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5 17:37 (목)
70년 전 억울하게 죽은 넋 위로하는 특별한 기도
70년 전 억울하게 죽은 넋 위로하는 특별한 기도
  • 홍석준 기자
  • 승인 2018.03.30 19: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천주교 제주교구, 30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성 금요일 ‘십자가의 길’
도내 500여명 신자들 참여 … 배우들의 혼신을 다한 연기에 눈물바다
천주교 제주교구 차원의 성금요일 '십자가의 길'이 30일 오후 제주4.3평화공원 내 위령탑 주위를 돌면서 진행됐다. ⓒ 미디어제주
천주교 제주교구 차원의 성금요일 '십자가의 길'이 30일 오후 제주4.3평화공원 내 위령탑 주위를 돌면서 진행됐다. ⓒ 미디어제주

[미디어제주 홍석준 기자] 나흘 뒤 제70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일 행사가 열리는 30일 제주4.3평화공원 위령탑 앞.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 앞에 나란히 서서 총살을 당하기 직전 외마디 비명을 쏟아내는 배우들의 혼신을 다한 연기가 이어졌다.

십자가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뜻의 ‘IN-RI’와 ‘제주4.3’이라는 글자가 함께 걸렸다.

천주교 제주교구가 부활절 파스카 성야를 하루 앞두고 500여명의 도내 신자들과 함께 4.3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성 금요일 ‘십자가의 길’ 기도를 드리는 자리였다.

천주교 제주교구 차원의 성금요일 '십자가의 길'이 30일 오후 제주4.3평화공원 내 위령탑 주위를 돌면서 진행됐다. ⓒ 미디어제주
천주교 제주교구 차원의 성금요일 '십자가의 길'이 30일 오후 제주4.3평화공원 내 위령탑 주위를 돌면서 진행됐다. ⓒ 미디어제주

주민 1 : 당신이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당신도 살리고 여기 우리들도 살려주시오!

주민 2 : 맞소!! 당신이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하지 않았소? 우리를 좀 살려주시오.

주민 3 : 사…살려…주시오. 난… 난… 죽는게 무섭소.

진식아방 : 하느님 ! 당신은 계십니까? 먼 육지로 이유도 모른 채 끌려와 옥살이를 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제주에 있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도 돌아오는 답장 하나 없습니다. 가족들이… 나를 잊은 건 아니겠지요? 주님, 혼자 남은 두려움이 너무 큽니다. 주님, 이대로 아무도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게 너무 무섭습니다. 주님… 당신은 어디에… 어디에 계십니까….

진식어멍 : (하늘을 바라보며) 하느님, 제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왜 저를 이토록 힘들게 하십니까? 왜 저를 버리십니까? 이제 더 버틸 힘도 없습니다. 누가 나를 기억이나 할까요?

진식할망 : (천천히 하늘을 쳐다보며) 하느님, 당신은 계시지요? 못살겠다, 지옥같다, 당신 어디 있냐며 내가 어디에 그리 말하겠습니까. 그래도 나는 당신이 있어 참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못난 영혼 당신 나라 가실 때 기억해주십시오.

천주교 제주교구 차원의 성금요일 '십자가의 길'이 30일 오후 제주4.3평화공원 내 위령탑 주위를 돌면서 진행됐다. ⓒ 미디어제주
천주교 제주교구 차원의 성금요일 '십자가의 길'이 30일 오후 제주4.3평화공원 내 위령탑 주위를 돌면서 진행됐다. ⓒ 미디어제주
천주교 제주교구 차원의 성금요일 '십자가의 길'이 30일 오후 제주4.3평화공원 내 위령탑 주위를 돌면서 진행됐다. ⓒ 미디어제주
천주교 제주교구 차원의 성금요일 '십자가의 길'이 30일 오후 제주4.3평화공원 내 위령탑 주위를 돌면서 진행됐다. ⓒ 미디어제주

이날 ‘십자가의 길’은 4.3 위령탑 주위를 피투성이 몸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 뒤로 4.3 당시 억울하게 희생당한 주민들의 이야기가 잔잔한 노래, 나레이션과 함께 펼쳐졌다.

시작기도와 함께 예수님이 가시관을 쓰실 때는 ‘금관의 예수’ 노래가, 십자가의 길 제8처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을 묵상하는 자리에서는 성가 ‘꽃’이 불려져 신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잠들지 않는 남도’와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등 민중가요도 함께 불려졌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하는 제14처에서는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노래와 함께 나직히 읊조린 나레이션이 끝난 후 참가자들 모두가 ‘제주 4.3 70주년 기도’를 바치는 것으로 ‘십자가의 길’ 기도가 끝났다.

다음은 마지막 14처의 나레이션 내용.

‘유난히 매섭고 시렸던 무자. 기축년 그 겨울 곰도 범도 무서워 잔뜩 웅크려 지내면서도 따뜻한 봄알 오려니 했더이다.

아. 그랬는데…

거동 불편한 하르방, 할망, 꽃다운 젊은이들, 이름조차 호적부에 올리지 못한 물애기까지 악독한 총칼 앞에 원통하게 스러져갔나이다.

허공 중에 흩어진 영혼, 짓이겨져 뒤엉킨 육신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불효 천년을 간다는데 무시로 도지는 설움 앞에 행여, 누가 들을까 울음조차 속으로만 삼키던 무정한 세월이여!

앙상한 어욱밭 방엣불 질러 죽이고 태웠어도 뿌리까지 다 태워 없애진 못하는 법 아닙니까.

봄이면 희망처럼 삐죽이 새순 돋지 않던가요.

참혹한 시절일랑 제발 다시 오지 말라 빌고 빌며 뒤틀린 모진 역사 부채로 물려줄 수는 없다며 봉분 다지고 잔디 입혀 해원의 빗돌 세우나니

여기 발걸음한 이들이여!

잠시 옷깃을 여미어 한 가닥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 보듬고 가신다면 헛된 죽음 아니라 부활하는 새 생명이겠나이다.

천주교 제주교구 차원의 성금요일 '십자가의 길'이 30일 오후 제주4.3평화공원 내 위령탑 주위를 돌면서 진행됐다. ⓒ 미디어제주
천주교 제주교구 차원의 성금요일 '십자가의 길'이 30일 오후 제주4.3평화공원 내 위령탑 주위를 돌면서 진행됐다. ⓒ 미디어제주

강우일 주교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마치면서 “오늘 예수님의 부조리한 죽음과 희생, 십자가의 제사, 그리고 이 땅에서 70년 전 4.3이라는, 아직 이름도 제대로 붙일 수 없는 정체모를 역사의 한 구석에서 희생돼 누가 어떻게 떠난지도 모르는 어둠 속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그 많은 분들의 희생과 죽음이 예수님의 2000년 전 죽으심과 겹쳐져서, 그것이 또 오늘의 우리에게 이어지면서 그 죽음과 희생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새삼 우리가 묵상하고 이 땅에서 그런 억울함과 분노와 희생과 고통을 만들어내는 온갖 종류의 폭력을 몰아내는 그런 평화의 일꾼이 되도록 주님께서 이 자리로 우리를 초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이날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한 의미를 강조했다.

강 주교는 이어 “모레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죽음을 이기시고 새로운 생명의 나라로 진입하신 예수님을 경배하고 감사드리면서, 어떠한 죽음의 세력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진입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어둠의 세력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주시도록 은혜를 청하면서 이 복된 파스카의 축제를 맞이하시길 기원한다”고 강복의 인사말을 건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