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21:53 (금)
“제주사람으로 산 맥그린치 신부, 하늘로 떠나다”
“제주사람으로 산 맥그린치 신부, 하늘로 떠나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8.04.23 23:5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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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때 제주에 내려와 목초 일구며 도민 경제적 자립 도와
살아 생전 그의 꿈은 제대로 된 호스피스 병원 운영하는 것
​​​​​​​한국 나이로 91세 선종…27일 삼위일체대성당에서 장례미사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벽안(碧眼)’이라는 단어를 곧장 쓴다. 파란 눈을 가진 서양사람들을 우린 그렇게 부른다. 맥그린치 신부도 그런 ‘벽안’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늘 제주에 있었다. 제주사람과 함께했다. 그가 23일 하늘의 부름을 받고 떠났다. 우리나라 나이로 91세에 선종했다.

1928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맥그린치 신부는 1953년 4월 우리나라에 온다. 이듬해인 1954년 4월, 한림성당 초대 주임신부로 내려오면서 제주에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됐다.

그가 남긴 건 많다. 제주에 온 그 해는 4.3의 광풍으로 제주도민들이 고통을 받을 때였다. 그는 경제적 자립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행동하는 게 배우는 것이다(to learn to do by doing)는 걸 한림 사회에 퍼뜨리는데 애썼다.

아무도 할 수 없다는 초지를 만든 ‘신화창조’도 그런 신념 때문에 가능했다. 제주사람들이 소에게 풀을 먹이려 중산간에 소를 데려다 가는 걸 본 맥그린치는 “목초를 조성하면 된다”고 외쳤다. 다들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뉴질랜드의 목초조성 권위자인 조지 홈스를 직접 데려와서 초지를 일궜다. 성공했다. 지금의 이시돌목장의 근거를 만들기도 했다.

생전의 맥그린치 신부. 김형훈
생전의 맥그린치 신부. ⓒ김형훈

 

그는 1960년대 이시돌목장을 개척하며 ‘테시폰’이라는 형태의 건축물도 남기기도 했다. 1940년대 유럽을 중심으로 쓰이던 건축 시스템을 우리나라에 적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제주도에 남아 있는 테시폰은 그가 남긴 유산이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제대로 된 호스피스 병원을 운영하는 게 꿈이었다. 현재 이시돌복지의원이 운영되고 있으나 좀 더 업그레이드 된 호스피스 병원을 갈망해왔다.

20대의 한창 나이에 제주에 온 맥그린치, 30대와 40대는 아주 천천히 제주사람들의 경제자립 기반 조성에 노력을 해왔다. 제주어도 곧잘 했던 그는 맥그린치보다는 한국명 ‘임피제’가 오히려 잘 어울리는 이였다.

임피제 신부의 빈소는 한림성당이며 장례미사는 오는 27일 오전 10시 삼위일체대성당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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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호 2018-04-24 11:32:17
젊은 시절 에 제주 오셔서 한림 사회의 개척, 계몽, 발전을 지향해 육신과 영혼을 다 바치신
P.J. Mcglinchey 신부님, 돌아보니 60 여년 한평생이 흘러갔습니다. 신처럼 저희에 오신 신부님, 이제
주님의 품 안에서 평화와 안식 누리시기를 기도 바칩니다. 아멘

용두암 2018-04-24 09:57:59
제주인들의 영원한 이웃이자 참 목자이신 임피제 신부님 장례는
도민들의 정성을 모아 도민의 장으로 치러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