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북 서쪽 거리에 13개 비석 줄줄이 세워져
울릉도를 지킨 이규원 목사가 가장 유명 인물
구재룡은 목사에서 파직당했어도 선정비 혜택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비석을 세우는 이유는 뭘까. 다름 아닌 ‘기록’을 남기려는 이유에서다. 기록은 분명 중요하다. 세상에 태어난 이유 역시 그렇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 그런 이유 말이다.
죽은 이를 위해 비석을 세워주는 일은 그 사람에 대한 최후의 기록물이다. 그렇다고 죽게 되었을 때만 비를 세워주진 않는다. 살아있을 때 비석을 세워주기도 한다. 화북동에 그런 비석만 모아둔 거리가 있다. 우린 흔히 ‘비석거리’라고 부른다. 오현고에서 바닷가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비석거리를 만나게 된다.
대겐 마을회관에 비석이 줄줄이 놓인 걸 볼 수 있다. 마을회관에 있는 비석들은 해방 이후에 세워진 게 상당수를 차지한다. 그와 달리 비석거리에 있는 비석은 조선시대 것이기에 역사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화북 비석거리에 있는 비는 모두 13개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비문이 완전 녹아내려 보이질 않는다. 얼마전 설명했던 김정 제주목사 비석처럼. 비문이 보이지 않는 비석을 제외하면 모두 12개. 이 가운데 10개는 제주목사 선정비이며, 하나는 제주판관, 나머지 하나는 조방장 비석이다. 조방장은 화북진성을 지키는 대장이 된다.
12개 비석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을 꼽으라면 이규원을 택하고 싶다. 그런데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 같다. 이규원? 이렇게 말이다. 그렇구나. 조선시대 이규원을 알 아이들이 대체 몇이나 될까. 전국적으로 물어봐도 다들 모른다고 할테다. 그럼 이 사람은 어때? 안용복이라는 인물. 이 정도는 알지 않을까. 조선중기 울릉도를 지킨 인물이 바로 안용복 아니던가. 조선중기에 안용복이 있다면, 조선후기엔 이규원이 있다.
이규원이 있을 때 조선은 어땠을까. 고종 때여서 조선은 각종 외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고종인 이규원에게 울릉도감찰사라는 특별한 임무를 줬다. 그런 직을 수행한 건 조선을 통틀어 이규원이 유일했다. 고종이 그에게 울릉도감찰사라는 임무를 준 이유는 있었다. 19세기 후반에 일본인들이 울릉도에서 잦은 불법 점거를 하자, 울릉도 문제 해결을 위해 고종은 그를 찜했다.
일은 잘 해결됐다. 고종은 울릉도 문제를 해결한 이규원을 불러들였고, 그 다음에 맡긴 일은 제주목사였다. 그때가 1891년이다.
이규원은 제주목사로 내려와서 제주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을 중앙에 호소하기도 했다. 추자도에서는 쌀이 나지 않는데, 세금을 쌀로 내게 하니까 섬의 백성을 돌보는 뜻에 어긋난다며 상소를 올렸다. 제주에 기근이 발생하자 호남에서 곡식 1000석을 긴급 수혈받게 하기도 했다.
이규원 목사와 관련된 유물은 현재 국립제주박물관에 잘 보관돼 있다. 이규원 후손들이 지난 2002년과 2002년에 관련 유물을 기증했다. 이규원 관련 유물은 호패를 비롯해 모두 351점이다. 이들 유물 가운데 울릉도에서 기록을 담은 <울릉도검찰일기>도 포함돼 있다.
이규원은 일을 잘했던 인물로 선정비를 받을만했다. 그런데 다들 그런 건 아니다. 제주목사로 구재룡이라는 인물이 있다. 화북 비석거리에 그의 선정비가 있다. 그는 1839년 제주목사로 부임해서 1841년 파직된다. 대체 어떻게 했길래 파직됐을까. 1840년 마지막 날이었다. 엄청 추웠을텐데, 영국 배 2척이 가파도에 침입해서 소를 훔쳐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구재룡 목사는 그 사건에 잘 대처를 하지 못했고, 때문에 제주목사 직에서 물러난다. 그런데 왜 그런 인물에게 선정비를 줬을까. 확실하진 않지만 그의 동생인 구재인이 제주판관으로 오게 된다. 구재인이 형을 위해서 만든 건 아니었을까.
선정비가 세워졌다고 해서 다들 일을 잘한 건 결코 아니다. 더구나 비를 세우는 데는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 비석을 세울 돈을 마을에 할당하기도 하고, 비석 재료에 쓰일 돌을 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선정비를 세우려다가 백성들만 힘들게 된다. 어쩌면 화북 비석거리엔 그런 사연도 담겨 있다는 점을 알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