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사발을 얹는다고 4.3의 모든 게 담기진 않아”
“거대한 사발을 얹는다고 4.3의 모든 게 담기진 않아”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8.10.04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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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과 건축] <3> 4.3평화공원
거대한 사발을 형상화한 4.3기념관이 멀리 보인다. 미디어제주
거대한 사발을 형상화한 4.3기념관이 멀리 보인다. ⓒ미디어제주

슬픔은 겪어본 이들만 안다. 더구나 곁에 있는 이들과의 이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웃으며 반기던 얼굴이 갑자기 사라진다고 생각을 해보자. 그것도 누군가의 강압적인 힘에 의해 이뤄졌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래서 슬픔은 겪어본 이들이어야 제대로 알게 된다.

슬픔엔 고통이 따른다. 고통이 쌓이고 쌓이면 슬픔이 되기도 하고, 슬픔에 짓눌려 그걸 벗어나지 못해 평생 고통을 안고 가기도 한다. 누구나 겪는 일은 아니지만 70년 전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그 고통과 슬픔을 겪었던 수많은 이들의 얼굴을 주변에서 만나게 된다. 그 이름은 바로 내 가족이다. 누가 알련가, 그 아픔과 슬픔을. 70년 전 그때의 그 아픔과 슬픔을.

글쓴이 가족 이야기가 될테지만 70년 전 세상과 고별한 가족들을 불러본다.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할머니는 아흔 가까이 사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6남 3녀를 두셨다. 글쓴이에겐 큰아버지가 되는, 큰아들은 산군(山軍)이었다. 산군을 다른 말로 하면 폭도가 된다. 따라서 고스란히 가족들에게 피해가 넘어왔다. 그럼에도 글쓴이의 어머니는 그러신다. 우리 가족들 중에 가장 멋지셨다고. 당시 아주 어렸던 어머니는 4·3 전 멋지고 똑똑했던 큰아버지의 모습을 마을에서 실제로 봤다고 했다. 큰아버지는 아직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 희생자에 들지도 못했다. 행방불명된 큰아버지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잠깐 얼굴을 비쳤다고 했다. 이후 어디로 갔는지,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아니면 살아 계신지 모른다.

큰아버지보다 두 살 어린 샛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당하셨다. 큰어머니와 샛어머니도 돌아가셨다. 가장 먼저 희생당하신 분은 샛어머니다. 음력으로 1948년 12월 9일 희생되셨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1947년 1월 7일이 된다. 샛어머니와 샛아버지는 서로의 죽음을 알고 있었을까. 샛어머니가 군경의 총에 맞아 숨진 10일 뒤엔 큰어머니가 희생된다. 보름 뒤인 1949년 2월 4일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다. 입춘이라고 새철이 드는 날인데, 새철을 목숨과 바꾸셨다.

아버지는 6남 3녀 중 다섯째이다. 형 둘을 잃고 형수 둘을 잃었다. 아버지도 잃었다. 우리 가족에겐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살리기 위해 발버둥쳤다는 이야기가 마치 전설처럼 내려온다. 그게 전설인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할아버지는 붙잡혀가는 차량 위에서 “너라도 살라”며 할머니를 발로 차셨다고 한다. 정말 전설이다. 4·3과 관련된 또다른 전설도 있다. 여기에 쓰기는 그런 내용이라 글쓴이의 마음에만 전설로 품고 있으련다.

세월호 얘기만 나오면 갑자기 울컥해질 때가 있다. 그런 울컥함은 세월호만 있던 건 아니다. 글쓴이는 그 전부터 그랬다. 4·3 이야기만 나오면 울컥했다. 지금 글을 쓰면서도 눈엔 눈물이 맺힌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이유를 따져보면 간단하다. 4·3 당시로 소환되기 때문이다. 며느리를 먼저 보내야 했던 심정,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는 아들, 남편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기억들.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한 살이 많았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할머니의 심경을 들여다본다. 우리 나이로 남편은 마흔셋이었고, 큰아들은 스물두 살이었다. 샛것(둘째)은 스물하나였다. 며느리도 살날이 더 많았다. 다들 아들이랑 동갑이었다. 큰며느리는 스물셋, 둘째며느리는 스물하나였다. 꽃다운 나이다. 그래서 4·3이면 벚꽃이 지듯 꽃비가 하염없이 내리는가 보다.

