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3 18:27 (화)
항일운동 불사르던 강평국, 멀기만 한 독립운동가
항일운동 불사르던 강평국, 멀기만 한 독립운동가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9.02.26 11: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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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참가하고 여성 비밀 결사 활동…젊은 나이 요절
제주여성으로 ‘최초’ 혹은 ‘유일’이라는 수식어 단 인물
신성학원총동문회, 3월 1일 독립운동가 서훈 서명 진행
고(故) 강평국 선생.
고(故) 강평국 선생.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일제에 항거했던 3월 1일. 벌써 100주년이 된다. 수많은 이들이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독립운동가로 추서되지 못한 이들이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제주의 여성 항일운동가인 강평국(1900~1933)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는 ‘최초’ 혹은 ‘유일’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신성여학교 1회 졸업생으로, 제주 첫 여성 교사였다. 그는 일본의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는데, 고등 교육기관에 유학한 첫 제주 여성이기도 했다. 1926년 창립한 도쿄조선여자청년동맹의 초대 집행위원장이었고, 1927년 ‘재일본동경동부 조선노동조합’ 창립총회 때 유일한 여성 임원으로 선출된다. 그는 1928년엔 근우회 지회를 만드는데, 일본에서 만든 첫 지회이기도 했다.

‘첫’을 달고 다니는 그는 100년 전 함성을 기억하는 3.1만세운동에 참여하는 등 항일운동에 몸을 바쳤다.

함께 신성여학교를 나온 최정숙(1902~1977)은 동지였다. 강평국은 1921년 최정숙과 함께 ‘여수원’을 만들어 여성 지위를 끌어올리는 활동도 했다. 여수원은 명신학교와 통합해 남녀공학사립초등학교로 출발하는데, 안타깝게도 제주공립보통학교(현 제주북초)에 흡수된다. 일제의 간섭 때문이었다.

도쿄여자의학전문학원으로 유학을 떠난 건 1926년이다. 일본에서 그는 다양한 활동을 한다. 그가 주도를 해서 근우회 도쿄지부를 만들 당시 회원은 140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역량은 탁월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병마와 싸워야 했다. 일본 유학을 끝내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늑막염으로 고생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의 항일의지는 남달랐다. 하지만 그의 여성 비밀 결사 활동은 일제에 의해 탄로난다. 1933년 여성운동가를 잡으러 혈안이던 일본 경찰에 붙잡힌다. 병과 싸움을 하던 그는 광주로 끌려갔고, 결국 그해 11월 세상과 이별을 고한다.

황사평 천주교성지에 있는 강평국 선생 추도비. 미디어제주
황사평 천주교성지에 있는 강평국 선생 추도비. ⓒ미디어제주

그와 함께 투쟁한 이들은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올린다. 신성여학교를 나온 최정숙, 고수선 등이다. 하지만 강평국은 여전히 추서되지 못하고 있다. 황사평 천주교성지에 세워진 추도비만 말없이 100년 전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이에 따라 신성학원총동문회는 강평국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하는 운동을 펼칠 계획이다. 신성학원총동문회는 오는 3월 1일 관덕정 일대에서 ‘독립의 불꽃, 다시 일어나라’를 주제로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마련한다. 이날 강평국·고수선·최정숙 등 3인의 업적을 기리고, 강평국의 독립운동가 서훈을 촉구하는 서명도 진행할 계획이다. 이날 행사는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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