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을 쓴 이를 밝히지 못하는 이유가 있답니다”
“서문을 쓴 이를 밝히지 못하는 이유가 있답니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8.01.07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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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다시보기] <31> 마치며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탐라순력도>는 이형상 목사(1653~1733)가 남긴 걸작이다. 그가 제주목사로 내려와서 순력을 한 이야기와 제주를 둘러본 이야기들을 담았다. 그림에다 글도 포함된 작품이어서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순력을 이렇게 화첩 형태로 남긴 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보물로 지정돼 있을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동안 <탐라순력도>를 통해 제주도와 당시 조선의 사회를 들여다봤다. 이번 호로 <탐라순력도> 이야기를 마치려 한다. 마지막으로 제주목사로 왔던 이형상이 제주를 떠나는 장면을 따라가 본다.

<탐라순력도>는 모두 41점의 그림으로 구성돼 있다. ‘한라장촉’이라는 제주도 전체를 그린 그림을 시작으로, ‘호연금서’라는 그림으로 막을 내린다. 41점은 각각의 그림에 설명이 붙어 있는데, 호연금서엔 설명이 전혀 없이 그림으로만 이뤄져 있다. 41점 가운데 그림만 그려진 유일한 그림이 ‘호연금서’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호연금서는 사실 <탐라순력도>를 제작할 당시에 포함된 그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형상은 1702년 제주목사로 내려와 그해 가을 화북진성을 시작으로 동쪽으로 한바퀴 돌며 순력을 행했다. <탐라순력도>가 완성된 건 이듬해였다.

<탐라순력도>의 서문에 그런 기록이 나와 있다. “화공 김남길을 시켜 그림 40점을 그리게 하고, 비단으로 하나의 첩을 만들고 탐라순력도라고 부른다”고 나온다. 서문의 마지막 부분은 “계미년(1703) 죽취일에 와선각에서 기록하고, 이를 병와거사의 서문이라고 부르겠다”고 서문을 끝내고 있다.

서문에 등장하는 죽취일(竹醉日)은 흔히 음력 5월 13일이라고 한다. 병와는 이형상의 호를 말한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건 41점이 아니라 40점이라고 쓴 점이다. 호연금서엔 유독 설명글이 없다는 점에서 40점을 완성시키고, 나중에 추가된 게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어쨌든 서문만 들여다보면 김남길이라는 화공을 시켜 그림을 그렸고, 글은 이형상이 쓴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형상이 쓴 <병와집>엔 글을 쓴 주인공이 자신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병와집> 권14 ‘탐라순력도서’에 글쓴이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탐라순력도서’는 <탐라순력도>의 서문과 내용이 같다. 다른 건 ‘오씨노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병와집>은 “오씨 노인이 글을 썼다”고 적시하고 있다.

<탐라순력도>의 서문과 달리 <병와집> ‘탐라순력도서’에 김남길과 함께 오씨 노인을 등장시킨 이유는 뭘까. 그림을 그린 이와 글을 쓴 이를 병기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을까. 이걸 이해하는데 너무 골몰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탐라순력도> 서문은 오씨 노인이 직접 썼기에 글을 쓴 이를 직접 밝히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형상이 써내려간 <병와집>의 ‘탐라순력도서’ 서문엔 <탐라순력도>와 달리 오씨 노인이 등장을 하는데, 왜 오씨 노인이라고만 했을까. 대체 오씨 노인은 누구인가. 이를 두고 오시복이라는 인물이 조명되곤 했다.

오시복은 대정현에 유배를 당한 인물이다. 그는 숙종 27년(1701)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자 궁중에서 복제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물어본 게 화근이 돼 제주까지 유배를 오게 됐다. 마침 그는 이형상과도 교유를 하고 있던 차에 유배지에서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최근 <이형상 제주목사 소장 편지 모음집>으로 발간됐다. 그 편지에 오씨 노인이 오시복임을 알 수 있는 흔적이 등장한다.

“말씀한 서(序)를 쓰려 하니 요즘 기분 나쁜 생각이 들어 붓을 잡을 틈이 없었는데, 조금 기다리면 며칠 사이에 즉시 이에 부응하려 합니다. 인편으로 즉시 드리지 못하여 깊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1703년 5월 19일에 오시복이 이형상에게 써서 보낸 걸로 나온다. <탐라순력도> 서문에 등장하는 죽취일이라는 날짜와는 다소 차이는 있으나 오시복이 <탐라순력도>의 서문을 썼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서문에 오시복이라는 이름을 달지 못한 이유는 자신이 서문을 쓴 이유와 함께 유배를 당한 처지에 있는 인물을 <탐라순력도> 서문에 그대로 옮긴다는 건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은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형상이 쓴 <병와집>에 조차도 오시복이라고 밝히지 못하고, 오씨 노인으로만 그러내고 있을 뿐이다.

탐라순력도의 마지막 그림인 '호연금서'. 이 그림을 합치면 41점이 되지만 탐라순력도 서문에는 40점의 그림으로만 나온다. 이 그림은 탐라순력도 서문을 쓴 오시복과의 연관성을 유추해볼 수 있는 타임캠슐과도 같은 그림이다. 미디어제주
탐라순력도의 마지막 그림인 '호연금서'. 이 그림을 합치면 41점이 되지만 탐라순력도 서문에는 40점의 그림으로만 나온다. 이 그림은 탐라순력도 서문을 쓴 오시복과의 연관성을 유추해볼 수 있는 타임캠슐과도 같은 그림이다. ⓒ미디어제주

마지막 그림 이야기도 해보자. 이형상은 제주를 떠나면서 거문고를 가지고 간다. 이것 역시 오씨 노인이 준 걸로 돼 있으며, 거문고에 새겨진 글씨도 오씨 노인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오시복이 1703년 5월 22일 보낸 편지에 자신이 이형상에 보낸 거문고 얘기가 실려 있다. 거문고에 쓴 글씨가 닳을 수 있으니 금니(金泥)로 잘 메운다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설명이 달려 있다.

그나저나 이형상은 유배의 처지에 있는 오시복을 돌봐주다가 관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관직을 박탈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건 1703년 3월 5일이다. 이후 이형상은 <탐라순력도> 제작에 들어간 것 같으며, 서문을 오시복에게 부탁을 한 모양이다. <탐라순력도>의 41번째 그림인 ‘호연금서’는 이형상과 오시복의 관계를 짐직 가능하게 만드는 그림이다.

‘호연금서(浩然琴書)’는 거문고를 타면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관직을 박탈당해 제주를 떠나는 입장에서 오시복이 거문고를 줬다고 밝힐 상황도 아니었기에 ‘호연금서’를 통해 오시복과의 인연을 강조했는지도 모른다. 마치 타임캡슐에 실린 비밀문서처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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