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병원 공론조사, ‘결정장애’의 발로인가?, ‘숙의민주주의’의 유혹인가?
영리병원 공론조사, ‘결정장애’의 발로인가?, ‘숙의민주주의’의 유혹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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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3.21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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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운호 전 한국은행 제주본부장
고운호 전 한국은행 제주본부장
고운호 전 한국은행 제주본부장

# 숙의민주주의 명분으로 도민에 책임 떠넘기기 하나?

제주도가 국내 첫 영리병원으로 추진하는 녹지국제병원 개원허가를 공론화 과정을 거쳐 결정하기로 했다. 정부 차원의 신고리원전에 대한 공론조사는 있었지만 지역에서의 공론조사는 처음 있는 일이다. 원희룡 지사는 “공론화 과정을 통해 소모적 논란을 끝내고 제주의 자치역량을 높혀 제주 공동체의 공익을 위한 전환점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제주도의 개설 허가 절차만 남은 상태에서 또 다시 오리무중으로 빠져드는 모양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2015년 12월 녹지국제병원 설립계획을 승인했다. 애초 제주도는 성장동력 발굴 육성, 투자유치 정책의 일관성 유지 등을 이유로 영리병원 개설허가에 적극적이었으나, 의료보건 및 시민단체의 반발, 문재인 정부의 영리병원 반대 기조, 지방선거 앞둔 논란 증폭 우려 등을 고려해 공론조사에 공을 떠넘긴 것으로 보인다. 공론조사를 위해서는 공론화위원회가 구성돼야 하기 때문에 개원 여부 결정에 최소 4개월은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녹지국제병원의 개원 여부가 사실상 6월 지방선거 이후로 미뤄진 셈이다.

# 공론화, 문제해결 만능 아니다.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사회 문제가 복잡다난해지고 과학기술이 고도화 됨에 따라 관련 전문가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기술 등 고도의 정책결정에 일반 시민들의 다양한 참여도 활발히 시도되고 있다. 새로운 사회 문제해결 방법으로 떠오르고 있는 공론화라는 절차적 참여민주주의·숙의(熟議)민주주의가 그 한 예이다.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는 이전에 없었던 독특한 시도이다. 집단지성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숙의민주주의 방식이다. 문재인 정부는 원전을 둘러싼 가치 충돌을 숙의를 통한 공론화 과정을 거침으로써 갈등을 줄이고 통합을 이루겠다는 의도였다. 갈수록 빈발하고 더 커져가는 사회적 갈등 과제들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해결하는 지혜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향후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 시민의 참여와 헌신 없이는 국가가 모든 일을 독점하며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는 지금의 시대적 상황에서 시민 역량을 강화하는 계기도 될 것이다.

하지만 공론화가 모든 문제 해결의 만능이 아니다. 이제 그 문이 열리기 시작했을 뿐이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이제 우리가 제대로 만들어 가야 한다. 숙의민주주의는 어쩌면 더 많은 논란과 논쟁, 갈등을 동반하면서 계륵 같은 존재로 전락할 수도 있다. 공론조사를 둘러싸고 진영논리에 따른 정치 공세와 가짜 뉴스가 판칠 경우 오히려 더 큰 갈등을 불러 이전투구 양상으로 치닫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원전 같은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분야를 일반 시민의 판단에 맡기기에는 아직은 시기 상조다. 또한 공론화위원회에 결정의 결과에 따른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본질적 한계도 있다.

형식적이고 통과 의례적인 제도가 되어 정책 당국에 면죄부만을 줄 것인지, 정책 결정에 시민이 참여하여 집단지성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진정한 기회가 될 지는 아직 판단하기에는 이르다. 우리 사회의 사회적 갈등 대부분이 정치적 쟁점으로 비화하면서 분쟁이 장기화하는 악순환 구조로 고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숙의민주주의에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 공론화 과정이 사회적 갈등을 줄이고 정책 결정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 지에 대해 냉정하게 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장을 맡았던 김지형 전 대법관은 “공론조사는 대의민주주의가 국민들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때 보완재로서 의미가 있다”며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면 굳이 공론조사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그리고 공론조사의 사회·경제적 비용도 만만치 않다”며 공론조사 만능주의를 경계했다.

