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집안에서 세 형제가 과거 급제 ‘영광’
한 집안에서 세 형제가 과거 급제 ‘영광’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9.01.11 16: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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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 ‘청춘예찬’ 일기] <14> 거로마을 삼형제

거로 나주 김씨 삼형제 이야기 조정에까지 알려져
둘째 김영업은 제주판관으로 일하다가 순직하기도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교장 출신이신 양영선 선생님이 청춘예찬 동아리 학생들을 만나 좋은 이야기를 해준 기억이 있다. 양영선 선생님은 화북에서도 ‘거로’라고 불리는 마을 출신이다. 그런데 화북 이야기를 하면서 바닷가 마을 이야기만 주로 한 것 같다. 사실 거로마을도 굉장히 중요한데 말이다.

거로마을은 역사로 따진다면 아주 오래된 마을이다. 그런데 제주4·3 때 불타면서 소중한 기억들이 사라졌다. 오늘은 거로마을의 나주김씨 삼형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삼형제가 동시에 과거에 급제하는 기록을 만들었다. 순조 14년(1814)이었다. 문과초시에 도전했던 나주김씨 김영집·영업·영락 삼형제가 주인공이다. 김영집은 당시 나이 40이었고, 영업은 31세, 영락은 26세였다. 지금으로 말한다면 고시 1차에 형제가 나란히 합격을 했으니, 보통 일이 아니다. 조정에서는 이들 삼형제를 대단하다며 칭송했다. 하지만 한명은 탈락시키도록 했다. 한 집안에서 3명이 나오는 기회를 주진 않았다. 결국 가장 어렸던 김영락의 합격이 취소된다.

나주 김씨 집안은 삼형제만 있던 건 아니었다. 영락의 밑으로도 남동생 둘이 더 있었다. 김영락은 어쩔 수 없이 탈락하긴 했으나 이후 제주향교 도훈장을 맡았다고 한다.

삼형제와 관련된 꿈 이야기도 있다. 삼형제가 시험에 한꺼번에 붙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삼형제 아버지는 김익겸이라는 인물이다. 삼형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김익겸이 묏자리를 보러 지관과 함께 돌아다녔다. 하루는 맹호모루라는 동산에서 쉬다가 잠깐 잠이 들고 말았다. 그때 징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춤을 추며 놀길래 그곳을 묏자리로 삼았다. 그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무당이 나올 자리라고 했는데, 장례가 끝난 15년 후에 삼형제가 모두 급제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김영락의 바로 위 형이었던 김영업은 과거급제 이후에 성균관에 재직을 하다가 고향에 내려온다. 제주판관으로 내려왔을 때는 순조 34년(1834)으로 그의 나이 51세였다. 그는 관아에서 쓰는 물건을 관리하는 총물당 등을 고쳐 짓게 하고, 자신의 급여를 내 군량미를 보관하는 사창을 짓도록 했다.

총물당 공사를 시작한 건 김영업이 제주판관으로 내려온 이듬해다. 그해 2월에 공사에 들어갔고, 5월에 끝이 났다고 한다. 3개월에 걸친 작업이었다. 그런데 김영업은 총물당 건축작업이 끝난지 한달 후인 6월 13일 자신의 집무실에서 숨을 거둔다. 과로 때문이었을까.

김영업은 제주출신으로 고향에 내려와서 열심히 일을 했으나 안타깝게 목숨을 잃게 됐다. 그가 순직하자 그의 덕을 기리는 선정비가 제주목관아에 세워졌고, 목관아가 허물어지면서 김영업 선정비는 거로마을 후손들에 의해 마을로 옮겨진다. 그 선정비는 다시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에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삼형제 가운데 시험에 합격하고도 나중에 불합격 처리된 김영락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는 이원조 제주목사가 쓴 <탐라록>에 자주 등장한다. 김영락은 관리는 아니었고, 제주향교 훈장이었지만 많은 관리들이 그를 찾아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문장 실력도 뛰어났고, 가문 역시 대단했기 때문이겠지.

이원조 목사가 1841년 5월에 남긴 기록을 보면 김영락이 목사 집무실로 찾아오니, 술잔을 기울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원조 목사는 김영락과 한라산에 함께 오르기도 했다. 추분 다음날 한라산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백록담까지 올랐고, 백록담에서 술잔도 기울였다고 한다. 한라산에서 2박 3일을 보냈다는 기록을 이원조 목사가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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