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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사히 신문 기자가 전하는 20년 전 4.3 취재 뒷얘기
일본 아사히 신문 기자가 전하는 20년 전 4.3 취재 뒷얘기
  • 홍석준 기자
  • 승인 2018.06.28 1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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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바시 히데아키 아사히신문 편집위원 제주포럼 4.3세션 주제발표
이덕구 외조카 故 강실 오사카유족회장, 시인 김시종씨와 인연도 소개
4.3 50주년을 기해 처음으로 시작된 일본에서의 4.3 추모 행사를 기사화했던 아사히 신문의 이시바시 히데아키 기자가 28일 제주포럼 4.3 세션에서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 미디어제주
4.3 50주년을 기해 처음으로 시작된 일본에서의 4.3 추모 행사를 기사화했던 아사히 신문의 이시바시 히데아키 기자가 28일 제주포럼 4.3 세션에서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 미디어제주

[미디어제주 홍석준 기자] 20년 전까지만 해도 제주4.3은 금기의 영역이었다. 당시 일본 유력 일간지인 아사히신문의 오사카 본사 사회부 소속 기자였던 이시바시 히데아키 기자의 제주4.3 취재 뒷얘기가 제주포럼 4.3 세션에서 소개됐다.

지금은 아사히신문 센다이총국 편집위원으로 재직 중인 이시바시 기자는 제주포럼 마지막날인 28일 4.3 세션에서 ‘어느 일본인 기자와 제주4.3사건’ 주제발표를 통해 4.3 50주년이 되던 해인 1998년 1월 7일자 조간 사회면에 ‘반세기의 금기, 다시 돌아보는 움직임 – 한국 제주도의 4.3사건’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작성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얘기를 시작했다.

그가 오사카에 있던 1990년대는 한국에서 태어난 제1세대에서 일본에서 태어난 제2세대로 커뮤니티 중심이 이동하고 있었고, 재일동포 2세들을 중심으로 1세들이 말하지 못했던 4.3에 대해 진상 규명 움직임이 시작된 시기였다.

그는 “1998년은 4.3의 시작이 된 무장봉기로부터 50주년이 되는 해였고, 그들이 그에 맞춰 오사카에서 처음으로 추모행사를 계획했다”면서 그 움직임에 맞춰 기사를 작성했다고 처음 4.3 기사를 쓰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기사는 당시 제주에서 교편을 잡았던 여성(기사 게재 당시 68세)이 우익 청년단체가 학교를 점거해 마을 사람을 고문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고 들었다는 내용, 그리고 동료 중 한 사람이 죽었고 1949년 여름에 몰래 오사카로 도망쳐 왔다는 얘기, 다른 사람의 외국인등록증을 손에 넣어 50년을 살아왔다는 등의 가슴 속에 담아둔 기억을 털어놓은 얘기였다.

그는 “오사카에 사는 제주 사람들에게 4.3은 바로 자신들이 연관된 사건이며, 털어놓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기억이었다”면서 자신의 이웃이기도 한 제주 사람들이 갈등을 하면서도 침묵을 화해로 바꾸려는 진지한 행동에 깊이 공감한 것이 취재의 원동력이었다고 당시 기억을 되살려냈다.

오사카 최초의 추모행사가 1998년 3월 21일 이쿠노구민센터에서 제주에서 무당을 불러 할머니들을 중심으로 600여명이 모여 성황을 이뤘던 모습을 다음날 사회면 기사로 전한 자료를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기사가 게재된 후 효고현에 사는 한 재일동포 1세로부터 호된 질타를 들어야 했다.

바로 4.3 당시 산부대에서 젊은 총사령관이 돼 처형된 이덕구의 외조카 강실 씨였다.

4.3 당시 9살이었던 그는 어머니와 2살 누이동생 등 일가족 20여명이 몰살을 당했고 겨우 오사카로 밀항해 도망쳐오는 등 처절한 경험을 한 사람이었다.

이시바시 기자는 “직접 4.3을 경험하지 않은 2세들이 4.3을 얘기하면서 화해를 입에 담는 것에 대한 짜증스러움,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인끼리 서로 죽였던 민족의 어두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를 일본인이 허락도 없이 다뤘다는 점에 참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당시 강실 씨가 분노한 이유를 나름대로 추측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강실 씨와 여러 차례 긴 대화를 나눈 끝에 강실 씨의 경험을 기사화했다. 강씨가 제주에서 열린 4.3 50주년 위령제에 참석하고 돌아온 후 4월 9일자 조간에 실린 기사였다.