사회 갈등 해결을 공론조사에 의존한다는 것은 우리의 대의민주주의가 아직까지는 제대로 착근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우리 헌법에서 채택한 대의민주주의의 본질이 무엇인가. 국민이 선출한 대표기관인 국회의원들이 여론을 수렴하고 토론을 거쳐 책임있게 결정을 도출하며 일을 하라는 것이다. 온갖 권력과 특혜를 누리다가 정작 골치 아픈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는 답을 내지 못하고 직접민주주의와 대타협이라는 명목으로 책임없는 일반 시민들에 결정을 미루는 일이야말로 무책임의 전형일 뿐이다. 이는 입법기관으로서의 책무를 포기하는 것이며 대의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발상이다.

국민이 직접 뽑지도 않았고 의사를 위임하지도 않은 사회적 기구가 국민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책 결정을 좌지우지해서는 안된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아 막중한 권력을 부여하고 엄청난 국민혈세를 지원하는 이유가 뭘까. 정치 권력자들의 뼈를 깍는 반성과 성찰이 없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도 없다.

#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어낼 배짱은커녕 칼자루도 안 쥐겠다는 제주도정

“녹지병원 개원 결정이 공론화로 넘어간 것을 보면 지사와 도의원들이 결정장애를 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갈팡질팡 행보는 혼선과 불신을 야기할 뿐이다. 대선 행보와 측근 정치에 관련된 일은 여론의 질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신있게 밀어붙여 오던 사람이, 골치 아픈 일이라고 도민들에게 전가하는 행위야말로 도민을 우롱하는 처사이다 ”며 한 도민이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간 원 도정은 녹지국제병원 개설허가 신청과 관련해 무려 6차례나 결정을 연기했다. 얼마 전에는 최종 결정권자인 제주도지사 허가만 남겨두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청와대와 보건복지부와 협의해서 개설허가 여부를 결정하겠다며 청와대와 보건복지부로 공을 넘겼다. 결국 원 도정은 공론화 절차를 밟겠다며 정책 결정의 책임을 도민들에게 떠넘겨버린 셈이다. 민의를 따르려는 합리적 선택이라고 항변할 지 모르나 오로지 시간을 벌기위한 술책일지도 모른다. 지사의 책무를 포기하는 무책임하고 비겁한 처신이며 행정의 불신 초래와 결정장애라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공론조사 카드는 득과 실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일단 원 도정은 선거 정국에서 영리병원이라는 '뜨거운 감자'에서 한발짝 비켜설 수 있게 돼, 시민사회와 의료계의 공세를 어느 정도 피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간 영리병원의 여론이 의료서비스 산업 육성에 대한 본질적 접근에서 보다는 이념적 틀에서 형성돼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영리병원 공론화는 또 다른 소모적 논란과 갈등을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

공론화 여론 수렴이 성공하려면 시민참여단에게 충분하고 균형된 정보 제공이 전제되어야 한다. 제대로 된 숙의가 이루어지려면 최소한 관련 전문가의 지원이 필요한 이유다. 다음으로는 공론화위원회의 공정성과 중립성을 지키기 위하여 균형을 맞춘 시민참여단 구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과정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면 새로운 논란과 갈등만 양산되어 공론조사 카드는 실패로 끝날 공산이 크다. 영리병원 허가는 다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답답한 여정이 반복될 것이다.

제주특별자치도지사는 제왕적 권한을 기반으로 제주사회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지사가 언제나 도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과 꿈을 갖게 해야 하며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하는 시대적 소명을 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시대적 소명의식과 도민의 믿음을 바탕으로 제주의 중요 방향을 정하고 그것을 역사에 책임지는 자세를 취할 때 보람있고 가치있는 자리다. 그런데 원 지사는 찬반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영리병원 문제를 차라리 누군가 대신 결정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일까.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허송세월하며 갈등만 조장하는 도정”이란 비판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개방화 시대를 맞이하며 축적된 다양한 모순과 갈등구조에 세대갈등이라는 또 하나의 암초를 만나 제주특별자치도의 갈등양상은 중층적 모순구조로 더욱 심화됐다. 이러한 제주 사회의 중층적 모순구조는 사회 구성원간 첨예한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그 해결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작금의 갈등 현안에 대해 스스로 내려야 할 결정을 미루면 남의 결정을 따라야만 하는 게 권력의 생리다.

