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3 18:27 (화)
"4∙3을 이념의 잣대로 보지 말아요"
"4∙3을 이념의 잣대로 보지 말아요"
  • 김은애 기자
  • 승인 2018.04.03 18: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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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죄없이 군인에게 희생당한 아홉 식구
경찰 가족이라는 이유로 무장대에 살해당한 아버지, 할아버지
희생자 유족에게 4∙3이란, 무고한 죽음이다

[미디어제주 김은애 기자] 올해 열린 4∙3추모식에는 죽임을 당했거나, 피해를 본 4∙3 희생자 가족들이 대거 참석했다. 그중에는 산에서 온 사람들(일명, 무장대)에게 죽임을 당한 경찰 가족, 희생자 가족도 있었다.

군인에 의해 가족을 잃은 유족. 무장대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경찰의 가족. 어쩌면 꽤 긴 시간 동안 서로를 미워했을지도 모를 양측 유족을 만나보았다. 이들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 “어린아이가 무슨 이념이 있어. 하루도 잊히지 않아”

김상헌(남, 82세), 강순옥(여, 75세)

강순옥, 김상헌 부부는 미국에서 살다가 2011년 제주로 귀향했다.

“4∙3희생자유족으로 등록하는 기간에 우리 부부는 미국에 있었거든. 뒤늦게야 유족 신청을 했지. 제주에는 2011년에 돌아왔어. 귀향한 셈이지.”

일본에서 태어난 김상헌씨는 1945년 해방과 함께 제주도로 돌아왔다. 당시 나이로 9세였다. 지낼 곳이 없었던 그의 가족은 조부모님 댁에서 신세를 졌다.

“안거리 밖거리가 있는 집이었어. 조부모님이 안거리를 내줬지. 우리 식구는 아버지, 어머니를 포함해 일곱 식구가 살았고, 밖거리에는 조부모님을 포함한 여섯 식구가 살았어. 그런데 4∙3이 끝나고 나니까… 네 식구밖에 안 남았어. 다 죽었어.”

함께 살았던 열세 식구는 4∙3 이후 네 식구가 됐다. 집은 불타버렸다.

김상헌씨 아버지의 이름 '김순하' 세 글자는 제주4∙3평화공원 위령탑 앞 각명비에 새겨져 있다. 

“날짜도 똑똑히 기억해. 내가 이호2동에 살았는데 음력 11월 7일 날 불을 태우기 시작했거든. 막 불을 지르고 총을 쐈어. 움직이는 건 다 쏜 거 같아. 그래서 다 도망가고 난리 났지. 무서워서 아랫마을로 도망 내려와 이호1동의 아는 집에 숨었어. 거기는 불을 안 태웠거든. 그런데 12월 15일 거기도 불을 태우더라고.”

마을이 불타는 광경을 설명하던 그의 목소리가 격양되기 시작한다.

“또 있어. 한번은 이호 국민학교 마당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다 죽였어. 어린애들까지도. 나는 그때 열한 살이었어. 얼마나 끔찍했는지 상상도 못할 거야. 그 트라우마 때문에 지금도 괴로워.”

남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강순옥씨가 이어 말했다.

“다섯 살 때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 뒤로 70년이 흘렀어. 내가 지금 75살이야. 우리 아버지는 외갓집에 제삿밥 먹으러 가셨는데, 그때 잡아갔다네. 난 못 봤어. 오라동에 있는 학교 운동장에서 살해당했다 하더라고.”

아버지의 죽음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그녀는 결국 눈물을 참지 못했다.

“말을 다 할 수가 없어. 우리 동생이 1948년 6월에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음력으로 11월에 돌아가셨거든. 동생은 아버지 얼굴도 제대로 못 봤어. 그게 너무 불쌍해.”

아무것도 모르던 천진한 아이가 견디기엔 너무나 잔인한 죽음이었다. 김상헌씨는 지금이라도 4∙3 이후 겪었던 고통을 입 밖에 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이건 발설을 절대 못 하는 거였어. 말을 했다가는 다 죽이고, 잡아가고. 그러니 말을 못하고 여태까지 살아온 거지. 어떤 사람들은 ‘4∙3이 폭동이다’라고 말해. 그런데 폭동이 아니야. 죄 없는 어린아이까지 죽었는데 무슨 폭동이야. 아기가 무슨 이념이 있어. 없어, 그런 거.”

