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3 15:55 (화)
<더 랍스터>와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더 랍스터>와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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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2.13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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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의 단편집이 2014년 초봄에 출간되었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이하 『눈송이』)라는 다소 긴 제목의 연작소설집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 <더 랍스터>는 그 다음 해 늦가을에 개봉했다. 건조한 표정의 남녀가 서로의 텅 빈 윤곽을 안고 있는 시적인 포스터가 인기를 끌었다. 그 두 소설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은희경과 란티모스, 이 둘은 국적도 성별도 다르지만 흔히 말해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해 아주 냉소적이라는 점에서 닮아있다. 『눈송이』와 <더 랍스터>는 일면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더 랍스터>가 사랑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잔인한 우화라면, 『눈송이』는 진저리쳐지게 외롭고 막막한 인생에 빛이 바랜 사랑을 흘려보내는 차가운 독백이다. 그러니 둘 모두 흔히 말하는 ‘사랑’처럼 달콤하거나 감동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눈송이』의 단편들 속 주인공들은 모두 이방인이다. 그들은 난생 처음 도착한 서울의 뒤얽힌 골목 사이에서 길을 잃고(표제작 「눈송이」) 가족과 의절하고 허허벌판의 신도시에 들어오거나(「프랑스어 초급 과정」) 이혼당하고 빈손으로 내몰린 어머니와 함께 타국에서 생존하려 발버둥 친다(「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그들은 모두 한때 누군가를 사랑했거나 현재도 사랑을 바라는 무구함이 있지만, 그 과정에는 아무런 따뜻한 낭만도 없다.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에는 외로운 삶에 대한 냉소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짧은 우화가 첫머리에 소개된다.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 일부를 인용한 이 장면은 외로운 소년과 배고픈 고양이에 대한 것이다. 장작더미 속의 은신처로 기어들어가 울던 소년은 이윽고 절망에 지쳐 장작더미를 무너뜨려 자살하기로 결심하는데, 문득 주머니 속의 과자가 기억나서 일단 그것을 먹는다. 그리고 장작에 손을 뻗는 순간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소년의 눈물 젖은 뺨을 핥아준다. 소년은 그 온기에 위로받아 살아남지만 고양이가 핥는 것이 눈물이 아닌 과자 부스러기였음을 알고 있다. 조건 없는 사랑의 뒤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깊이 생각하지 말지어다.

이 우화를 종종 떠올리는 또 하나의 소년,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의 주인공은 여기서 “허기와 절망”, 즉 행복의 바깥에서 서로를 만난 감정들을 읽어낸다. 우화 속의 울보 소년은 사실 이 소년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다. 그녀는 사업이 부도난 남편에게서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 취급을 받으며 버려지고, 어린 아들과 함께 타국에서 어떻게든 새 삶을 시작해보기로 한다. 그러나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길눈도 어두운 그녀는 언제나 끔찍하게 길을 헤매며 우왕좌왕할 뿐이다. 끝내는 아들도 어머니의 위축되고 예민해진 모습에 질려버린다.

믿었던 남편에게도, 하나뿐인 아이에게도 외면당한 어머니는 집착적으로 ‘가라지세일’을 전전하는데(아들은 어머니가 이상해졌다며 그녀를 더욱 멀리한다) 그곳에는 오로지 버려진 물건(추억)과 그것을 버리는 사람들의 후회와 불행이 가득하다. 어머니는 결혼에 실패한 여인의 식탁, 초대받지 못한 처녀의 드레스 따위를 모으며 마찬가지로 불행한 자신의 인생, 그 눈부신 한여름을 견딘다. 서로가 가장 헐벗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에 그 치부를 가릴 한 조각의 누더기도 없이 이루어진,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연대”이다.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 바라는 위로의 온도는 따뜻한가, 차가운가.

<더 랍스터>는 일단 동화적이다. 내용이 따뜻하거나 낭만적이라는 뜻은 아니고 작품 속의 세계에서 ‘짝’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동물이 되어버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공주의 키스를 받지 못해 개구리로 남은 왕자 같은 이야기다. 제목이 랍스터인 것도 주인공인 데이비드(이 이름도 우습다.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David라는 이름은 ‘가장 사랑받는 자’라는 뜻이다)가 아내에게 버림받은 뒤 강제로 ‘짝’을 찾는 호텔에 수용된 직후 만약 동물이 된다면 어떤 동물이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랍스터’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말주변 없고 소심한 중년 남자 데이비드는 어떻게든 사랑을 쥐어짜내 짝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실패하고 호텔에서 도망치고 만다.

커플(정상) 아니면 솔로(비정상)라는 흑백 논리나 이후 데이비드의 행보가 보여주는 마찬가지의 우스꽝스러운 부조리극에서도 눈여겨볼 것들이 많지만, ‘사랑’을 하려고 애쓰는 데이비드 및 조연들의 눈물겨운 우여곡절도 흥미롭다. 아마도 로맨스 영화에서 그 만큼 끔찍하게 어색하고 지루한 데이트는 이제껏 연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호텔 지배인은 예의 랍스터 운운 하는 동물 이야기를 하면서 데이비드에게 공통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조언을 건넨다. 사자와 백조는 짝이 될 수 없고, 악어와 코끼리도 서로 사랑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사자가 두 마리, 백조가 한 마리 있으면 사자와 사자가 커플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데이비드를 비롯해 짝을 찾느라 혈안이 된 호텔 속 인물들은 그 ‘공통점’을 발견하려고 아등바등하지만 그 공통점에서 말미암은 유대감이나 호감은 얼마나 얄팍하고 유치한 것에 불과한가.(사자와 사자 암수 한 쌍이 있다고 한들 그 중 한 마리가 동성을 좋아하는 사자라면 어쩔 것인가? 또는 사냥을 잘하는 암컷에게 반해 수컷이 구애를 했지만 그 암컷이 이빨이 죄다 부러졌다면 어쩔 것인가?)

겨우겨우 ‘코피가 자주 난다’는 공통점을 찾아내어 사람 되기에 성공한 한 커플은 그 외에 맞는 데라곤 한구석도 없다. 그들은 마주앉은 식탁이 장이 꼬이도록 불편하지만 그래도 그게 ‘사랑’이라고 믿으며 허니문을 유지해간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다면 삶은 ‘동물’이 되어야 하는 지옥이니까. ‘사랑’을 ‘품위’나 ‘출세’ 등의 비교적 현실적인 키워드로 바꿔보면 이 동화는 더욱 핍진해진다.

과자 냄새를 맡은 고양이의 혓바닥만도 못한 허무맹랑한 사랑 따위는 포기하고 우리를 위로할 것은 고독과 불행의 연대뿐이라고 차갑고 쓸쓸하게 인정해야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 너덜너덜하게 우려먹어진 사랑이나마 없으면 우리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고 끌어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생각해보건대,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랑’을 믿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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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의 칼럼니스트

- 제주대학교 국문학 석사
- 동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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