지사는 궁극적으로 숱한 결단의 순간과 씨름을 해야 하는 자리다. 최선의 선택을 위해 주위의 도움과 여론 수렴과 고뇌의 시간을 거치겠지만 최종적인 판단은 결국 지사 자신 몫이다. 이런 상황에서 도민이 부여한 제왕적 권력과 거대한 도정 인력 및 조직을 활용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갈팔질팡한다면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상황이 꼬이고 있는데 단칼에 끊어낼 배짱은커녕 칼자루를 쥐겠다는 리더십도 안보이는 제주 상황이 참으로 답답하기만 하다.

# 6.13 선거에서 ‘시대의 눈높이’에 맞춘 순교자적 정치 리더십을 선택하자

우리 사회가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심한 성장통을 겪고 있는 모든 문제 원인의 귀결은 사회 권력층들이 권리만 누리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퇴행적 태도에서 시작됐다. 지금이야말로 성장한 시민의식에 걸맞게 사회 권력층의 각성과 역할이 절실한 때이다.

하지만 요즘 우리 주변엔 온통 사익추구 정치와 포퓰리즘에 중독돼 ‘주겠다’는 정상배만이 지천에 널려있을 뿐이다. 세계화의 전도사로 불리는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범세계적인 리더십 결핍 현상을 지적하는 글에서 ‘왜 세계에는 우리 시대의 도전에 맞서도록 그들 국민을 고무하고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이렇게도 없는 것일까'라고 한탄하면서, 지도자들이 SNS 등으로 너무 많은 사람의 ‘소리’를 듣다 보니 결국 자신(自身)은 없어지고 그 '소리'에 갇히고 만다고 했다. 그는 지도자들이 여론에 함몰되다 보면 국민이 가야 할 길보다 국민이 당장 원하는 것에 매달리게 돼 국가가 퇴락하게 된다고 했다.

국민이 당장 원하는 것에 매달린 에바 페론은 외국자본 추방, 기간산업 국유화, 노동자 임금인상과 처우 개선, 의료와 대학교육 무상지원 같은 획기적인 친서민 정책을 대거 추진해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포퓰리즘의 상징인 ‘아르헨티나 페로니즘’은 한때 미국보다 잘 살았던 국가를 아예 망가뜨려놨다.

이와는 달리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정작 자신은 선거에서 국민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 고용·연금·의료·세제 등의 개혁을 통해 ‘유럽의 병자'라 불리었던 독일을 유럽의 중심에 우뚝 세웠다. 이러한 ‘시대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춘 순교자적 정치 리더십이 독일 경제의 눈부신 성장의 근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더 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민에게 강력한 추진력과 비전을 제시하면서 끝없이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점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국민 눈높이를 시대 눈높이에 맞춰 값진 교훈을 남긴 진정한 지도자다. 중대한 정책 결정을 앞두고 우왕좌왕하며 혼선과 불신을 자초하고 있는 제주 지도자들이 곱씹어야 할 가르침이다.

제주 도민이 함께 나아갈 길목에는 다양한 모순과 갈등구조에 세대 간 경제·정치·사회적 이해관계가 날이 갈수록 매섭게 충돌하고 있다. 이러한 중층적 갈등구조 때문에 돌파구 찾기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상황일 수록 포플리즘에 함몰돼 여론의 꼭두각시로 행세하는 줏대 없는 정치인보다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자신의 철학과 신념과 의지에 따라 처신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인기를 잃더라도 결단하고 행동하는 지도자를 말이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자른 알렉산더의 리더십을 기대하기 힘들다면 제주 도민은 새로운 리더십의 선택을 통해 갈등과 모순구조의 타파를 시도해야 한다. 제주 도민이 6.13 선거를 도민의 정당 방위권을 행사할 거사의 날로 마음을 모아가야 하는 이유다. 그것이 도민의 운명이고 제주 사회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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