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3 18:27 (화)
스승이 걷는 길이 곧, 학생의 미래다
스승이 걷는 길이 곧, 학생의 미래다
  • 김은애 기자
  • 승인 2019.05.15 15: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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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 스승의날 감사하며 환기해보자
남한 단독정부수립 반대 외친 제주 교사들
교사들의 외침, 학생들 동참으로 이어져

[미디어제주 김은애 기자] 5월 15일은 스승의날이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그 은혜에 감사하는 오늘, ‘스승의날’.

그래서 준비했다. 선생님과 관련된 시 한 편과 함께 제주 조천중학원 교사들이 걸었던 길을 살펴보자.

어릴 때 내 꿈은
                                      도종환


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뭇잎 냄새 나는 계집애들과
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 녀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창 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
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플라타너스 아래 앉아 시들지 않는 아이들의 얘기도 들으며
하모니카 소리에 봉숭아꽃 한 잎씩 열리는
그런 시골학교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는 자라서 내 꿈대로 선생이 되었어요.
그러나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침묵과 순종을 강요하는
그런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묶어놓고 험한 얼굴로 소리치며
재미없는 시험문제만 풀어주는
선생이 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럴 듯하게 아이들을 속여넘기는
그런 선생이 되고자 했던 것은 정말 아니었어요.
아이들이 저렇게 목숨을 끊으며 거부하는데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편이 되지 못하고
억압하고 짓누르는 자의 편에 선 선생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아직도 내 꿈은 아이들의 좋은 선생님이 되는 거예요.
물을 건너지 못하는 아이들 징검다리 되고 싶어요.
길을 묻는 아이들 지팡이 되고 싶어요.
헐벗은 아이들 언 살을 싸안는 옷 한 자락 되고 싶어요.
푸른 보리처럼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동안
가슴에 거름을 얹고 따뜻하게 썩어가는 봄 흙이 되고 싶어요.

‘접시꽃 당신’이라는 이름의 시로 유명한 도종환 시인은 실제 교사생활을 한 이력이 있다.

그는 진천의 덕산중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던 중, 1989년 전국교직원 노동조합 활동으로 해직된 후, 1998년 다시 복학했다. 문화체육부장관으로 임명된 바 있으며, 현재는 국회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시인은 고민한다. 좋은 교사란 무엇일까, 좋은 교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아이들이 쑥쑥 자랄 수 있도록 스스로 ‘거름’이 되겠노라 말하는 그 같은 선생은 제주에도 있었다.

바로 1946년 3월 설립되었다가 ‘빨갱이 학교’라는 이유로 폐원된 조전중학원 교사들이다.

조천중학원 옛터. (사진=제주4.3아카이브)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 교육에 대한 사명감을 품고 주민들의 자발적인 힘으로 생겨난 조천중학원. 당시 조천중학원의 교사로는 현복유(학원장, 국어), 김민학(수학, 과학), 김동환(영어), 이덕구(사회, 체육), 김석환(역사), 김응환, 한평섭 등이 있었다.

이들 교사는 모두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유능한 인재였는데, 상당수가 친일파 척결을 주장하는 단체에서 활동하거나, 관련된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7년 3월 1일, 경찰이 제주도민들을 향해 총을 쏴 6명이 숨진 발포사건이 발발한다. 이에 제주에서는 3월 10일 ‘민관총파업’이 일어나는데, 여기에는 도민과 행정기관, 학교, 회사, 은행 및 일부 경찰이 참여했다.

총파업에는 조천중학원도 참여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미군정과 서청으로부터의 탄압으로 이어지게 된다.

탄압은 교사뿐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무자비하게 이뤄졌다. 갑자기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는 일은 조천중학원 교사와 학생들에게는 흔한 일이었을 정도다.

1년여의 힘든 시기를 보내던 조천중학원 교사와 학생들. 이들은 1948년, 제주4·3으로 또다시 비극을 만나게 된다.

특히 조천중학원의 교사였던 이덕구는 제주4·3 때 유격대장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덕구는 조천중학원의 파업 문제에 대한 취조를 받으며 한 달 이상 경찰에 구금되었다 풀려났는데, 이후 학생들에게 ‘마지막 수업이다. 육지로 간다’라는 인사를 남긴 채 장기 휴가원을 내고 교단을 떠났다.

이후 제주4·3이 일어나며, 이덕구는 남로당의 인민유격대 제1연대장을 맡고 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에 대한 일화는 민중들 사이에 마치 신화처럼 남아있다.

평소 다리에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달고 다니다가, 경찰을 만나면 즉시 풀고 달아나기 때문에 엄청나게 빠르다는 이야기. 경찰이 그를 발견하고 총을 겨누려고 했는데, 마치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갑자기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다.

하지만 이덕구의 삶은 짧았다. 1949년 6월 8일,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 십자형 틀에 묶여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항간에는 그가 무장투쟁을 하던 중, 사살당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조천중학원 옛터의 현재 모습. (사진=제주4.3아카이브)

조천중학원의 학원장(교장)인 현복유 역시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경리부장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제주도의 4월 3일>이라는 증언록에 따르면 그는 변호사시험에 합격해 서울 대법원에서 근무할 기회를 얻지만, ‘대의를 위한다’는 이유로 자리를 지킨다. 이후 현복유는 많은 청년들에게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총선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라는 의식을 가르쳤다.

현복유는 1949년 제주지검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실제 형이 집행된 것은 아니며,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그의 나이 34세였다.

이덕구, 현복유와 마찬가지로 조천중학원의 교사들의 대부분은 제주4·3으로 인해 죽임을 당하거나 피신하여 행방이 묘연하다. 학생들 또한 마찬가지로 제주4·3 당시 희생당하거나 피신하게 되는데, 이는 1948년 조천중학원 폐원으로 이어진다.

조천중학원 교사들은 국민이 주권을 가진다는 민주주의 의식과 민족의식을 몸소 실천했다. 교사들 모두 제주4·3 당시 항쟁지도부에 참여했고, 학생들은 이를 본받아 자치위원회를 구성해 활동했다고 한다.

분단되지 않은 대한민국, 다른 나라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이 담긴 교사들의 항쟁이 학생들의 목소리로 이어진 것이다.

교사 개인이 가진 신념, 그가 걷는 길이 어디로 향하는가 따라 학생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한민국의 분단을 막으려 한 이들 교사를 기억하며. 오늘은 스승님께 감사의 전화 한 통 걸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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