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00:04 (금)
“용기 내 말합니다, 많이 아팠노라고. 지금도 그러하다고”
“용기 내 말합니다, 많이 아팠노라고. 지금도 그러하다고”
  • 김은애 기자
  • 승인 2019.03.29 1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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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4·3증언본풀이마당: 김낭규 어르신 사연
“제주4·3, 나는 하루라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미디어제주 김은애 기자]

“사람의 고통 앞에서, 중립은 없다” / 프란치스코 교황

세월호 침몰 참사 이후, 노란 리본은 인제 그만 떼는 것이 좋지 않겠나 말했던 이들에게 하는 말이다.

제주4·3도 그렇다. 타인이 겪은 고통의 크기를 감히 그 누가 재단할 수 있을까. “이 정도면 됐다”라고 어느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너무나 아팠지만 ‘아프다’고 할 수 없었던 제주4·3 희생자. 고통을 말하면 목숨을 앗아버리는 국가의 폭력으로, 죄인처럼 숨어 살았던 그의 기억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바로 18번째 제주4·3증언본풀이마당을 통해서다. 

증인의 아픔을 보다 가슴으로 공감할 수 있도록, 증언은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한다. [편집자주]

 

제18회 4·3증언본풀이마당에서 증언 중인 김낭규 어르신.

"가만히 생각해도 아버지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그렇게 죽은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김낭규 어르신 사연 (여, 1940년생)

나는 조천 신촌에 살았습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제주와 청진을 오가는 운반선 세 척을 운영했는데요. 조천중학교를 짓기 위해 배를 다 팔았습니다. 교육 열기가 굉장히 높으신 분이었죠. 그래서 신촌, 조천에는 지식인이 많았습니다.

제가 어릴 적, 신촌에는 국민학교가 없었어요. 차도 없던 시절에 신촌 학생은 다 조천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 당시 우리 아버지는 함덕국민학교 교사였는데, 신촌국민학교가 생기니까 다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후에 아버지는 신촌국민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습니다. 존함은 김대진 입니다. 동네 사람은 모두 인정하는 훌륭한 어른이었죠. 나무를 지고 가던 할망이 있으면, 달려가 대신 짊어지는 그런 아버지였어요.

아버지는 퇴근 후에 집에 오면 태극기를 만들곤 했어요. 신촌 사람들은 이때 태극기 그리는 법을 알았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태극기를 만든 이유는 ‘신탁통지 절대 반대’를 마을 사람들과 함께 외치기 위해서였어요. 조국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대한민국이 독립했던 날, 사람들이 ‘우리나라 독립 만세’라고 외쳤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됩니다. 우리 삼남매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고 있었는데, 대창을 든 사람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데리고 갔어요. 그러고 10분도 안 돼서 총소리가 막 났습니다. 그렇게 두 분은 돌아가셨죠. 제가 열 살도 안 되었을 때입니다.(1949년 1월 5일 총살)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5일 후에 어머니도 수용소에서 총살당했습니다. 경찰이 조천지서 앞에서 어머니를 총으로 한번 쏘고, 안 죽으면 또 쏘고. 그렇게 장난으로 잔인하게 죽였다고 합니다. 어머니 시신을 본 사람이 말하기를, 손톱이 하나도 없었다고 하더군요. 우리 어머니 끌려갈 때 막 울면서 “우리 애기들 잘 키워줍서, 잘 키워줍서”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 나이 스물여섯 살이었습니다.

할머니 집 앞에 비스듬한 오름이 하나 있는데요, 할머니를 처음 묻고 그다음 어머니를 묻었습니다. 맨날 그 산소를 보면서 울었는데, 이때 지은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온달 같은 우리 어머니.

반달 같은 날 두고 저승길이 얼마나 좋아서 가서 지금까지 아니 돌아오고, 영영 안 돌아오나.

산이 높아 못 오시면 비행기 타고. 비행기가 물이 깊어 못 오시면 약수배라도 타고 오세요.”

이 노래를 시작하면 눈물이 잘잘잘 흐릅니다. 지금도 농장에 가서 일할 때, 항상 이 노래만 시작하면 눈물이 흐릅니다. 자꾸 울어서 우리 남편에게 미안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은 1949년 음력 5월 13일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총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나중에 동네 사람 얘기를 들어보니, 우리 아버지의 주검을 가지고 신촌을 일주하며 다 관람시켰다고 하더라고요. 죽은 사람들 전시회를 한다고. 관덕정 일대에서도 관람을 시켰대요. 그 말을 들으니 가슴이 미어지는데, 아버지를 보러 가면 우리도 다 죽여버릴까 봐 가서 보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지금 4·3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래 4·3공원에 희생자 위패가 있었는데, 갑자기 4·3사업소 직원이 와서 아버지에 대한 4·3희생자 철회를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정말 위패를 떼어버렸어요. 위패를 뗀 것은 2017년 4·3기념식 때 처음 알았는데, 기념식이고 뭐고 정말 아버지 돌아가신 때보다 더 대성통곡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산에 올라가니까 ‘폭도’다, 조금 잘났으니 ‘폭도 대장’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왜 올라간 지도 모르면서요. 그때 사람들은 다 죽어버려서 말해 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우리는 훌륭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니까 남달리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생각하면서. 부모 없이 자라도 절대 남에게 피해 안 끼치려 이제까지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제주4·3의 기억, 나는 하루라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제18회 4·3증언본풀이마당 증언자 및 관계자 단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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