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9 17:38 (금)
“조선시대 관리들에게 기부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조선시대 관리들에게 기부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8.09.25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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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제주 이야기 <8> 김만덕

최악의 임을대기근 발생…제주오던 구휼선 침몰하기도
당시 김만덕은 천금을 내놓아 제주도민 살렸다고 기록
​​​​​​​관리도 기부 동참…영조 때 5천석 내놓은 목사도 있어
제주시 산지천변에 있는 김만덕기념관. 미디어제주
제주시 산지천변에 있는 김만덕기념관. ⓒ미디어제주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나눔을 얘기하라면 이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바로 김만덕이다. 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제주도 뿐아니라 전국적으로도 ‘김만덕’ 세 글자를 내걸면 다들 안다. 위인급, 혹은 영웅 정도의 추앙을 받는다.

김만덕은 곧 나눔이다. 그렇다고 나눔을 실천한 기부왕으로만 비쳐지지 않는다. 경제활동으로 돈을 모았다고 해서 ‘거상’의 칭호도 받고 있다. 그는 번 돈을 내놓아 굶주렸던 제주도민들을 살려냈다고 알려져 있다. 흔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한다. 그걸 실천한 인물로서 김만덕 이름을 꺼내는데 부족함은 없다. 그렇다면 좀 더 실체에 접근해보자.

우린 인물을 바라볼 때 곡해를 해서 바라보기도 하지만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부풀린 상태로 이해하기도 한다. 김만덕은 분명, 나눔을 실천하기는 했으나 실제보다 부풀려진 면이 없지 않다. 그렇다고 존경하지 못할 인물이라는 건 아니다. 분명히 말하건데 존경받아야 할 인물이고, 현재를 사는 우리가 존경을 해야 할 인물이다.

과거로 가본다. 김만덕은 영조 15년(1739)에 태어났다고 전한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제주의 기생인 만덕이 재물을 풀어서 굶주리는 백성들의 목숨을 구했다고 제주목사가 보고했다. 상을 주려고 하자, 만덕은 사양하면서 바다를 건너 상경해 금강산을 유람하기를 원했다. 이를 허락해주고 나서 (만덕이 금강산으로 향하는 곳에 있는) 고을로부터 양식을 지급하게 했다.”(정조실록 45권, 정조 20년 11월 25일 병인 1번째 기사)

정조 20년이면 1796년이다. 우리 나이로 김만덕이 58세 되던 해에 기록에 등장한다. 아쉽게도 그가 얼마의 재물을 내놓았는지 <정조실록>엔 나오지 않는다. 그는 얼마를 내놓았을까.

20세기에 들어와서 많은 이들이 김만덕 이야기를 꺼냈다. 그 기록 가운데 김만덕이 ‘천금’을 내놓았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실제로 천금일까.

“정조 19년(1795) 봄에 큰 기근이 일어나게 되자 같은해 윤 2월에 이우현 목사가 곡식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수송선 5척이 침몰, 재차 1만1000석의 곡식을 긴급히 요청한다. 이때 김만덕이 천금을 내어 육지에서 쌀을 사들이게 했다. 선원들도 때늦지 않게 곡식을 운반했다. 그 가운데 10분의 1은 친족과 친지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모두 관에 보내 굶주린 도민을 구하게 했다. 관에서는 완급을 가려 나눠주니 구호를 입은 도민들이 거리에 나와 만덕의 은혜를 칭송했다.”(김봉옥 저 <제주통사>, 1987)

향토사학자 김봉옥이 쓴 <제주통사>에 만덕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제주통사>에 따르면 만덕이 내놓은 건 ‘천금’이다. 실제 천금을 내놓았다기보다는 많은 재물을 내놓은 것으로 분석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정조 재위 때는 기근이 자주 발생했다. 특히 1792년(임자년)부터 1795년(을묘년)까지의 ‘임을대기근’ 당시에 재해와 기근이 극심했다. 임을대기근 중 최악의 기근은 1794년에 발생한다. 1794년 인구는 6만2698명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1795년은 4만7735명이라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최악의 기근이 발생한 1년 사이에 1만4963명이 줄었다. 대부분은 굶주려 죽었을 정도로 당시의 상황이 어느 정도 심각했는지 알게 된다.

때문에 제주사람을 굶주림에서 헤어나도록 구휼곡이 이송된다. 1794년부터 1796년까지 3년간 제주에 이송된 구휼곡은 5만3500석이며, 임을대기근 전체로 확대하면 최소 7만5000석은 넘었다.

김만덕도 제주도민들의 굶주림을 해소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으나, 일반 관리들 역시 구휼곡을 내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리를 하자면 김만덕이 내놓은 돈으로 도민을 굶주림에서 구한 건 아니었다. 도움을 준 건 분명하지만 김만덕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당시 양반들은 기부를 적극적으로 했고, 품계도 올라갔다.

“제주에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했다. 을묘년 10월에 진휼을 시작하여 올해 4월에 마쳤다. 세 고을의 굶주린 백성 5만1303명에게 쓰인 곡식은 3만5123석이었다. 이 일을 제주목사 유사모가 알렸다. 제주판관 조경일이 상을 주자고 논했다. 대정현감 고한록은 품계를 올리고, 정의현감 홍상오에게는 말을 상으로 내렸다.”(정조실록 44권, 정조 20년 6월 6일 경진 1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을 들여다보면 구휼곡을 낸 이들 가운데 품계가 올라가는 이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어찌 보면 양반들에게 있어서 기부는 당연한 문화이기도 했다. 제주목사 유사모 바로 전에 제주목사로 부임해 있던 이우현은 1430석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에 앞서 영조 때의 이수신 제주목사는 5000석을 내놓았다. 이들 외에도 많은 이들이 자연재해로 굶주린 백성을 구하는데 한몫을 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김만덕만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다음에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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