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6 15:53 (화)
“아주 큰 못이 있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질 않아”
“아주 큰 못이 있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질 않아”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7.12.18 05: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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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개마을 아이들] <6> 서회천을 가다

4.3 이후 재건…회천의 두 마을만 온전하게 회복
큰 못과 방사탑이 있던 터들은 기억으로만 남아
보호수로 지정된 할머니당의 당산목 크기에 감탄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4.3은 많은 걸 앗아갔다. 봉개동 역시 4.3 때 많은 걸 잃은 동네였다. 회천은 봉개동의 북쪽에 있다. 4개 마을로 구성돼 있던 회천은 4.3 때 소개되며 두 마을만 재건된다. 4개 마을은 새가름, 드르생이, 새미, 고는새 등이다. 이들 4개 마을은 다 이어져 있었으나 4.3이후 새미와 고는새만 재건됐다. 새미는 지금의 동회천이 되고, 고는새는 서회천이다.

고는새를 찾았다. 새미는 ‘샘’을 말하는데, 고는새는 ‘가는 샘’이라는 뜻이 된다. 홍성철 서회천마을회장으로부터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서회천의 못대물이 있던 자리. 이 마을에서 가장 큰 공터이다. 지금은 매립돼 흔적이 없다. 미디어제주
서회천의 못대물이 있던 자리. 이 마을에서 가장 큰 공터이다. 지금은 매립돼 흔적이 없다. ⓒ미디어제주

그가 봉개마을 아이들에게 처음 소개준 곳은 마을회관과 가까운 곳에 있는 못대물이라는 자리였다. 마을 자체가 샘과 연결되어서인지 ‘물’이 서회천과도 뗄 수 없는 모양이다.

못대물에서 말하는 못은 말 그대로 연못이다. 대는 크다는 뜻을 지닌 한자어라고 한다. 큰 연못이라는 말이긴 하다. 못대물을 발음하게 되면 ‘못댄물’이 되는데, ‘못을 대다’라고도 읽힌다. 물을 끌여들였다는 의미도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마을회장의 얘기로는 아주 커다란 물통이 있던 자리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서회천으로 들어가면 가장 큰 삼거리가 바로 이곳이다. 포장을 하고, 매립을 해버리는 바람에 옛 흔적은 없다. 크기만 짐작될 뿐이다.

못댄물이 사라진 건 30년 가까이 된다. 홍성철 회장의 얘기로는 1990년대에 매립됐다고 한다. 이유는 있다. 물을 길어다 마실 이유도 없어지고, 도로를 만드는 게 낫다는 주민들의 요구도 있었던 모양이다. 아이들은 궁금해한다. 매립이 좋을까? 그런데 남는 거라곤 사람들 이야기보다는 주차공간으로 변신한 것 뿐인데.

어쨌거나 못대물은 사라졌다. 다시 살릴 수도 없다. 과거에 있었던 곳이라는 기억만 있다. 못댄물의 바깥은 소에게 물을 먹을 때, 안쪽은 사람들이 목욕하는 장소였다고 한다.

홍성철 회장의 안내에 따라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답다니터’라고 한다. 지금의 서회천슈퍼 삼거리가 바로 답다니터다. 아무래도 나쁜 기운을 없애기 위해 방사탑을 쌓았던 모양이다. 흔적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서회천 답사 후 아이들과 지도를 그리며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미디어제주
서회천 답사 후 아이들과 지도를 그리며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미디어제주

홍성철 마을회장은 새로운 이야기도 들려줬다. 종신당이다. 종신당은 ‘일생을 마친 터’라는 의미가 되는데, 아이들이 알리는 없다. 종신당이라면 삼별초와 관련이 있다. 삼별초의 최후였던 김통정에 대한 이야기가 종신당이다. 김통정 어머니가 항파두리성의 함락을 예견하고, 유수암으로 피난을 갔고, 거기서 일생을 마쳤다는 이야기가 바로 종신당이다. 그런데 왜 서회천에 종신당일까.

“새구릉에서 바라보면 언덕이 나와요. 거기에 종신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종신당은 몽골이 쳐들어왔을 때 그들을 막기 위해 기도를 올렸던 장소라고 하는데, 구전으로만 전해져요. 애월에는 종신당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하죠.”

홍성철 회장의 이야기로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만 내려왔단다. 정말 종신당이 있긴 했을까. 역사 이야기를 하니 아이들의 머리가 복잡해진다.

못댄물에서 답다니터를 거쳐, 종신당 이야기를 들었다. 홍성철 회장의 안내에 따라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그런데 온 길을 다시 돌아가야 했다. 왔던 길을 다시 기억에서 꺼낼 수 있어 좋았다. 답다니터, 못댄물을 거쳐 만난 건 열녀비다. ‘이행숙처 열녀비’라고 나온다. 열녀비를 들여다보니 “숭정 후 5번째 병진년에 세웠다”고 나온다. 숭정(崇禎)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연호가 된다. 의종의 재위기간인 서기 1628부터 1644까지를 ‘숭정연간’이라고 한다. ‘숭정 후 5번째 병진년’을 찾아보면, 1916년이 된다. 비를 세운 시점은 일제강점기였음을 알 수 있다. 이행숙 부인은 김씨인데, 손자 기성이 세운 걸로 나와 있다. 그렇다면 김씨 부인은 19세기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서회천 당산목. 봉개마을 아이들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준 곳이다. 미디어제주
어마어마한 크기의 서회천 당산목. 봉개마을 아이들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준 곳이다. ⓒ미디어제주

또 역사 이야기가 나오니, 애들은 관심 밖의 이야기 닮다. 관심을 끌려면 뭔가 특징이 부각돼야 한다. 서회천엔 그런 게 있다. 바로 당산목이다. 할머니당인 이곳은 매년 음력 정월에 길일을 택해 제를 지낸다고 한다. 아이들은 그런 내용보다는 당산목의 크기에 감복했다. 애들이 손을 맞잡고 재어 보니 3명이 나무를 둘러야 하는 크기였다. 역시 역사 이야기보다는 실제 눈으로 보는 게 중요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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