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은 대학이 중심이 되어 연구를 진행해야”
“제주4·3은 대학이 중심이 되어 연구를 진행해야”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8.11.07 14: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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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 평화연구소, 7일 4·3 작은 모임 가져
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 초청해 강연 자리 마련
“동학처럼 농민전쟁인지에 대한 논쟁이 필요해”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제주4·3은 왜 남로당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할까. 좀 더 생각을 확장하지는 못하는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유는 연구 부족이다.

제주대 평화연구소(소장 조성윤 사회학과 교수)가 7일 제주대 인문대 1호관 복합회의실에서 마련한 작은 세미나 자리에서 이같은 견해가 나왔다. 평화연구소는 지난달부터 4·3을 연구하는 작은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이날은 3번째 만남이다. 제주학연구센터를 이끌고 있는 박찬식 센터장이 이날 초대돼 4·3이 가야 할 연구방향에 대한 생각을 전달했다.

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이 제주4.3은 제주도민들이 중심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미디어제주
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이 제주4.3은 제주도민들이 중심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미디어제주

박찬식 센터장은 제주4·3 진상보고서를 만드는 과정에도 참여하는 등 4·3을 직접 연구해왔고, 그 끈을 지금도 놓지 않고 있다. 올해 그는 10년만에 ≪4·3과 제주역사≫ 개정 증보판을 내놓는 등 4·3연구를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시작점 자체는 4·3과 관련된 행동을 취하는 단체활동이 먼저였다. 그러다 본격적인 4·3 연구로 이어가게 됐다.

“1990년에 제주4·3연구소에 들어갔어요. 연구소는 액션 단체였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운동단체에서 4·3을 시작한 겁니다. 어쨌든 제주4·3을 직접 연구하는 전초 작업을 연구소에서 해왔다고 보면 되겠죠.”

그러다가 그는 제주4·3 특별법에 따라 진상보고서 작성을 위한 전문위원으로 발탁된다. 진상보고서를 만들면서는 4·3과 관련된 연구물을 발표하지 못했다고 한다. 진상보고서는 중립적인 위치에 있어야 하기에 자기당파성을 가지면 안된다는 신념에서였다. 그래도 그는 진상보고서를 만들면서 알게 모르게 억울한 이들을 위무하는 작업을 해왔다. 억울하게 수형인으로 살아야 했던 이들을 희생자 위치로 만들어준 일이었다.

“진상보고서를 쓸 때도 군법회의랄까, 행방불명이랄까, 예비검속 등의 문제 등을 맡았어요. 특히 군법회의 수형인인 경우는 4·3희생자로 마지막에야 인정이 됩니다. 위원회측은 수형인들을 희생자로 넣는 것에 대해 신중했어요. 재판을 받고, 실형이라는 형벌은 받은 이들이기 때문에 희생자로 넣는데 심도있는 심의를 거쳐야 한다고 했죠. 그래서 그들 수형인들만 별도로 법적인 검토를 거쳐서 진상보고서에 담게 됩니다. 그런 법적 검토 때문에 수형인들도 희생자로 결정이 됐고요.”

그가 접하게 된 4·3은 처음엔 학술적 접근보다는 자료를 만드는 일이었다. 수형인 명단을 만들고, 행방불명 명단도 그의 손을 거쳤다. 이런 자료는 제주4·3행불인 유족회를 만드는 결정적 근거로도 작용했다. 그에겐 보람이었다.

특히 유해를 발굴할 때는 뭔가 영적인 끌림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제주공항에 억울하게 묻힌 유해발굴은 두차례에 걸쳐 진행이 됐어요. 1, 2차 발굴과정 모두 포클레인을 건드린 곳에서 나옵니다. 1차 때 8000평에 달하는 넓은 땅이 대상인데, 첫 발굴 지점에서 예비검속으로 암매장된 구덩이가 나온 겁니다. 군법회의 사형수에 대한 유해발굴 때도 그랬어요. 두 번 모두 포클레인을 건들면 나오니까 묘한 느낌이 들었어요. 4·3영령들의 혼이 움직인 건은 아닌가라고요.”

전문위원 활동은 그에게 4·3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게 했다. 비록 그 스스로가 4·3의 중심이 아닌 언저리만 돌면서 연구를 했다고 하지만 4·3 연구자들이 많지 않기에 그와 같은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그는 올해 개정 증보판으로 내놓은 ≪4·3과 제주역사≫를 예로 들면서 4·3에 대한 그의 감정을 털어놓았다. 그 감정은 제주도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지도 모른다.

“4·3지도부가 내건 건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반대였어요. ‘탄압에 대한 저항’은 폭압적인 외세에 대한 것입니다. 미군정일 수도 있고, 횡포를 부린 서청일 수도 있고, 응원경찰과 소위 육지에서 내려온 군인도 포함되겠죠. (제주사람들이) 어렵게 제주에 피신을 온 이주민들을 받아들이는 감정과 외부의 힘을 가진 이들이 제주에 와서 횡포를 저지르는 것에 대한 감정은 달랐어요. 탄압에 대한 저항을 내세운 건 실제 4·3을 결행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주도는 1947년 3월 1일 폭력적인 미군정의 탄압으로 희생을 치른데다, 4·3을 앞두고 억울한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는 4·3 발발 전에 발생한 김용철 군 사망사건은 제주사람들에게 폭발적인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고 판단한다. 마치 1987년 민주항쟁을 촉발한 요인이었던 박종철 열사의 죽음과 같았다고 한다.

“4·3이전에 청년들의 죽음으로 제주도는 들끓었어요. 죽기살기로 (미군정 등을 상대로 싸움을) 붙어야 한다는 정서가 확산이 됐던 겁니다.”

제주대 평화연구소가 1일 개최한 4.3관련 작은 모임. 미디어제주
제주대 평화연구소가 1일 개최한 4.3관련 작은 모임. ⓒ미디어제주

그는 4·3은 남로당 제주도당의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는데 초점을 둔다. 남로당이라기보다는 제주도민들이 주체였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동학농민전쟁을 두고 ‘동학’은 외피라는 논쟁이 있습니다. 동학이라는 교단보다는 농민들이 중심이어서 농민전쟁으로 보는 논쟁이 그것이죠. 당시 제주도는 남로당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인가, 인민위원회 중심의 자율성이 중요했느냐는 겁니다. 동학농민전쟁처럼 치열한 논쟁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4·3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길러내는 일도 중요해졌다. 그가 한마디를 건냈다.

“4·3을 중심으로 한 연구는 의외로 적습니다. 보고서가 나오니까 모든 게 매듭지어진 걸로 보지만 그렇지 않아요. 역사연구자들은 사료가 가진 진실이 뭔지를 생각하고 연구를 해야 합니다. 역사 분야에서 도전적인 연구가 나오길 기대합니다. 제주대학교 내에 4·3연구단이라든지, 임시조직을 만들어서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대학이 중심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한편 제주대 평화연구소는 올해 한차례 더 작은 모임을 갖는다. 이런 성과물을 토대로 내년부터는 좀 더 새로운 시각에서 4·3에 대한 접근이 시도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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