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5 13:19 (목)
‘도령모루’ 학살터에 70년만에 방사탑이 세워지다
‘도령모루’ 학살터에 70년만에 방사탑이 세워지다
  • 홍석준 기자
  • 승인 2019.04.06 16: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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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현장위령제 ‘도령마루 해원상생굿’, 잊혀진 원혼들 위무
현기영 선생 “역사에 ‘정의로운 죽음’으로 기록돼야 진정한 진혼”
도령모루 학살터 인근에 세워진 방사탑. 방사탑 안에 놓인 무쇠솥에는 도령모루에서 희생된 66명과 인근 용담2동 묵은터에서 희생된 9명 등 75명의 이름이 모셔졌다. ⓒ 미디어제주
도령모루 학살터 인근에 세워진 방사탑. 방사탑 안에 놓인 무쇠솥에는 도령모루에서 희생된 66명과 인근 용담2동 묵은터에서 희생된 9명 등 75명의 이름이 모셔졌다. ⓒ 미디어제주

[미디어제주 홍석준 기자] 그대가 제주공항에 도착해서 / 신제주로 나가는 길이라면 / 한라산 방향 우측 능선에 / 소나무들이 곧게 허리를 뻗은 작은 숲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그 곳은 예전에 도령마루라 불리던 숲이었으나 / 이제는 섬 사람들에게도 낯선 지명이 되어버렸습니다 / 학살터였던 그 숲에 들어 / 돗자리 위에 조촐한 제수를 진설하고 / 예순 여섯 잔에 소주를 꼭꼭 눌러 넘치도록 다라 올렸지요 / 이 영혼님네들께 술 한 잔 따라드리는데 / 육십여년이 훌쩍 지났다는 유족의 한탄이 / 가슴 깊숙한 곳을 찔러 아프고 부끄러웠습니다 / 지방 대신 내건 검은 현수막 속이 이름들을 / 다시 불러내어 기억하고 싶습니다

71년 전 66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숨진 학살터 ‘도령모루’를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라산의 눈물 – 도령마루’라는 제목의 노래다.

민중가수 최상돈 등 ‘산오락회’가 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이종형 시인이 희생자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불렀다.

이종형 시인은 자신이 쓴 ‘도령마루’ 시를 통해 “그대 다시 제주에 오시는 길이거든 저 숲을 향해 가볍게 목례해주시길. 숲의 이름은 도령마루였다고 기억해주시길”이라고 전했다.

제주민예총의 찾아가는 현장위령제 도령마루 해원상생굿이 6일 오전 10시부터 도령모루 학살터에서 열렸다. ⓒ 미디어제주
제주민예총의 찾아가는 현장위령제 도령마루 해원상생굿이 6일 오전 10시부터 도령모루 학살터에서 열렸다. ⓒ 미디어제주

제주민예총이 해마다 마련하는 찾아가는 현장 위령제 ‘해원 상생굿’이 6일 오전 10시부터 제주국제공항 입구 ‘도령모루’에서 열렸다.

이날 해원상생굿은 제주큰굿보존회 서순실 심방의 시왕맞이와 초감제를 시작으로 시 낭송 및 노래 공연, ‘순이삼촌’과 ‘도령마루의 까마귀’ 저자인 현기영 선생과 강덕환 시인의 도령마루 이야기, 무용가 박연술의 살풀이 춤에 이어 제주큰굿보존회가 억울하게 죽원 원혼들의 저승길을 닦아 영혼을 맞아들인 뒤 이들을 위무하고 저승길로 보내는 ‘질치기’와 ‘서천꽃밭 질치기’를 끝으로 마무리됐다.

특히 이날 해원상생굿은 지난 2013년 무등이왓 해원상생굿 때 방사탑이 세워진 후 6년만에 다시 방사탑이 세워져 각별한 의미를 더했다. 방사탑 안에 놓인 무쇠솥에는 도령모루에서 숨진 희생자들 넋을 달래기 위해 66명의 도령모루 희생자들과 인근 용담2동 ‘묵은터’에서 숨진 9명을 포함해 모두 75명이 이름이 함께 모셔졌다.