(1948년) 12월초 북풍이 부는 밤. 경관대가 우르르 들이닥쳐 ‘앞으로 나와’라고 말하며 어머니를 총으로 내리쳤다. ‘아이들만은 살려주세요’라고 어머니는 애원했다. 같은 날 밤, 이웃 마을에 숨어있던 덕구 삼촌 가족과 친척도 습격을 당했다. 결국 소년 등 어린이 몇 명을 제외하고 어린아이 2명을 포함한 23명이 연행됐고, 3주 후 산부대에 대한 본보기로 전원이 총살당했다.

(1949년) 6월 초, 덕구 삼촌이 이끄는 게릴라 부대가 전멸되고, 사태는 거의 진압된다. 삼촌 시신은 하루 종일 광장에 내걸려 있었다. 매일 같이 시체의 뒤처리를 도왔기 때문인지 소년에게 슬픔과 눈물은 없었다.

그는 취재를 하는 동안 강실 씨로부터 ‘일본인인 당신이 왜 4.3을 쓰는 거냐’는 질문을 계속 받았다면서 어려운 숙제였지만 기사에 대답의 한 부분을 쓰려고 했고, ‘한반도의 새로운 ‘국가’ 형태가 아직 나타나지 않던 시기다. … 섬사람은 일본의 식민지배가 남긴 빈곤과 친일파가 버티고 앉아 있던 경찰의 횡포에도 불만을 갖고 있었다’고 기술했다고 소개했다.

4.3이 시작된 것은 일본의 패전과 한반도 해방 후인 1948년이 아니라 식민 지배가 작은 섬에 가져온 일그러진 권력구조와 전쟁 말기에 많은 일본군의 주둔, 그리고 철수 후에 나타난 일종의 공백 상태가 4.3의 비극을 초래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도 한 당사자로서 4.3을 마주해야 한다고, 그렇게 4.3을 배우게 됐다”고 20년 전의 기억을 소환해 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매일 동료들과 오사카 이쿠노 거리를 돌아다닌 끝에 6월말부터 7월까지 ‘제주도 – 재일 망향이야기’라는 제목의 6회 연재 기사를 쓰게 된다.

그는 이 연재기사에 대해 “제주도 출신자라는 소수 민족 그룹을 다루면서 전국지가 1면에 연재한 것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큰 보람을 갖게 된 속내를 내비치기도 했다.

연재 기사는 1회 광산 김씨 일족이 나라현에 만든 전용 공동묘지 이야기부터 2회 제주도가 재일동포를 대상으로 양로원을 게획하고 오사카에서 입주자 모집을 시작했다는 얘기, 3회 밀항자 얘기, 4회 재일동포 1세 여성들이 마음의 안식처로 삼았던 오사카 동부 이코마 산록의 ‘조센데라’ 얘기까지 이어졌다. 5회에서는 동료 기자가 제주도 출신 해녀들을 취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연재물을 쓰기 위해 처음으로 제주도 현지 취재를 하게 된다.

이시바시 히데아키 기자가 20년전 아사히 신문에 연재했던 4.3 관련 기사. 그는 이 연재기사 취재를 위해 처음으로 제주를 방문하기도 했다. ⓒ 미디어제주
이시바시 히데아키 기자가 20년전 아사히 신문에 연재했던 4.3 관련 기사. 그는 이 연재기사 취재를 위해 처음으로 제주를 방문하기도 했다. ⓒ 미디어제주

그는 “처음에 4.3을 기사화했을 때 ‘일본인인 당신이 왜 4.3을 쓰는 거냐’며 분노를 표출했던 강실 씨의 질문이 가슴 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면서 “일본 안에 있는 제주도를 그리는 것만이 아니라 제주도 안에 있는 일본을 그리는 일, 그것이 1세들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끄집어내면서까지 내가 4.3을 쓴 원점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됐다”고 담담히 소회를 피력했다.

재일 조선인 작가 김시종 씨와의 각별한 인연을 소개하기도 했다.

김시종 씨를 인터뷰하면서 남로당 연락책으로 잠복 중이었던 상황 등 생생한 장면을 많이 들었지만 그가 인터뷰를 마치면서 ‘녹음한 테이프를 처분해줬으면 한다는 말을 꺼냈던 얘기, 그리고 일본에 밀항으로 들어온 그가 가명의 외국인등록증을 사용해온 것에 대한 얘기를 절대 쓰지 말라는 다짐을 받았다는 얘기도 전했다.

그는 식민지배 하에서 태어난 시종씨가 황국 소년으로 자라난 후 해방과 혼란, 분단, 모순, 침묵으로 이어진 삶을 들어 “4.3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큼 무거운 일이다. 바동거리며 시달려온 ‘생(生)’을 미숙한 기자가 간단히 정리하고 고작 신문 1페이지에 일본어로 써넣어도 괜찮을까”라며 50년이나 욱신거렸던 상처를 가차 없이 떼어내는 죄책감을 무겁게 받아들이면서도 기사를 써야 했던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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