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에서 유교 체제로 ‘옷 갈아입기’ 성공
무속에서 유교 체제로 ‘옷 갈아입기’ 성공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8.06.12 0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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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제주 이야기] <3> 제도권에 편입된 ‘삼성신화’

제주의 아주 오랜 이야기인 삼성신화. 그 이야기는 무속에서도 엿보인다. 그래서 전 편에 본풀이를 통해서 삼성신화를 들여다보겠다고 했다. 본풀이는 무속에서 말하는 신화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신화와 본풀이의 차이를 들라면 본풀이는 문자화되지 않고,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며 심방에 의해 표현된다는 점이다.

송당본향당에 얽힌 본풀이를 들어보자.

“소천국은 한라산에서 솟아나고 금백조는 서울 남산 송악산에서 태어났다. 금백조가 인간에 탄생하여 일곱 살 나던 해에 중의 아이를 배고 말았다. 아버지 백정승과 김씨부인은 금백조를 무쇠상자에 넣어 바다로 띄워버렸다. 물결에 휩쓸려 떠돌던 이 상자는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로 떠내려왔다. 소천국은 가죽옷을 입고 한라산에서 사냥을 하며 살고 있었다. 이날도 한라산에 올라간 소천국은 온평리 바닷가로 상자가 밀려오는 것으로 보고 바닷가로 내려갔다. 그랬더니 아리따운 아가씨가 상자 안에 앉아 있었다. 막막한 타향에 온 금백조는 할 수 없이 소천국과 함께 살게 됐다. 부부는 아들 5형제를 낳고, 산짐승을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가 점점 많아지니 사냥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다. 여섯째 아이를 뱄을 때 금백조가 ‘아이는 이렇게 많아지는데 놀면서 살 수 있느냐. 농사를 짓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

소천국과 금백조 이야기는 고대경의 <신들의 고향>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이다. 이야기 주인공은 여성이다. 남성인 소천국이 중심이 아닌, 여성인 금백조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구성돼 있다. 금백조는 구좌읍 송당리 수호신이 된다. 금백조의 자손들은 크게 번져 제주도내에서 가장 많은 마을의 수호신이 된다. 마을마다 ‘김씨하르방’이라는 수호신들은 대부분 금백조 자손이다. 그래서일까. 금백조는 제주도 당신의 원조라고도 한다.

본풀이에서 보듯 소천국은 한라산에서 솟아났다고 돼 있다. 삼성이 땅에서 솟아났다는 이야기를 담은 삼성신화랑 닮았다. 금백조가 상자에 담겨 온평리 바닷가로 들어왔다는 것 역시 삼성신화에 벽랑국 세 공주가 온평리 바닷가로 들어온 이야기와 같다. 금백조가 남편인 소천국을 향해 “농사를 짓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는 말은 삼성신화에서 벽랑국 세 공주가 오곡의 씨앗을 가져왔다는 것이랑 맥락을 같이한다.

탐라순력도 ‘건포배은’의 한 장면. 제주성 북쪽으로 불타는 신당이 묘사돼 있다. 미디어제주
탐라순력도 ‘건포배은’의 한 장면. 제주성 북쪽으로 불타는 신당이 묘사돼 있다. ⓒ미디어제주

이런 부류의 본풀이는 송당본풀이에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서귀포시 호근리, 사계리, 감산리 등에서도 보인다. 구좌읍 세화본향당본풀이와 남원읍 예초본향당본풀이에도 나온다. 이밖에도 더 많은데 삼성신화 계열의 본풀이가 널려 있다는 것은 삼성신화의 원형이 무속과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속학자인 장주근(1925~2016)은 일찍이 삼성신화를 무가(巫歌)로 바라봤다. 그에 따르면 유교적 색채가 입혀져 지금의 삼성신화가 된 것이라고 한다.

조선조 정조 때 제주목사로 와 있던 이명준이 정조 10년(1786)에 올린 상소문이 있다. 거기에 보면 삼성혈(모흥혈)은 굿을 하는 장소였을 뿐이었다. 상소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당초에는 사당을 세우고 제사한 일이 없었습니다. 다만 광양당이 있어 무당들이 빌고 굿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중종 21년(1526)에 목사 이수동이 비로소 모흥혈 옆에 단을 쌓고 삼을나 자손으로 하여금 매년 음력 11월에 제를 올리게 했습니다.”

기록을 보면 애초엔 삼성신화가 무속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적어도 이수동 목사 시절, 단을 쌓을 때까지는 삼성신화는 신화가 아닌, 본향당 굿의 하나였다는 걸 보여준다. 그러다가 굿이 아닌, 유교적 의례가 가미돼 매년 제사를 올리게 된다.

무속이던 삼성신화가 유교적 색채를 띤 이유는 뭘까. 그건 바로 ‘이단’이 아닌, ‘정통’에 편입됐기 때문이다.

연재 첫 회에서 ‘성주고씨가전(星主高氏家傳)’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삼성신화 이야기를 담은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으로, 한성부 판윤을 지낸 고득종이 개입돼 서술됐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이 때가 태종 16년(1416)의 일인데, 이후 삼성신화는 제도권에 편입되면서 서서히 무속과는 거리를 두고, ‘유교’로 옷을 갈아입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이형상 목사의 움직임을 보면 알 수 있다. 이형상은 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한다. 그는 철저한 유학자로서, 신당에 제를 지내는 제주도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남환박물>을 통해 “야만의 풍속이 갈수록 더욱 심하다”고 무속에 기대는 제주사람들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더욱이 이형상은 제주도내에 있던 신당 가운데 129곳을 자신의 임기중에 불태워버린다. 심지어는 신당에 있던 나무뿌리까지 뽑을 정도였다. 이형상이 제작한 <탐라순력도>엔 신당이 불타는 장면이 등장하는 ‘건포배은’도 있다. 그만큼 이형상은 미신을 불손하게 여기는 철저한 유학자였다.

탐라순력도 ‘제주조점’의 한 장면. 제주성 안쪽에 삼성에게 제를 올리는 ‘삼성묘(三姓廟)’가 보인다. 붉은 원이 삼성묘이다. 미디어제주
탐라순력도 ‘제주조점’의 한 장면. 제주성 안쪽에 삼성에게 제를 올리는 ‘삼성묘(三姓廟)’가 보인다. 붉은 원이 삼성묘이다. ⓒ미디어제주

그런 그였지만 삼성을 바라보는 관점은 달랐다. 이형상 목사는 부임한 그해 삼성과 관련된 사당을 제주성 안에 들여놓는다. 고을나·양을나·부을나 등 삼성을 으뜸으로 삼고,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탐라순력도>의 ‘제주조점’이라는 그림을 보면 제주성 동문 서남쪽에 ‘삼성묘(三姓廟)’라는 사당이 존재하는 걸 알 수 있다. 이형상 목사가 성밖에 있던 사당을 성 안으로 들여오게 만들어 제를 지냈다는 것데, 철저한 유학자였던 이형상 목사에겐 삼성신화는 더 이상 무속의 굿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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