실태를 일으킨 (시대의) 끝(자락)에 있었던, 그런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혼자)만이라도 참지 못할, 가까이하기 힘든 시체를 들고 같이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이 자리가) 나의 원죄, 뿌리 깊이 사무친 이 죄악감을 잊어서는 안 되는 자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죄악감(罪惡感)은 '어떤 행위를 죄악이라고 느끼는 감정'을 뜻한다. 이는 자신이 행한 죄를 자책하는 '죄책감'과는 다른데, 일본에서 많이 쓰이는 표현이다. 그리고 시인의 고백에 미루어 감히 짐작해본다면, 그가 말한 '죄악감'은 아마 자신의 행동을 책망하는 '죄책감'과 가까운 곳에 있지 않을까 싶다.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라고 말했던 시인 윤동주처럼 말이다.

김시종 시인은 혼돈의 4·3 시절, 제주를 떠나 일본으로 밀항한 스스로를 자책하며, '죄악감'에 속에 산다고 고백했다.

4·3 당시 제주 사람들이 그토록 원해왔고, 지금도 바라는 남북 간 평화.

현장에서는 남북의 평화 기류를 형성하는 데, 시인과 같은 재일조선인의 역할이 중요할 거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재일조선인은 남북 사상에 대한 선입견이나 정치적 치우침이 적은 편이기 때문이다. 특히 '빨갱이'라는 말로 색깔론을 펼쳤던 과거 정권의 작전은 재일조선인에겐 통하지 않을 터.

시인 또한 남한과 북한이 소통하는 데, 재일조선인이 가교 역할을 수행하기를 바라고 있다.

한국과 일본, 남한과 북한 사상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일본어로 시를 쓰는 김시종 시인. 4·3을 떠올리면 '죄악감'을 느낀다는 김시종 시인.

고향 제주를 떠나 일본에 살던 그는 1998년 제주를 찾았고, 2003년에는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제주에 있는 부모님의 묘에 1년에 한두 번이라도 성묘를 하기 위해서다.

그를 또 제주에서 만날 수 있을까. 그의 건강이 허락되어 다시 만나기를 소망하며, 그의 장편 시집 <니이가타>의 일부 내용을 통해 기사를 마친다.

김시종 시인, <니이가타> 중에서...

해질녘

시간이

지나

추가 끊어진

익사체가

몸통이

묶인 채

떼를 지어

해변에

밀려 올라왔다

남쪽 끝의

투명할 정도의

햇볕

속에서

여름은

속절없이

죽은 사람의

얼굴을

콩비지처럼

부풀어 오르게 한다

삼삼오오

유족이

모여들고는

주저앉는다

몸뚱이를

무언중에

확인한다

물이 차고

물이 나고

모래가 아닌

해변의

자갈이

밤새

웅웅거리며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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