제주를 떠나 미국으로 향했던 이유를 묻자 김상헌씨는 한숨을 쉬었다.

“제주도에 먹고 살길이 없어서 나는 미국으로 떠났는데, 다시 제주도로 왔을 땐 세상이 변해있더라고. 어제는 4∙3 전야제에 갔었어. 일본에서 250명 유족이 왔다고 하더라고. 근데 이 사람들이 왜 일본에 가서 살았겠어. 어렸을 때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았으니까. 그걸 기억하면서 여태까지 산다고. 하루도 잊히지 않아.”

김상헌씨와 강순옥씨는 “억울하게 죽임당한 제주도민의 한을 풀려면 4∙3특별법 개정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어떤 식으로 죽임을 당했던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사람이 없게 도와달라”는 당부의 인사도 잊지 않았다.

 

# “경찰 가족이라고 해서 아버지, 할아버지 모두 죽창으로 살해당했어”

양순명(남, 73세)

양순명씨의 아버지는 경찰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무장대에 살해당했다.

“4∙3이 있던 해 11월. 무장대가 왔어. 아버지는 조카가 경찰이라는 사실 때문에, 할아버지는 손자가 경찰이라서 잡혀갔어. ‘경찰 가족’이라고 해서 죽창으로 무자비하게 살해당했지.”

서귀포시 남원읍 태흥1리에서 온 양순명씨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잃었다. 이유는 ‘가족 중 경찰이 있기 때문’. 무장대에 의해 집행된 잔혹한 연좌제였던 셈이다.

“군인이나 경찰들이 죄 없는 제주 사람들을 죽인 건 맞아. 무장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무력 사용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이 많지. 그런 것들에 대한 보상이나 그분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데는 동의하지만, 그래도 역사는 사실대로 기록해야지. 무장대에 의해 죽임당한 사람들도 많다고.”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느냐에 따라 유가족의 입장은 판이하다. 양순명씨는 4∙3을 항쟁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했다.

“군인에 의해 죽임당한 희생자가 3만 명이 조금 덜 된다고 하는데.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도 1800명 정도 된다고. 수가 적어서 그런지 무장대가 죽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안 해. 그 당시 무장대로부터 피해 본 사람들은 여기 안 온다고. 우리도 피해자인데, 소외되는 거지.”

양순명씨 아버지의 이름 '양창민' 세 글자는 제주4∙3평화공원 위령탑 앞 각명비에 새겨져 있다. 

자신과 같은 아픔을 간직한 주변인들에게 4∙3 추념식에 함께 가자 권유했지만, 모두 거절했단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깊은 상처를 간직한 채 사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그 사람들, 같이 가보자 그래도 싫대. 여기 각명비에 우리 아버지가 계시는데, 원래 4∙3 희생자 신고를 안 했었어.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하고 같이 이름을 놓고 싶지 않다고 형님이 싫다고 했었다고. 나중에야 ‘죄 없이 죽은 사람들인데, 미워하지 말자’고 신고했지. 잘 한 거 같아.”

그는 자신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도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자신이 지은 죄도 아닌데, 가족이 경찰이었다는 이유로 숨어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4∙3 희생자 유족들과 화합하고, 제주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바라지만 쉽지가 않아. 역사를 제대로 파악해서 바로 세워야지.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서로 인정하고, 사실대로 기록하면서 말이야. 과거를 부정하면 안 돼. 그래야 4∙3이 제대로 설 수 있어.”

군인에 의해 가족을 잃은 유족. 무장대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경찰의 가족. 이들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4∙3의 피해자임은 분명하다.

이들에게 ‘지금 당장 서로를 포용하고, 평화와 인권으로 상생하자’고 말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지 모른다. 유족들의 가슴 깊이 묻은 그리움과 아픔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다린다. 죄없이 죽은 모든 희생자의 넋을 기리며, 유족들의 마음속 깊은 가시가 조금씩, 조금씩 둥글게 보듬어질 그 날이 오기를. 4월에 피는 노란 유채꽃의 설렘을 진심으로 만끽할 평화의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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