4.3평화공원내 기념관과 벚꽃. 4월 3일을 전후로 벚꽃은 꽃비가 되어 내린다. 미디어제주
4.3평화공원내 기념관과 벚꽃. 4월 3일을 전후로 벚꽃은 꽃비가 되어 내린다. ⓒ미디어제주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살아남으신 할머니는 형무소에 붙잡혀가기도 했고, 아버지의 바로 두 살 위인 형 역시 붙잡혀갔다. 할머니는 젖먹이 막내딸을 형무소에 데리고 가서 젖을 먹이곤 했다. 그 막내딸도 4·3 와중에 죽고 만다. 4·3이 끝나자 아들 중의 막내는 바닷가에서 포탄을 만지다가 비명횡사했다. 아마도 그 포탄은 일제강점기 당시 것일테지만 전쟁이 앗아간 목숨은 우리 가족에겐 너무도 많다. 행방불명을 포함하면 모두 일곱이다. 주변에 일곱사람이 사라진다고 생각해보라. 세상에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도 다 형제들인데 말이다.

이해를 하지 못하는 건 그래서이다. 그 짧은 순간에 일곱을 잃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할머니가 그렇고, 아버지가 그렇다. 아버지는 4·3이 발발하면서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지금도 초등학교 졸업장은 없다. 명예졸업장도 받지 못했다. 아들인 글쓴이 입장에서 그걸 추진해 보려하지만 아버지는 손사래를 치신다. 4·3 때문에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아버지께 제대로 된 졸업장으로 전해주고 싶지만 아버지는 그게 소용없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버지의 선택은 군 입대였다. 이른바 ‘말뚝’을 박았다. 아버지는 군 입대 후에 고교 과정을 마쳤다. 군에 들어가면 색깔은 모두 지워질 줄 알았다. 당연히 그랬으리라 느꼈을테다. 하지만 그건 너무 이상적인 생각이었다. 붉은 색깔이 지워지리라는 기대는 어긋났다. 제주도 사람들이 다 그러지 않았던가. 실제 아버지는 당하셨다. “제주도 사람은 털면 먼지나지 않는 사람 없다”고 다들 그랬다. 아버지를 비롯해 연좌제를 당한 가족이 내 곁에 있다.

4·3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은 제삿날이 무척 강렬하다. 큰아버지는 행방불명이기에 생일에 제를 올렸다. 나머지 가족들은 돌아가신 전날 제를 올렸다. 지금은 부부합제를 해서 제사 수는 줄었다. 전날 치르던 제사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일제로 바뀌었다. 자(子) 시를 전후로 진행되던 제사는 “좀 더 일찍 마쳐야 한다”는 세태를 따라갔다. 제사의 형태가 바뀌면서 4·3 때 돌아가신 아버지 형제들에 대한 기억도 차츰 흐릿해진다. 그래도 잊지 않는 건 있다. 아니, 잊을 수가 없다. 어릴 때 제삿날의 기억은 “듣지 말라”는 어른들의 말씀이다. 특히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말씀하신 그 말은 지금도 또렷하고, 외할머니의 “듣지 말라”며 나가라는 손짓도 기억에 선하다. 글쓴이에게 4·3은 그렇다. 들어서는 안되고, 듣는 순간 뭔가 큰일이 발생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잊혀졌다. 완전 잊혀지는 줄 알았다. 다행인 건 ‘사실’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4·3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 하나 둘 진행되었다. 아버지가 군 생활을 하던 1960년대와 70년대, 그리고 1980년대는 숫자만 다르지 4·3엔 큰 변화가 일지 않는다. 4·3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기 시작한 건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다. 정확히 얘기하면 1987년 6월항쟁 이후였다. 그것도 여의치 않았지만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말의 희망이 비치기 시작했다. 누군가 서막을 여는 일은 어렵지만 그걸 시작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 시작을 알려준 사람들이 고마울 뿐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1970년대부터 활동한 이들이 있었다는 점도 잊은 건 아니다. 1960년대도 물론 있긴 했다. 일찍이 4·3을 위해 활동한 이들 가운데 누구보다 그 고통을 잘 아는 작가가 있다. <순이삼촌>의 현기영이다. 술마시며 취재를 했던 인연이 있다. 그의 작품을 보면 제주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에 떨고 있었는지 쉽게 이해가 간다. 살고 싶던 몸부림의 한 장면을 보자.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 담긴 장면이다.

