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9 11:14 (금)
제주항일의병항쟁 109주년을 맞으면서
제주항일의병항쟁 109주년을 맞으면서
  • 미디어제주
  • 승인 2018.03.01 16: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별기고] 김황재 사단법인 탐라역사문화연구회 제주항일운동연구소장
김황재 제주항일운동연구소장
김황재 제주항일운동연구소장

제주의병항쟁은 1909년에 고승천 ․ 이중심 ․ 김석명의 주도로 호남의병 세력과 연대하여 제주도민 약 2천여 명이 제주에서 일제를 몰아내고 舊法을 회복하겠다는 義氣로 창의한 제주 최초의 독립운동이었다.

1909년 2월 28일 제주 광양동에서 창의한 의병은 한말 민중항쟁의 중심이었던 대정에서 항쟁을 전개하게 된다. 그러나 밀정과 친일세력에 의해 의병 활동을 탐지한 일제는 제주에 진주하던 일본경찰과 일본인, 일진회 등 친일세력까지 총동원하여 무력진압에 나서게 된다. 3월 2일 대정 안성리에서 모병활동 중이던 의병들은 일제 진압부대의 기습을 받고 격전을 벌였으나 무장과 병력이 미약했던 의병세력은 결국 와해되고 말았다. 이후 일경에게 체포되어 대정주재소에 감금되었던 의병장 고승천과 의병 김만석이 3월 4일에 일경과 격투 끝에 탈출하였으나 추격하던 일경의 총격으로 안성리 들판에서 장렬히 순국하였다.

이러한 제주의병항쟁은 한말 대정지역에서 일어났던 姜悌儉의 亂, 房星七의 亂, 李在秀의 亂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 3건의 민란은 濟州島 전체에서 일만 명 이상의 민중이 참여하여 제주성을 공략한 공통점을 가진 대규모 민중항쟁이었다. 봉건적 지대와 조세를 통한 수탈이라는 구조적 모순에 제주도민의 저항기질을 발현한 반봉건운동으로써 이때 형성된 저항역량은 소멸되지 않고 결국 1909년 의병항쟁으로 맥을 같이한 것은 한말 의병사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제주만의 독자성을 띄고 있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후 1918년 법정사항일운동과 1019년 조천만세운동으로 맥을 이은 제주적인 항일독립운동으로 계승시킨 점에서도 실로 놀라운 사적 가치를 지닌 민중운동이라는 것이다.

지금 의병에 대한 조명사업은 각 지자체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의병의 날은 2011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6월 1일에 기념식이 열리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의병기념관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광주시는 2015년 ‘한말 의병운동 기념사업 지원 조례안’을 통해 의병정신을 선양하는 조명 사업에 치중하고 있다.

그러나 제주도 당국의 인식은 매우 미약하여 제주의병항쟁의 흔적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현실이다. 의병소가 있었던 광양동과 항쟁의 본산 대정에도 안내판 하나 없이 방치되고 있으며, 단지 이도2동 1062번지에서 1251-1번지까지 0.977Km 구간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승천로’라고 하고 있는데 한시바삐 ‘고승천길’로 바꾸고 의병항쟁 안내판을 설치하여 도로명의 의미를 알리는 작업이 절실하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제주의병 관련 유적지 발굴·관리, 역사적 자료 수집·보존·전시 및 조사연구, 의병운동에 대한 교육과 홍보, 기념식 개최 등의 사업 등 구체적인 지원 근거를 마련하여야 하며, 특히 저항의 본산인 대정읍에 ‘의병기념관’을 설립하여 오늘날 제주정신의 근간이 되었던 한말 제주의병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이 반드시 추진돼야 하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