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터 콜>과 『계속해보겠습니다』
<몬스터 콜>과 『계속해보겠습니다』
  • 최다의
  • 승인 2019.04.16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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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혹은 녹차 <3>

황정은의 소설에서는 자주 환상과 현실이 뒤엉킨다. 사람이 모자로 변하고, 그림자가 저 혼자 움직인다. 『계속해보겠습니다』(2014)에는 그런 종류의 환상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근원적인 의미에서 이야기하는 바가 같다.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말아줘.”(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창비, p.187.) 가 그것이다.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의 <몬스터 콜>(2016)에는 움직이는 거대한 나무 괴물이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으므로 세상에 없는 것처럼 여기는 일들에 비하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투명인간’의 기분에 비하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환상보다 더 공허한 현실과 현실의 무엇보다도 단단한 환상 사이에서, ‘없는 것이 아닌 일’을 두 작품은 이야기한다.

『계속해보겠습니다』는 소라와 나나라는 한 자매와 나기라는 그 또래 남자의 이야기이다. 네 장으로 구성된 각 장의 제목도 같은 순서로 세 사람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마지막 장은 ‘나나’가 반복된다) 대략적으로는 이렇다. 아버지가 다니던 공장에서 사고사한 뒤, 합의금마저 시가에 모두 빼앗기고 정신을 놓아버린 어머니와 함께 소라와 나나는 기묘한 반지하 셋집에 이사한다. 그곳에서 자매는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소년 나기를 만난다. 친해진 세 사람은 어른이 되고 어느덧 나나는 남자친구 모세의 아이를 임신한다.

그 ‘셋집’은 소설에서 주요한 소재로 반복해서 언급된다. 세 사람은 그곳에서 긴 시간을 살았지만 구조가 너무 기묘한 탓에 그런 공간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도무지 믿지 않는다. 그 셋집은 화장실과 현관이 중앙에서 일직선으로 마주보는 좌우대칭의 구조인데, 그 중심선에 벽을 하나 두어서 두 살림이 화장실과 현관을 공유하며 함께 살도록 만들어져 있다.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다. 그러나 상상하기 힘들다는 것은 그것이 환상이나 초현실로 느껴진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상상하고 싶지 않으니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덮어두는 것에 가깝다.

그것은 알고 싶지 않고, 알지 않으면 나와 상관도 없는 먼 곳의 불행이다. 그것은 모세가 결혼을 앞두고 나나의 어머니가 정신질환으로 요양원에 있다는 사실을 감추려 하는 태도와 유사하며, 모세의 어머니가 길일에 출산을 해야 하니 그날 나나의 배를 절개해야한다고 선언하는 태도와 유사하다. 그들은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 고통과 불행을 자신이 느끼거나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외면한다. 환상처럼 비현실적인 셋집은 공감하지 못하므로 없는 것으로 취급되는 것들에 대한 은유이다. 세상에는 ‘환상’을 통해 보아야만 볼 수 있는 것들도 있다. 그것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평범하고 당연한’ 것들을 ‘평범하고 당연하게’만 무시해버리는 현실의 관점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몬스터 콜>의 주인공 코너는 말기 암 환자인 어머니와 함께 사는 열두 살 소년이다. 이혼한 아버지는 새 가정을 꾸렸고, 어머니가 죽으면 함께 살아야 할 유일한 혈육인 외할머니는 코너를 싫어한다. 죽어가는 어머니는 코너를 돌볼 능력이 없고, 보호자가 없는 코너는 학교에서도 괴롭힘을 당한다. 코너는 매일 밤 악몽을 꾼다. 무너지는 거대한 심연 속으로 떨어지는 어머니의 손을 간신히 붙들다가, 끝내 그 손을 놓치는 꿈이다. (이 꿈의 메시지는 영화의 주제와도 중요하게 연결되지만, 이 문장 자체는 사실이 아님이 나중에 밝혀진다)