“우리 식구는 군인 가족, 막내이모는 경찰 가족, 나머지는 샛이모를 포함해서 모두 ‘폭도 가족’이었다. 군인 사위, 경찰 사위, 폭도 사위를 다 함께 가진 외할아버지는 가택 수색에 대비해서, 경찰 사위의 영정을 꽃으로 장식해서 상방마루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상청을 꾸며놓은 한편, 군인 사위에게는 집에 잠깐씩이라도 자주 들르라고 당부했다. 놋단추 여러 개가 두 줄로 줄느런히 달린 검정 제복의 이모부 영정이 지금도 기억나는데, 그 부적이 효과를 보았는지 두어 번 경찰 수색을 받았지만 별 탈 없이 지나갔다.”

살려는 몸부림은 동물적 본능이다. 죽음 앞에 놓여 있다면 정말 죽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어쨌든 줄 하나라도 잡아서 살아보려고 하지 않나.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 담긴 사람들은 그나마 낫다. 우리 가족에 비하면.

올해는 제주4·3 70주년이다. 수많은 행사가 열렸다. 서로 다른 행사처럼 보이지만 똑같은 행사가 여럿 열렸다. 잊혀진 역사를 제주사람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고 제주를 찾은 한해가 되었다. 그 중심점을 얘기하라면 제주4·3평화공원이 있다. 제주시 봉개동에 들어선 4·3평화공원은 기념관도 있고, 위령탑과 각명비도 있고, 위령제단도 있다. 주검을 찾지 못한 행방불명인표석도 있다. 36만㎡에 이르는 넓은 땅 위에 이들이 펼쳐져 있다.

제주4·3평화공원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지금 우리 곁에 와 있다. 차근차근 징검다리를 디디듯 밟아갔으면 좋았을텐데, 속전속결을 하다보니 지금 그 자리에 있게 되었다. 상징조형물 현상 공모로 시작했다가 문제점을 지적받아 다시 조정이 되기도 했다. 그 과정을 복잡하게 설명하고 싶진 않다. 4·3과 관련된 자료에 평화공원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자세하기 담겨 있기 때문이다.

4·3은 숫자가 아니다. 단순한 4월 3일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4월 3일이라는 날짜에만 매달린다. 그 순간 역사는 틀어지고 만다. 4월 3일은 무장대 봉기가 일어난 건 사실이지만 4·3은 4월 3일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4·3은 4월 3일 이전부터 투쟁했던 제주민중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야 한다. 그리고 4월 3일 이후에 발생한 가혹하면서도 무도한 학살을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한다. 그렇게 되면 4·3은 4월 3일이 아니라, 4월 3일을 전후로 한 국제적 사건임을 알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1947년부터 4·3이 완전 종료되는 1954년까지 8년간의 기록을 담은 ‘제주8년전쟁’ 혹은 ‘제주8년항쟁’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그건 그렇고, 제주4·3평화공원은 얼마나 4·3을 잘 담고 있을까. 유족 입장에서, 4·3을 아는 사람 입장에서, 4·3을 전혀 모르는 입장에서 어떤 평가들을 내릴까. 유족이라면 가족을 만나러 늘 가고 싶어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위령제가 열리는 4월 3일 단 하루만 찾는 공간이어서는 안된다. 4·3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여기를 시도 때도 없이 들를만한 공간이어야 한다. 4·3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어떨까. 그들에겐 단 한가지만 전달해주면 된다. 그냥 느낌이다. 제주4·3평화공원이라는 공간에 들어선 순간, 누구의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4·3이구나”라고 느낄 공간이어야 한다. 실제로 그런가. 제주4·3평화공원은 그런 느낌을 주고, 그런 느낌을 받아갈 공간인가. 아쉽게도 그러진 못하다.

