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로 이름 날린 이약동도 오현에 들지 못해
청백리로 이름 날린 이약동도 오현에 들지 못해
  • 김형훈
  • 승인 2019.03.11 1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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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제주 이야기 <11> 귤림서원의 탄생

충암묘를 현재 오현단 위치로 옮기면서 시작돼
이약동은 배향됐다가 채 10년도 되지 않아 탈락
오현단 경내. 맨 왼쪽에 아래 부분이 잘려나간 '충암 김정 선생 적려유허비'가 있다. 미디어제주
오현단 경내. 맨 왼쪽에 아래 부분이 잘려나간 '충암 김정 선생 적려유허비'가 있다. ⓒ미디어제주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오현단의 시초는 충암 김정에서 시작됐다. 제주에 유배를 온 그는 고향도 아닌, 타지에서 서른여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달리했다. 그를 기리는 사당이 만들어진 건 선조 11년(1578)이었다.

충암 선생의 사당은 당시 제주판관으로 있던 조인후가 세웠다고 기록에 전한다. 왜 제주목사가 아닌, 판관이었을까. 그때 목사는 임진이라는 인물이다. 무관이었다. 제주목사로 오는 이들은 문관도 있고, 무관도 있다. 제주도는 병마절도사를 겸해야 했기에 무관도 종종 내려온다. 조선 조정은 제주목사가 무관이면, 판관은 무관으로 파견을 했던 것 같다.

옛 문헌을 들여다보면 조인후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조인후는 정치를 잘했던 모양이다. 제주사람들이 극찬했다고 나온다.

“평소에 탐라 사람이 오면 내가 반드시 불러서 물어보았다. 그 사람들은 조인후가 판관이 된 것을 극구 칭찬하면서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으로 인간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하고, 또 조인후가 한 정치는 구름이 걷히어 푸른 하늘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그 독한 안개 속에 빠진 지가 대체 몇 년이었겠는가. 조정의 귀와 눈이 미치지 못하는 변두리 외딴 섬에서는 벼슬을 받은 자가 제멋대로 하더라도 근심과 고통을 하소연할 곳이 없음을 안다. 참으로 가엽다. 방어가 긴요한 곳에 번번이 문관을 보낼 수는 없더라도 이따금 문관을 보내서 귀와 눈을 통하게 해야 할 것이다.”(선조실록 128권, 선조 33년 8월 11일 신사 4번째 기사)

조인후는 사망 연도가 불명확하다. 1599년에 목숨을 다했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알 수 없다는 기록도 있다. 1599년까지 살았다고 한다면 바로 위 <선조실록>은 조인후 사후 내용이 된다.

<선조실록>은 제주목사로 무관을 파견하면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판관은 문관으로 보내는 게 좋다는 내용이다. 임금이 직접 챙겼다. 그러자 비변사는 판관을 대간 중에서 각별히 가려서 보내겠다고 답을 한다.

당시 임금이던 선조가 문관인 제주판관 사례로 든 인물이 조인후였다. 선조는 제주에서 사람이 올라올 때마다 직접 불러서 제주의 사정을 알아본 모양이다. 그때마다 ‘조인후’라는 인물을 제주사람들이 칭송하자, 선조에게도 조인후는 익숙한 인물로 각인이 돼 있었다. <선조신록>에 조인후의 인품을 거론하는 내용이 더 나온다. 그것도 선조의 입을 통해서이다. 그는 제주사람에겐 ‘천상지인(天上之人)’, 즉 인간계를 벗어난 인물이었다.

그건 그렇고, 판관 조인후가 세웠다는 충암 사당(충암묘라고 함)은 1667년 지금의 오현단 자리로 옮겨진다. 오현단으로 옮기면서 ‘충암묘’는 ‘충암사’로 바뀐다. 단지 위패만 모시던 사당에서 제사를 모시는 사당으로 달라진다. 그걸 추진했던 인물은 제주판관 최진남이었다.

최진남은 1665년 판관으로 부임하면서 충암묘에 참배를 한다. 그런데 충암묘가 너무 궁색했던 모양이다. 옮기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는데, 하루는 유생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르게 할 일이 있어 장수당에 가게 된다. 참고로 장수당은 1660년 김진용이 이괴 제주목사에게 건의를 해서 지금의 오현단 인근에 세워진 상태였다.

