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8 10:57 (목)
마음 약해서
마음 약해서
  • 홍기확
  • 승인 2019.01.02 13: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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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조각모음]<9>

마음이 약하다. 마음이 악하지 않다.

거절에 약하다. 거절에 익숙지 않다.

약한 마음을 강하게 다듬는 법을 알지만 실행을 하지 못한다.

거절하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매몰차게 끊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1분간 싫은 소리를 하면, 1시간동안 속상하다.

누군가의 부탁을 한번 거절하면, 열 번 미안해한다.

싫은 소리를 하면 내가 아닌 것 같고, 거절하면 내가 왜 이러나 싶다.

사람 만나는 게 두렵다. 얘기 나누는 건 더 무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80명인 단체의 사무국장, 50명인 문학회의 사무국장, 밴드의 리더를 맡고 있다. 내가 왜 이러나 싶다.

휴대폰은 전화를 걸고 받거나 문자를 보내는 데에 주로 쓴다. 그 흔한 카톡을 포함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어떠한 SNS도 잘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확인한 휴대폰의 전화번호부는 1,482명이다. 정치인도 아닌데!

도대체 나란 존재의 본질은 무엇일까? 어느 것이 내 본모습일까?

나는 이것을 페르소나(persona)라는 개념으로 극복한다.

페르소나(persona)의 사전적 정의는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치는, 특히 그의 실제 성격과는 다른, 한 개인의) 모습’이다.

아들에게는 엄한 아빠, 아내에게는 비교적(?) 다정한 남편, 부모에게는 귀여운 아들, 회사에서는 스마트한 팀장, 단체의 사무국장으로는 회장을 보좌하는 그림자 같은 참모, 밴드에서는 카리스마 있는 리더.

이 모든 것들이 나의 ‘모습(persona)’이다. 하지만 앞의 사전적 정의의 괄호처럼 이것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

나의 본질은 마음 약하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구석지거나 폐쇄적인 장소를 선호하고(잘 때도 벽을 보며 잔다), 새로운 장소와 새로운 사람에 대한 공포심이 있는 나약한 존재다.

하지만 반전은 있다.

나의 본질조차도 수많은 ‘모습(persona)’ 중 하나에 불과하다.

나는 이것을 ‘알몸’이라고 부른다.

이외의 다른 모습들은 ‘옷’과 같다.

아들에게 엄한 아빠는 겨울옷, 아내에게 비교적(?) 다정한 남편은 여름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부모에게 귀여운 아들은 반바지를, 회사에서 스마트한 팀장은 양복을 입고 있는 것이다. 단체의 사무국장으로 회장을 보좌하는 그림자 같은 참모일 때는 제복을, 밴드에서 카리스마 있는 리더로서는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다.

알몸만 보여주면 창피하다. 같은 옷을 며칠 입으면 냄새난다.

알몸에서 얼굴, 손 같이 필요한 부위만 보여주면 된다.

옷은 이 옷 저 옷 갈아입으면 되고, 세상의 티끌은 씻어 내린다.

이것이 나랑 맞지 않는 세상에, 나를 길들이지 못했던 사회화에 내가 대응하는 사고방식이다.

오늘도 마음이 약해 거절하지 못한 약속에 간다.

물론 모임의 주인공은 나다. 원인은 발표자료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마음이 약하고 거절하지 못하니 들어주었는데, 불행히도 1등을 한 연유로 한턱을 내겠다는 것이다.

아침부터 겁을 잔뜩 먹었다. 2~3번 만나본 사람이지만 여간해서 사람만나는 게 즐거워지지 않는다. 만나면 신나게 얘기하며 좌중을 이끌 걸 알면서도, 아무리 마음을 여러 번 다잡아도 불편하다. 익숙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점이 내 알몸이고 내 본모습이다.

내년에는 또 어떤 ‘모습’의 옷을 입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헌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살지도 모르겠다.

옷장에 옷이 가득한 것보다는, 적당히 배치된 것이 좋다.

하지만 소비의 시대. 세상은 나에게 자꾸만 새 옷을 사라고 한다.

그나마 어울리는 옷을 입었으면 좋겠다.

여름에 겨울옷을 입지 않고,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안 입으면 좋겠다. 양말을 짝짝이로 신거나, 커다란 신발을 신고 덜컹거리지 않으면 좋겠다.

마음 약한 것은 어쩔 수 없고, 옷을 갈아입는 건 귀찮을 뿐이다.

다만 불편한 건 못 참아.

 




 

일상의 조각모음

홍기확 칼럼니스트

2004~2010 : (주)빙그레, 파주시, 고양시, 국방부 근무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박물관 및 미술관 준학예사, 관광통역안내사(영어)
현 서귀포시 감귤박물관운영담당
현 서귀포시 공무원노동조합 사무국장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지식과감성#
         『느리게 걷는 사람』, 2016년, 지식과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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