외국의 사례를 들어서 그렇지만 피터 아이젠만이 설계한 ‘유대인 학살 추모관’은 석비를 걷는 특별한 경험을 하도록 만든다. 어른 두 배의 높이를 지닌 석비도 있고, 아주 낮은 석비도 있다. 그 석비를 걸으며 유대인을 대상으로 진행됐던 대규모 학살이 어떠한지를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진다.

사실 피터 아이젠만의 유대인 학살 추모관은 베를린 도심지에 있다는 점에서 도심지와 떨어진 제주4·3평화공원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 치더라도 제주4·3평화공원이 주는 느낌은 설명을 해줘야 이해할 듯하다. 우선은 사발형태를 한 엄청난 크기의 기념관이다. 설계를 한 당사자는 사발을 형상화시켜, 그릇에 뭔가를 담아보겠다는 의욕이 앞선 모양이다. 4·3을 전혀 모르는 이들에겐 뭐라고 설명해야 그 그릇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이 될까.

건축물은 굳이 돋보이게 만들 필요가 없다. 언제 제주도민들이 4·3을 돋보이게 해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나. 다만 4·3을 제대로 알게 해달라고 요구를 해왔다.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고, 유족들을 달래달라고 해왔다. 엄청난 규모의 기념관과 위령제단을 갖춘다고 유족의 아픔이 달래지는 건 아니다. 제주4·3평화공원은 오히려 황량한 바람만 부는 그런 곳이었으면 더 좋았을지 모르겠다. 황량한 바람은 제주도의 상징이며, 4·3 당시를 기억하는 바람일 수도 있다. 그런 바람을 맞으며 4·3을 기억하는 공간이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건축은 공간이다. 건축물을 올려놓는다고 건축이 되는 건 아니다. 공간구성이 제대로 맞지 않는다면 건축이라고 부르기는 쑥스러워진다. 제주도는 더더욱 그렇다. 건축가에겐 창조성이 더 요구되는 곳이 제주도이다. 제주4·3평화공원이 있는 곳은 자연이 숨쉬는 지역이다. 자연이 있다면 자연과 맞게 해주는 게 상책이다. 4·3을 그렇게 풀어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창조성 얘기를 꺼낸 김에 20세기 최고 건축가 중 한명인 루이스 칸의 말을 옮겨볼까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건축은 꿈이 없으면 창조적일 수 없고, 행동이 동반되지 않으면 형태가 실현되지 않는 일이다”고. 그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라는 말 아닌가. 건축가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고민에 고민이다. 땅에 대한 고민과 제주에 대한 고민을 더 했더라면 좀 더 자연순응적이면서, 4·3을 느낌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건축 공간이 나왔을텐데 말이다.

4.3평화공원에 있는 조형물. 누군가를 슬프게 쳐다보고 있다. 미디어제주
4.3평화공원에 있는 조형물. 누군가를 슬프게 쳐다보고 있다. ⓒ미디어제주

그런 아쉬움 때문일까. 유족으로서 제주4·3평화공원을 찾을 때면 딱히 마음에 드는 공간이 없다. 단 하나 마음에 꽂히는 게 있는데, 그건 조형물이다. 그 조형물의 이름이 기억나질 않지만 뭇사람들을 응시하는 그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글쓴이의 큰아버지인 듯도, 샛아버지인 듯도 하다. 아니면 울지 못하고 지금까지 4·3을 버텨내고 있는 아버지의 진짜 모습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참 무심했다. 유족이랍시고 우리 가족들만 챙겼다. 큰어머니와 샛어머니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합제를 하면서 세상에서 그들의 기억은 아예 없다. 누구도 챙겨주질 않는다. 아버지에게도 “형수님들은 희생자로 등록돼 잇수꽈?”라고 물어보지도 못했다. 빨리 제주4·3평화공원에 가봐야겠다. 큰어머니는 인동장씨로만 기록돼 있고, 샛어머지는 김영태이다. 그러고 보면 4·3은 여성들에겐 알 수 없는 공포의 무덤이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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