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9 17:38 (금)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과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과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
  • 최다의
  • 승인 2019.05.20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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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혹은 녹차 <4>

고양이는 묘한 동물이다. <고양이는 불러도 오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는 것처럼, 고양이는 가장 보편적인 반려동물 중 하나지만 인간에게 그만큼 절대적인 호감과 신뢰를 표하는 이미지를 갖지는 않는다. 그런 측면이 과거 고양이는 정이나 모성이 없다는 부정적인 풍문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물론 고양이는 개와 마찬가지로 타존재와 교감하고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동물이다. 그러나 고양이가 ‘불러도 오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부르는 나와 자신이 상관이 없다는 뜻으로도, 혹은 부르는 나를 잘 알지 못하거나 믿지 못한다는 뜻으로도 생각된다. 고양이의 ‘알 수 없음’은 온전히 해석되지 않고 또한 나에게 귀속되지 않는다. 고양이는 그런 면에서 ‘타인’을 연상시킨다. 그 의미가 즉각적으로 체감되거나 이해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손보미의 단편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2016)과 나가이 아키라 감독의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2016)은 고양이가 등장한다는 것 외에 별다른 연관성이 없지만 둘을 함께 살펴본다면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관하여 생각해볼 수 있다.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는 어느 날 밤, 망해가는 식당에 찾아온 마지막 손님이 “고양이 좋아하세요?”로 시작되는 그의 짧은 사연을 들려주는 내용이다. 손님의 사연은 1년 전 헤어진 여자친구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별하던 상황도 좋지 않았을 뿐더러 그 후 연이은 직장 문제를 홀로 감내하느라 그는 지쳐 있었다. “전, 제게 닥친 다른 일로도 너무 벅찬 상태였습니다.”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그런데 헤어진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던 그녀가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갑자기 동네에 부쩍 늘어난 길고양이가 집에 들락거리기 시작했다고 하소연하기 위해서다. 문단속을 제대로 하라는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화는 몇 번이나 더 이어진다. 이미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그는 그녀가 “내 말이라면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고” 분노하기 시작한다.(‘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 또한 고양이에서 연상되는 특징일 수도 있다) 그러던 그는 문득 생각한다. 자신의 삶은 이미 “무단 침입한 고양이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의 도입부에도 비슷한 대사가 있다. 뇌종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우편배달부 청년 ‘나’는 그날 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의문의 존재’를 만난다. 의문의 존재-악마는 세상에서 어떤 것 한 가지를 없애면 ‘나’가 하루를 더 살 수 있다고 매일매일 갱신되는 계약을 제안한다. 머뭇거리는 ‘나’에게 악마는 답답하다는 듯이 채근한다.

“세상은 쓸모없는 것들로 가득하잖아! 트럼프도 필요 없고, 루빅스 큐브가 세상에 필요해?”

영화의 ‘나’는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의 ‘그’와 달리 트럼프나 루빅스 큐브를 자발적으로 소유했다는 차이는 있다. 그러나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서 그것들은 “물이나 음식”처럼 목숨에 직결되는 문제에 비해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오랜 시간 연인이었던 여자가 실제로 고양이들을 막을 생각이 없음에도 그 핑계로 계속해서 전남자친구에게 전화를 하는 것은 사실 이해하기 쉬운 함의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중압감에 지쳐 이미 언제라도 폭발할 것 같은 상태였던 그는 전화의 의미를 생각하지 못한다. 그녀의 전화는 힘겨운 삶에 하나 더 얹어진 의미 불명의 짐일 뿐이며 고양이는 그 “쓸모없는 것”을 자신의 삶에 가득하게 만드는 분노의 대상이 된다.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그저 살아남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나’가 악마와 계약해서 차례차례 전화와 영화, 시계를 없앴듯이 ‘그’는 고양이들을 처리하기로 마음먹는다.

전화와 영화, 그리고 ‘고양이’의 공통점은 생각보다 쉽게 드러난다. 그것들은 ‘나(그)’가 살아남는 데에 무가치하며, 살아남기 위해 삶으로부터 포기해야(없애야) 하는 것이다. 영화는 전화나 영화가 사라졌을 때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불편함이나 사회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사람들의 손에 들린 핸드폰과 DVD는 주르르 녹아서 사라져버리고, 휴대폰 판매점과 DVD 대여점은 문구점이나 서점 따위로 바뀌어버린다. 전화가 메모지여도, 영화가 소설이더라도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나’와 그것들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은 개인을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과거 회상 중 상냥했던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나’의 여자친구가 “내가 죽으면 울어줄 사람이 있을까?” 라고 허망해하며 “난 살아남을 거야!”라고 절규하는 것은 같은 맥락에 있다. 내가 인식하는 세상이 세상의 전부라면 내가 죽은 뒤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나의 생존에 의해서만 세상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생존만을 향해서 나의 시야가 집중될수록 나의 세상은 “쓸모없는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면서 좁아진다. 그러나 ‘세상’과 ‘나’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일까? 두 작품은 나와 관계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세상, 즉 타인이 어떻게 나와 관계 맺고 있는지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전화를 매개로 여자친구와 맺어졌던 ‘나’의 추억은 전화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영화광 ‘츠타야’와의 우정 역시 영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성립되지 않는다. 이 명제는 더 나아가서 여자친구나 츠타야라는 타인이 ‘나’에게 남긴 흔적들은 ‘나’ 자신과 분리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영화 중반부에서 어머니가 맡긴 회중시계를 고치느라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이 상황에서 시계라니, 뭘 어쩌자는 거야.” 하고 원망을 쏟아낸다. 그러나 ‘시계’가 세상에서 사라질 즈음이 되어서야 ‘나’는 끊임없이 고장 나는 낡은 회중시계를 묵묵히 고쳐주던 것이 아내를 향한 아버지의 변함없는 애정의 표현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와 동시에 시계방을 꾸리던 아버지와 그를 사랑한 어머니라는 가족의 존재가 없다면 현재의 자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소설에서 고양이를 처리하러 갔던 ‘그’ 또한 고양이들을 죽이는 데 실패한다. 왜냐하면 그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제껏 봐왔던 온갖 만화 영화와 소설에 나오는 고양이들, 그리고 주차장이며 건물 틈에서 마주치는 고양이들은 이미 그의 내부로 깊게 틈입해온 ‘타인’이며 그 자신의 추억이 되어 있었다. 그는 “무언가 자신의 삶 속에서 우지끈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느끼면서 고양이들을 내버려두고 나온다. 혼자만의 세상 속에서 단지 ‘살아남는’ 것 대신 타인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택함으로써 그는 살아남는 것에 실패한다. 그 또한 ‘나’가 그랬듯 악마에게 “고양이는 없애지 마세요.”라고 말하며 삶에서 퇴장하는 것이다.

전화로 고양이 이야기를 시작했던 ‘그’의 여자친구가 악마가 아님이 분명하듯, ‘나’에게 찾아온 의문의 악마 또한 초현실적인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시야에 미처 들어오지 않았을지라도 세상에 존재하는 타인들을 통해 자신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나’가 받아들이자 사라졌었던 전화기나 영화 포스터는 원래대로 돌아온다. ‘악마’는 나 자신을 향해서 좁아지는 시야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는 타인을 부정하고 망각하는 마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로 살아남는 것에 실패했을지라도 자신이 “고양이를 좋아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은 윤리적이다. 그로 인해 인간은 타인과 함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팝콘 혹은 녹차

최다의 칼럼니스트

- 제주대학교 국문학 석사
- 동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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