최진남은 유생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충암묘를 옮기는 얘기를 한다. 유생들도 환영이었다. 의기투합한 이들은 장수당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최진남의 표현을 옮기자면 너무 평화롭고, 특별한 구역임을 느꼈다. 귤나무들이 우거져 고요하다는 평가도 내린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귤림서원이다. 귤림서원의 첫 배향 인물은 충암 선생이 됐다. 충암묘가 옹색하다고 해서 충암묘는 충암사가 되고, 거기에다 장수당도 있으니 서원의 요건은 갖춘 셈이다. 서원은 배움의 기능도 있지만, 선인들을 제사지내는 교화라는 기능도 있었다.

그렇다면 오현은 언제 완전체가 됐을까. 한 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른다. 제주목사 이인은 자신이 제주에 온 이듬해인 1668년(헌종 9)에 이약동, 김상헌, 정온 선생을 추가로 모시게 된다. 충암묘가 세워진지 90년만이며, 오현이 아닌 4현이 갖춰진다. 하지만 현재 오현 선생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의 이름이 보인다. 이약동이다.

왜 이약동일까. 오현단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이약동이라는 인물을 알고 지나가는 것도 매우 중요할 듯하다.

서원에 배향하는 인물들은 유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대상이다. 서원은 사립학교로서 유학자들을 배출하는 기능도 있지만, 존경할만한 유학자를 모시고 제사를 지니는 기능도 아울러 갖고 있다.

또다시 읊지만 그런데 왜 이약동일까. 이유는 있다. 제주목사 이인은 이약동의 후손이었다. 이약동은 15세기 인물로 이인 목사와는 200년의 간극이 있다. 이인의 6대조 할아버지가 이약동 목사였다.

어쨌건 이약동 목사는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다. 청백리가 된 인물이다. 이약동은 성종 때 제주목사로 내려온다. 그는 2년 10개월간 목사직을 수행하면서 제주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을 많이 했다. 부정부패를 단속하기도 하고, 공물 수량을 줄여서 서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기도 했다.

예전엔 한라산신제를 한라산에서 지냈다. 문제는 한라산에서 산신제를 지내다 보니, 얼어서 죽는 사람이 생겼다. 이약동 목사는 그런 문제가 생기자 지금의 산천단을 만들어, 한라산에서 지내던 산신제를 산천단으로 옮겨서 지내도록 했다.

이약동 목사는 자신이 목사직을 내려놓고 떠날 때 사용한 물건을 모두 놔두고 떠났다고 한다. 그가 쓰던 말 채찍은 오랫동안 관덕정에 내걸려 청백리의 상징으로 제주도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약동만 물건을 놔둔 게 아니라 함께 제주를 떠났던 관리들도 그래야 했다.

그런데 이약동 목사가 임기를 끝내고 배를 타고 떠나는데 배가 바다 한가운데 도착했을 때 배가 기우뚱하길래, 혹시 막료 중에 속인 사람은 없는가 찾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몰래 가져온 갑옷이 나타났다. 이약동이 갑옷을 바다에 던지라고 명령하니 바다가 잔잔해졌다고 한다. 그 바다를 투갑연이라고 한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그의 나이가 70일 때 관직에서 물러나겠다니까, 성종이 허락해주지 않은 일화도 있다.

이 정도의 인물이라면 오현이 됐을 법도 한데, 이약동은 오현에서 탈락을 하고 만다. 왜 그랬을까. <조선왕조실록>을 들여다보자. 숙종 1년(1675)의 기록이다. 부호군 이선이라는 인물이 제주를 돌아보고, 제주에 있는 폐단 40가지를 보고하는 내용이 나온다. 내용을 보면 김정 사당이 있었는데, 제주목사 이인이 자신의 조부 이약동을 김정, 김상헌, 정온 삼현 위에 두어 욕되게 하고 있다면서, 이약동 위판을 철거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아울러 양반 지배층과 논의도 없이 이약동 위패를 귤림서원에 앉혔다는 보고였다. 결국 이약동은 오현이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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