어머니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밤, 코너는 자신의 방 창문으로 언제나 보이는 거대한 주목나무가 스스로 일어서더니 사람처럼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을 본다. 그것을 ‘그냥 꿈’이라고 부정하던 코너는 서서히 나무 괴물이 들려주는 동화에 대해 대화하면서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었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나무 괴물은 물론 환상 속의 존재이다. 코너가 나무 괴물과 만나는 장면에서 나무 괴물이 거대한 몸집으로 부숴버린 건물이 다음날 코너가 사람들과 만나는 장면에서는 아무 일 없이 그대로 존재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코너에게는 나무 괴물과의 대화가 아니라면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이 존재한다. 정확히는 나무 괴물이 하는 말들이 그 ‘이해할 수 없으나 존재하는’ 일들 자체이다. 나무 괴물이 코너 자신조차 부정하는 ‘코너 자신의 이야기’를 끌어내려고 애쓰는 것과 반대로 현실의 사람들은 그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사실상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어머니의 죽음이 점점 진실로 다가오자 그 내압을 견디지 못하고 코너가 폭발했을 때조차 어른들은 ‘혼내서 뭐하겠니’라는 무심한 체념으로 그것을 외면한다. ‘코너 자신의 이야기’는 코너 자신의 고통이기도 하다.

세 아들을 전쟁에서 한꺼번에 잃어버린 왕의 이야기를 듣고 코너가 유치하다고 빈정거리자 나무 괴물은 “네가 창에 찔려 죽은 사람의 비명을 듣지 못해서 그래.”라고 대답한다. ‘가치 없는’ 것은 실제로는 ‘알지 못하는’ 것이기 쉽다. 나나의 어머니가 정신질환자인 것이 부끄러워서 그것을 감추고 묻어버리려 하는 모세가 그렇다. 그는 실제로 그 어머니와 평생을 함께 살아온 나나의 삶을 알지 못한다. 그 자매가 정신이 망가진 어머니 밑에서 어떻게 생존해왔으며 그럼에도 그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른다. 모세는 그 불안한 시간을 함께 했던 나기가 나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나나가 자신에게 이별을 통보하자 그를 연적으로 착각한다. 나기가 나나를 성애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나나는 자신의 존재와 고통을 ‘환상’처럼 취급하는 사람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존재하지만 ‘알지 못하므로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두 자매와 한 소년이 유년을 보낸 셋집이 필요했듯 ‘모두가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것을 바라보기 위해 코너에게는 나무 괴물이 필요했다. 모세가 부정할지라도 나나에게는 여전히 살아있어서 그녀에게 고통을 주는 어머니가 있으며, 모세보다도 더 그녀를 잘 알고 사랑하는 소라와 나기가 있다. 코너가 아무리 부정해도 어머니가 죽을 거라는 사실은 점점 더 확고해진다.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코너는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만 하기에’ 무시해왔던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될 것들’의 존재가 거기 ‘있음’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외할머니와 같이 살게 된다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을 의미하므로 코너는 어머니의 죽음을 부정하기 위해 외할머니의 존재를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고 떠나버린 아버지를 원망한다.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코너는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책임지지 못했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으므로 코너를 사랑할 수 없었던 외할머니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들은 나무 괴물의 동화 속 인물들처럼 ‘당연하게’ 선하거나 악한 인물이 아닌 것이다.

“투명인간은 왜 사람들의 눈에 보일 때 더 외로워질까?” 라는 나무 괴물의 질문은 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 투명인간은 아마도 계속 살아갈 것이고 계속 외로울 것이다. 그러니 답을 맞히는 것보다는 그 질문이 그곳에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어딘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음을 생각하는 편이 낫다.

‘그럼에도 “계속해보겠습니다.”’라고.

 

팝콘 혹은 녹차

최다의 칼럼니스트

- 제주대학교 국문학 석사
- 동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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