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19 14:21 (화)
6·25전쟁과 제주 그리고 제주인
6·25전쟁과 제주 그리고 제주인
  • 미디어제주
  • 승인 2018.01.16 12: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고] 정세호 제주특별자치도민속자연사박물관 관장
정세호 제주특별자치도민속자연사박물관 관장
정세호 제주특별자치도민속자연사박물관 관장

초겨울의 세찬 바람이 체감온도를 더욱 떨어뜨려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요즘입니다. 제주는 바람의 섬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제주에 몰아닥치는 바람은 기압골의 형성과 해수 수온의 영향이 클테지만 제주섬의 중심, 해발 1950m 한라산 앞에서 더 북상하지 못한 채 일본쪽으로 꺾이는 현상이 많은 점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닙니다. 제주섬의 존재 자체로서 바람으로 인한 육지부 피해를 저감시킨다는 이야기도 많이 합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도 그렇습니다. 6·25는 제주도, 제주도민과 뗄래야 뗄 수없는 불가분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산천이 고이 잠든 새벽 4시 북한군 13만 5,000여 명은 전차 150대와 야포 600문 그리고 항공기와 경비정 등을 앞세우고 38도선 전역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장기간 치밀하게 준비된 강력한 적군의 공격 앞에 군비가 허술한 아군은 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함락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어서 7월 16일에는 중부권의 요충인 금강방어선을 돌파당하여 전선은 남으로 남으로 밀려 적군에게 짓밟히고 있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제주도민들은 풍전등화에 놓인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장으로 나가자고 부르짖었고, 그 우국의 함성이 요원이 불길처럼 번져나갔습니다. 학생들은 책을 덮어놓았고 농군들은 농기구를 놓아두고, 학생들은 학교별로, 지역의 청소년들은 청년방위대별로 군사훈련에 돌입하였습니다. 그러다 이 한 몸 나라 위해 바치겠다는 거룩한 애국심으로 고향산천과 정든 가정을 두고 군입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8월에 제주도에 사령부를 둔 해병대로 3천여 명이 입영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장하게도 16세부터 모병한 여자의용군 126명도 끼어있었으니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9월과 10월에는 7월 16일 제주에 설치된 제5훈련소에 육군으로 1만여 명이 입대하였습니다. 이렇게 10월까지 1만 3,000여 명이 출전하였으며 이 용사들은 군에 가면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알면서도 개인보다 나라가 우선이라는 애국지성으로 혈서를 쓰면서 입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간 전쟁 상황은 아군이 10월 1일 38도선을 넘고 북진을 하여 희망에 들떴으나 10월 19일 중공군과 소련공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제주도민들의 출전은 계속되었습니다. 전쟁은 무려 3년 1개월이나 진행되었고, 제주용사들은 총탄이 난무하는 산악에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용감하게 적을 무찔렀습니다. 제주도 출신이 주로 참전한 전장은 육군은 지리산지구, 인제군의 설악산, 고성군의 884고지 및 월비산, 철원군의 백마고지, 김화군의 금성지구 전투에서 실로 눈부신 활약을 하였습니다. 해병대는 인천상륙, 수도탈환, 양구군의 도솔산, 924 및 1026고지, 장단군의 장단전투에서 그 투혼을 아낌없이 발휘하여 무적해병의 신화를 창출하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51년 1월 22일 대구 수성동에 있던 육군 제1훈련소가 대정 상모리로 이전해 왔습니다. 훈련소는 1956년 1월 1일 해체 시까지 50만 병사와 하사관 3만 8,745명, 자동차운전병 7천 355명을 양성하여 전선에 배치하였습니다. 이 용사들이 전쟁주역의 일환이 되어 인해전술을 구사하는 공산군을 무찔렀습니다. 또한, 1951년 2월 1일부터 공군사관학교가 대정국민학교로 옮겨와 4월 23일 떠날 때까지 공군간부를 양성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대정 알뜨르비행장에는 공군전투비행단이 옮겨와서 미 공군 헬스소령이 지도아래 한국 공군조종사에게 F-51무스탕전투기 비행훈련을 잠시 동안이나마 시행한 바 있습니다. 한편 국방부 제2조병창을 1950년 10월 16일 제주여자중학교와 제주주정공장에 설치하였습니다. 이 조병창은 1953년 11월 20일 인천시 고잔동으로 이설할 때까지 총탄, 수류탄, 박격포탄을 제조하여 전선으로 보냈습니다.

그때 육지부가 전쟁으로 황폐되다보니 피난민이 대거 입도하였고, 1951년 말에는 무려 15만여 명에 육박하였습니다. 이들도 제주에서 도민과 함께 고난을 참으며 한때를 살다가 귀환하였으며 이로 인해 제주문화는 한층 향상 발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주도는 후방전략기지로서 국토의 최후 거점으로 인적·물적자원을 총동원하여 전쟁수행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따라서 당시 출전한 수많은 용사가 나라를 위해 산화하였고, 상당수가 전상을 당하였으며 만기 제대하고 귀향한 용사들도 이제 고령으로 하나둘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제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진충보국한 거룩한 참전유공자의 나라사랑 정신을 받들고 후세에 길이길이 전승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는 더 늦기 전에 이분들의 얼을 되새기고자 참전 68년을 맞이하여 ‘대한민국을 구한 제주인’이라는 기획전을 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6.25와 관련된 자료(훈장증, 사진, 책자류, 의복류 등)가 있는 분들은 민속자연사박물관(064-710-7680, 7704)로 연락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