제주민예총 강정효 이사장은 “제주시 도심 한가운데에서 열린 해원 상생굿 때는 방사탑을 세울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면서 “이번에 ‘도령모루’라는 지명을 되찾으면서 방사탑까지 세울 수 있게 돼 더욱 뜻깊은 해원 상생굿이 됐다”고 말했다.

전날까지 작업이 마무리돼 세워진 방사탑 앞에는 강정마을에 있는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신부가 서각으로 ‘학살의 기억은 묻히고 이름마저 빼앗긴 도령마루’라고 새긴 입간판이 세워졌다.

1979년 소설 ‘도령마루의 까마귀’를 발표한 소설가 현기영 선생도 소설을 통해 도령모루에서의 학살을 알린 뒤 40년만에 이 곳에서 진혼굿이 열린 데 대해 가결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지난 70여년 동안 돌아가신 분들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가혹한 시절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트라우마를 겪어온 분들에게는 너무나 먼, 너무나 지체된 세월이었다”면서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고 더 늦기 전에 4.3의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특히 그는 “제주의 도처에 학살터와 불타버린 집터가 있다”면서 “수난의 땅, 수난을 겪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진혼되려면 그들이 뒤집어쓴 붉으죽죽한 누명을 벗기고 대한민국 역사에 그들의 죽음이 정의로운 죽음이었다고 기록되는 날 비로소 3만명의 원혼이 진혼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희생자 명단 중 ‘아무개의 자’, ‘아무개의 딸’이라고 적혀있는 부분에 주목하기도 했다.

그는 “이름이 없다는 건 갓난아기라는 거다. 천인공노할 일”이라며 “그런 세월이 흐르고 이런 비극적은 장소를 잊으라고 하는 것인지 자본주의 첨병인 재벌의 요구를 들어주고 해태 조형물이 2개씩이나 세워진 채로 40여년 동안 방치돼 왔다”면서 “‘도령마루’라는 좋은 이름이 있는데 해태동산이 돼버렸다. 이건 4.3의 수난과도 연결돼 있다. 죽음의 흔적까지도 잊혀지는 세월을 지내온 것”이라고 통탄했다.

고희범 제주시장이 '도령모루'라는 지명 되찾기에 나서게 된 이유가 현기영 선생의 제안에 따른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 미디어제주
고희범 제주시장이 '도령모루'라는 지명 되찾기에 나서게 된 이유가 현기영 선생의 제안에 따른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 미디어제주

현 선생의 얘기가 이어지던 중 행사장을 찾은 고희범 제주시장도 “4.3을 기억한다는 건 장소도 대단히 중요하다. 여기가 학살터인데 학살터로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며 학살터로 기억하려면 ‘도령모루’라는 이름을 찾아야 한다는 현기영 선생의 ‘지령’(?)을 받아 이름을 바로잡는 일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고 시장은 또 “이 곳에 길을 새로 빼면서 도로명을 지을 때 인근의 노형, 연동, 용담 지역 주민들이 ‘도령로’라는 이름을 붙였다”면서 “주민들에게는 ‘도령모루’가 있었는데 우리들한테서만 잊혀졌다는 게 부끄러웠다. 71주년 4.3에 제주시가 뜻깊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현기영 선생 덕분”이라고 현 선생에게 모든 공을 돌렸다.

현 선생은 “한 사람의 억울한 원혼도 정성껏 진혼을 잘하지 않으면 사나운 혼이 될 수 있다”면서 “당시 제주도 젊은이들의 절반이 죽었다. 그 억울한 원혼을 진혼하려면 배·보상도 이뤄져야 하고 역사에 제대로 올려야 하며, 그들의 희생을 망각해선 안된다”고 4.3에 대한 기억을 해마다 되새겨야 하는 이유를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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