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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라인>과 「유년의 뜰」
<코렐라인>과 「유년의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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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15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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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혹은 녹차 <2>

홧 아유 두잉?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오정희, 유년의 뜰(개정판), 문학과 지성사, 2017, 9.)

그곳. 좁은 셋방에는 책 읽는 오빠의 촌스러운 목소리와 일하러 가기 위해 화장하는 어머니, 그리고 구석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어린 아이가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한의 그 시간은 늘 그랬다’고 아이는 회고한다. 어린 아이는 나름대로 그 권태롭고 단조로운 삶의 풍경을 바라보지만 그 아이들이 목을 빼고 올려다봐야 하는 세계는 그다지 화사하지 않다.

오정희의 단편 「유년의 뜰」(1980)과 헨리 셀릭의 애니메이션 영화 <코렐라인>(2009)은 시대와 장르의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많다. 막 학교에 들어갈 무렵의 어린 여자아이가 주인공이며 그 아이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점, 그리고 그 이야기가 천진하거나 행복하지 않다는 점. 그 세 가지가 이 글에서 다룰 ‘유년’에 찍힌 방점이다.

「유년의 뜰」의 주인공 노랑눈이는 뚱보, 멍청이 등으로 호명될 뿐 처음부터 끝까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교장 선생님이 그를 호출할 때조차 노랑눈이는 ‘김정님이의 동생’으로 불린다. 이름 없는 아이는 전인적인 인격체가 아니라 단편적인 특징과 타인의 시선으로 타자화된 존재이다. 노랑눈이가 관심을 가지는 셋집 주인 목수의 딸 ‘부네’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날 도망쳤다가 목수 손에 잡혀 와서 골방에 갇혔다는 부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부네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며, 단지 부네가 ‘아버지를 거역했으므로’ ‘무슨 나쁜 짓을 했을 것이므로’ 그런 일이 일어났으리라는 소문만이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린다. 노랑눈이는 그런 부네를 연민하고 종내는 자신의 삶도 부네의 비참한 말로와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노랑눈이는 영특하지도 예쁘지도 않고 다섯 아이들 중에서도 유난하게 식탐을 부린다. 아버지도 없는 피난민 가족에게 그런 노랑눈이는 애물단지일 뿐이다. 일에 지쳐 돌아온 어머니는 노랑눈이가 자기 몫의 밥까지 훔쳐 먹은 것을 보고 저 아이는 내가 낳은 것 같지가 않다고 혼잣말을 한다. 노랑눈이는 배를 채우는 것 외에 그 권태롭고 불안한 시간을 견디는 법을 알지 못한다.

낡은 아파트에 처음 이사를 와서 만난 <코렐라인>의 이웃들이 주인공을 ‘캐롤라인’이라고 잘못 부르는 것은 ‘노랑눈이’라는 명명과 마찬가지로 아이를 둘러싼 세계의 무관심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코렐라인의 우울함은 예쁜 장갑 하나 사지 못하고 역겨운 음식만 깨작거려야 하는 불행 자체가 아니라 아무도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주지 않는다는 소외감에서 온다. 부모를 포함해 아파트의 주민들이 전부 소외된 삶을 살고 있음을 감안하면 사람들의 그러한 무관심은 가난과 불행으로 여유를 잃은 삶에서 온다고 볼 수도 있다. 노랑눈이가 식탐으로 자신이 여기 있음을 증명하듯이 코렐라인은 이름이 잘못 불릴 때마다 ‘캐롤라인’이 아니라 ‘코렐라인’이라고 짜증을 부린다. 처음으로 코렐라인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부모 외의) 등장인물은 비밀의 문 반대편의 환상 세계에서 만난 아름답고 친절한 ‘가짜 엄마’이다. (영화에서는 ‘다른 엄마Other mother’로 불린다.) 그 호명은 부모가 방치했던 상처에 발라준 약이나 대신 챙겨준 식사와 마찬가지로 코렐라인의 신뢰와 환심을 얻는 주요한 장치가 된다.

자신의 힘으로 불행한 삶을 어찌할 방법이 없는 아이들은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기적을 바라게 된다. 「유년의 뜰」에서 그것은 아버지의 귀환이고, <코렐라인>에서는 비밀의 문 반대편의 가짜 엄마이다. 노랑눈이의 가족들은 아버지만 있으면 상황이 뭐라도 나아질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가장을 자처하는 오빠는 폭력을 휘두르고, 아버지가 가둔 골방에서 부네는 요절한다. 노랑눈이는 자신의 기억마저 의심하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정말로 다정한 사람이었던가, 아버지가 돌아온다고 과연 모든 게 나아질까. 코렐라인 또한 언제나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주는 가짜 엄마의 다정함이 함정에 지나지 않음을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아차린다. 자신을 거역한 부네를 골방에 가두어 죽인 목수처럼, ‘가짜 엄마’의 애정 또한 코렐라인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지 않을 때까지만 유효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코렐라인이 더 이상 환상 세계에 머물고 싶지 않다고 하자 그녀는 어둠 속의 골방으로 아이를 던져버린다. 기적에 대한 믿음이 깨어지자 아이들은 악착 같이 자신들이 속해 있는 현실로 돌아오려 애쓴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어머니의 돈을 훔치거나 밤중에 집을 뛰쳐나가는 것이다.

아이들의 관점에서 핍진하게 묘사되는 소설과 영화 속의 삶이 음울한 이유는 현실 자체의 각박함이나 기적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 있지 않다. 노랑눈이가 차라리 아버지가 영영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을 때, 코렐라인이 가짜 엄마의 진실을 마주하고 도망쳤을 때 독자와 관객은 아이들이 마주한 절망을 감각한다. 세상은 애초에 아이들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친절하고 낙천적인 장소가 아니며 아이들도 그들의 믿음과 바람이 무너질 때 절망을 느낀다는 명제를 두 작품은 냉소적인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한편으로 작품들은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여준다. 노랑눈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코렐라인은 사람들을 구하러 나선다. 세상이 가하는 폭력만으로, 그로 인한 절망만으로 아이들이 스스로 성장하지는 않는다. 기적을 포기한 이후에도 노랑눈이는 계속해서 남의 돈과 음식을 훔치지만 소설의 마지막에서 드디어 아버지가 귀환했을 때 아이는 훔쳐 먹은 케이크를 모조리 토해버린다. 자신의 눈높이로 육박해온 삶의 변화를 온몸으로 직감했을 때 노랑눈이는 자신이 구토한 ‘어두운 똥통 속으로 어디선가 한 줄기 햇빛이 스며들고’ ‘무엇인가 빛 속에서 소리치며 일제히 끓어오르’는 것을 본다. 코렐라인은 직접 용기를 내어 가짜 엄마에게 맞서고 나서야 자신에게 무관심하고 괴팍했던 어른들을 관용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은, 아름답거나 행복하진 않을지라도 그들이 살아야 하고 살아가는 곳으로 발을 딛는다.

유년이 순조롭지만은 않으므로 노랑눈이와 코렐라인의 철없는 행동들 또한 그들 나름으로 진지하고 유의미하다. 성장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본 작가와 감독은 그 아이들에게 무관심했던 독자와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캔 유 텔 미 홧 히 이즈 두잉?

    (오정희, 위의 책, 10쪽.)

                                                                                                                                                                                                             

 

팝콘 혹은 녹차

최다의 칼럼니스트

- 제주대학교 국문학 석사
- 동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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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잉 2019-03-21 18:35:26
좋은 글이네요....소개된 책이 문득 읽고 싶어지는 저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