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림서원에 배향하던 인물들을 모시다
귤림서원에 배향하던 인물들을 모시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8.12.24 10: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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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제주 이야기 <10> 오현단

1971년 제주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1호로 지정
기묘사화로 제주에 유배 온 충암 김정이 시초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오현단. 제주사람들이라면 오현단이라는 이름에 익숙하다. 이유는 있다. 오현고등학교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현이 누구인지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오현고를 나온 이들이야 오현을 줄줄 욉지만, 나머지 이들은 다섯 현인이 누구인지는 관심 밖이다. 그래도 오현을 알아두는 게 나쁘진 않다.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해서이다. 제주의 오현은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을 일컫는다.

오현단은 제주성 남쪽에 위치해 있다. 지난 1971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됐다. 현재 오현단이 있는 곳은 예전 유생들을 가르치던 귤림서원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렸고, 귤림서원도 1871년(고종 8) 사라진다. 귤림서원이 사라지면서 문제가 생긴다. 서원에서 오현을 모셔왔는데, 그럴 수 없게 됐다. 오현단이 만들어진 건 그런 배경을 깔고 있다.

오현단은 1892년 현재의 자리에 만들어진다. 서원이 철폐된지 21년만이다. 제주 유생들의 건의로 오현단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조두석이라고 불리는 5개의 자그마한 제단석은 그 이후로 현재의 땅을 지키고 있다.

오현단의 시작을 말하라면, 이 사람을 빼놓아서는 안된다. 바로 충암 김정이다. 그는 기묘사화에 연루돼 제주에 유배를 왔다가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그렇게 죽은 김정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우는데, 그게 바로 제주 오현의 시초가 된다.

여기서 기묘사화를 잠시 언급하고 가야겠다. 기묘사화는 조선 때 4대 사화의 하나이다. 중종 때 개혁의 선봉에 섰던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세력들이 기묘사화로 대거 숙청된다. 나뭇잎에 글자를 써서 조광조가 모반을 했다는 이야기도 기묘사화와 연관이 돼 있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서 벌레가 갉아먹었다는 얘기인데, ‘주초위왕’의 ‘주초(走肖)’를 합치면 조광조의 성인 조(趙)가 된다. 그래서 조광조 일당을 숙청했다고 하는데, 사실 지어낸 이야기다.

그건 그렇고, 충암은 중종 15년(1520)에 제주로 유배를 오게 된다. 아주 젊은 나이였다. 우리나라 나이로 36세였다. 충암은 매우 똑똑한 인물이었다. 10살도 되기 전에 사서를 익혔다고 한다. 22세엔 과거시험에서 1등을 했다.

충암 김정의 백비. 뒤로 충암 묘가 보인다. 미디어제주
충암 김정의 백비. 뒤로 충암 묘가 보인다. ⓒ미디어제주

충암이 제주에 유배를 왔을 당시 제주는 어땠을까. 그리 잘 살던 때는 아니었다. 충암은 제주에 와서 <제주풍토록>을 남긴다. 짧은 기간이지만 제주에 대한 알찬 정보를 담은 기록물이다. 충암은 또한 우물을 만들어서 제주 사람들이 마시게 했다고도 한다. ‘판서물’ 혹은 ‘판시물’이라고 불리는 우물터는 오현단 북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동문시장과 만나는 지점에 표석이 세워져 있다. 표석엔 ‘판서정’이라고 나온다.

제주에 온지 이듬해에 사약을 받고 죽게 된 충암의 유해는 어떻게 됐을까. 죽은지 1년 뒤에 고향으로 모셔왔다고 한다. 다만 비문은 쓰질 못했다. 당시는 복권된 상태가 아니기에 백비로 남겨뒀고, 그 백비는 땅에 묻어뒀다고 한다. 그러다가 대청호가 생기면서 묘를 옮길 때 수백년간 묻혀 있던 백비가 땅에서 나왔다고 한다.

현재 충암 선생 묘소는 대전시문화재 25호로 지정돼 있다. 거기가면 백비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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