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8 19:15 (목)
“제주4‧3 한 시대의 우발적인 사고 아니다”
“제주4‧3 한 시대의 우발적인 사고 아니다”
  • 이정민 기자
  • 승인 2018.03.23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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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일 천주교 제주교구장 23일 도교육청 특강서 피력
“현대사서 일시적 비극만 보지 말고 이전 역사도 살펴야”
“국가가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 4‧3 표면에 드러난 단면”

[미디어제주 이정민 기자] 제주4‧3이 국가가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이고 통합적으로는 한 시대의 우발적인 사고가 아닌 인간 존엄에 대한 염원이 터져 나온 것이라는 지적이다.

천주교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는 23일 제주도교육청 대강당에서 진행된 4‧3 특별강연에서 이 같이 지적하고 교육자들의 올바른 4‧3 교육을 당부했다.

천주교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가 23일 제주도교육청 대강당에서 4‧3 특별강연을 하고 있다. ⓒ 미디어제주
천주교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가 23일 제주도교육청 대강당에서 4‧3 특별강연을 하고 있다. ⓒ 미디어제주

강우일 주교는 이날 “4‧3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그 자체만 볼 것이 아니다”며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망원 렌즈’를 조금 줄이고 역사를 길게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 주교는 우선 “4‧3을 설명하는 많은 자료에는 양민이 학살된 사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이념과 무관한 일반 시민들, 농어민, 어린이, 노약자들이 정부 당국의 합법적 조사와 재판 과정 없이 연행되고 고문 및 즉결 처분, 집단학살을 당한 일을 많이 강조한다”고 이야기했다.

또 “(4‧3은) 우리 민족 역사의 부끄러운 비극이고 국가가 저지른 반인륜적인 범죄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나 이는 4‧3의 표면에 드러난 단면”이라며 “70주년을 맞이한 4‧3을 성찰하면서 4‧3을 한국 현대사에서 일시적인 비극으로 보고 시시비비를 논하며 책임 규명에만 그치는 것은 역사적 소명을 논하는데 부족하다. 4‧3 이전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고 부연했다.

강 주교는 “(우리나라는) 고대서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임금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유교적 세계관이라고 할까. 국가의 최고 이념으로 삼는 체제하에서 살아왔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임금이 국가 전반에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왕정체계에서 그를 둘러싼 소수의 양반 계층이 국가를 다스리고 대다수 일반인은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와 존엄을 보장받는 삶을 살지 못하고 대부분 무조건적인 책임과 의무만을 강요당한 채 그런 삶을 살았다”고 했다.

이어 소설 춘향전과 홍길동전을 예로 들며 “지식층에서도 신분과 가문 교육을 뛰어넘어 인간적 평등을 누리는 꿈이 일기 시작한 것”이라고 평했다.

강 주교는 “일본이 1910년 조선을 합병한 뒤 조선민중은 1919년 3‧1운동을 시점으로 독립을 불태우며 저항에 대한 기운을 강화했다”며 “일제 강점기 36년은 단순 식민지배만을 받는 기간이 아니라 한민족이 자국을 외국 세력에 내어준 조선왕조와 결별하는 시대였고 일본의 경제적 수탈을 겪으면서도 국민의 생명과 권력을 재단하던 전제 군주체제에서 해방되는 시기였다”고 강조했다.

그에 대한 근거로 일제 강점기가 끝나 해방된 이후에도 조선왕조를 복원하겠다는 염원이 없었다는 점을 들었다.

“인간 존엄 억압하는 불의로부터 해방 염원 에너지 터져 나온 것”

“4‧3 희생자, 인류 역사 당연한 궤적 한발자국 더 크게 내딛은 이”

“더 성숙한 민주주의 발돋움 하도록 4‧3 의미 정립 정확하게 해야”

강 주교는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인한 저항과 민족운동이라는 흐름을 이야기하며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1947년까지 6만명이 넘는 사람이 귀환한 점 등을 들어 민중의 의식이 깨어날 수 밖에 없었다고 전개했다.

천주교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가 23일 제주도교육청 대강당에서 4‧3 특별강연을 하고 있다. ⓒ 미디어제주
천주교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가 23일 제주도교육청 대강당에서 4‧3 특별강연을 하고 있다. ⓒ 미디어제주

강 주교는 “일본 패전후 제주에 돌아온 사람들,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은 민족의식과 국권 회복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 이들이 제주 사회의 여론 주도세력이었다”며 “그런데다 미군정은 남한을 다스리며 한국을 제대로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지가 처음부터 없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해석했다.

이와 함께 “경제적으로 일제 치하에서는 계획 경제 및 전쟁 물자 부족으로 식량을 배급했는데 미군정 체제에서는 자신들이 알아서 시장에 내다 팔면서 시장 경제가 엉망이 됐다”며 “1944년 제주 보리 수확량이 26만8000석이었는데 1946년에는 8만8000석이었다”고 전했다.

강 주교는 “(이런 상황에서) 1947년 3‧1절 행사에 3만여명이 모였고 불만과 울분이 차오르고 있었다”며 “그리고 이어지는 발포가 있고 미군정이 이런 사태를 근원적으로 빨리 해결하라고 하니까 지역 경찰을 위시한 미군정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책임자 색출에 나서면서 많은 사람을 고문하고, 죽게 돼 거기에 대해 총파업이 시작됐다”고 역설했다.

이에 따라 “행정기관 23개 기관, 105개 학교, 우체국 등 제주 직장인의 90%에 달하는 4만여명이 참여했고 엄청난 반발이 시작됐다”며 “미군정은 더 강경하게 대응하다 1948년 4월 3일 봉기 습격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라고 4‧3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그려냈다.

강 주교는 특히 “통합적으로 바라보면 4‧3은 한 시대의 우발적 사고가 아니었다”며 “민족의 해방, 오랜 세월동안 한반도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을 억압하는 사회악과 불의로부터 해방을 염원하는 역사의 염원, 그러한 에너지가 축적돼 터져 나온 것”이라고 규정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엄청난 민족의 역사적 동력을 멈춰 제어하고 파괴하려는 부정적인 힘이 역으로 작용해 많은 국민이 희생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강 주교는 끝으로 “4‧3의 희생자들은 인간 생명의 가치를 더 빛내고 드러내는 인류 역사의 당연한 궤적을 한발자국 더 크게 내딛고 있던 분들”이라며 “이러한 4‧3에 대한 이해와 의미 정립을 교육계에 있는 분들이 정확하게 해주고 기억하게 해야 한다. 우리나라와 사회가 더 성숙한 민주주의로 발돋움 할 수 있도록 교육계에 있는 분들이 도움을 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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