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목사가 정의현으로 갈 때면 항상 쉬어가던 곳이지”
“제주목사가 정의현으로 갈 때면 항상 쉬어가던 곳이지”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7.12.07 0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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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개마을 아이들] <3> 동산가름과 진목동

동산가름은 제주목-정의현 이어주던 쉼터 역할 톡톡
비석거리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사라져 흔적조차 없어
진목동의 커다란 벚나무들도 베어져 기억으로만 남아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동아리 ‘봉개마을 아이들’은 4명이 되기도 하고, 5명이 되기도 한다. 한때는 10명 가까운 인원이 조직돼 있었다. 그런데 중학생들은 왜 그리도 바쁜지, 기자 본인도 바쁘지만 애들을 만나는 건 쉽지 않다. 1주일에 한번 만나는 게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님을 실감한다.

그래도 봉개마을 아이들은 꾸준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기자를 만난 건 지난해였으니 애들이 참 열심히도 한다는 느낌도 든다.

어른들은 참 이상도 하다. “아이들은 아무 것도 모르지”라며 예단을 한다. “아이들이 마을에 대해 뭘 알겠어?”라는 선입견은 물론 기본이다. 그러나 봉개마을 아이들을 향해 여느 마을의 아이들처럼 “마을을 잘 모르겠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생각 외로 마을을 잘 이해한다. 관심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주변 어른들의 덕분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오간다. 어쨌든 마을을 이해하는 아이들이 있어서 좋다.

봉개마을 큰동네는 본동이라고도 한다. 봉개동의 중심지역이다. 봉개마을 아이들이랑 큰동네의 동쪽에 위치한 동산가름에 들렀다. 동산가름은 역사적으로 의미를 지닌 곳이다.

예전, 그러니까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탐라라는 이름을 가진 제주도에 큰 변화가 생긴 건 조선에 들어오면서다. 성주와 왕자라는 직위를 내려놓는다. 이유는 스스로가 그 직위가 과분하다고 해서이다. 정말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역사서에만 그렇게 나온다. 이후로 제주도는 삼읍체제가 된다. 제주목사가 있던 제주목이 있고, 정의현, 대정현 등이 구성된다. 제주도가 삼읍이 됐다는 건 진정으로 조선에 편입된 걸 말한다. 거꾸로 말하면 탐라의 종말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봉개동 동산가름은 그런 삼읍체제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이다. 제주목사가 지금의 표선면 일대를 가려면 봉개를 거쳤던 모양이다. 지금은 표선면이지만 예전은 표선면 성읍리에 정의현청이 있는 큰 마을이었다. 제주목사도 그렇고, 정의현으로 가려는 사람들은 늘 지친 발걸음을 쉬는 곳이 바로 동산가름이었다고 한다.

현재 동산가름은 다른 곳에 비해 지형이 좀 높은 걸 보면 쉬어가라고 정자라도 있었던 건 아닐까 유추해본다. 정자가 존재했다고 말하는 이들은 없지만.

봉개마을 아이들에게 예전 이야기를 들려주던 고한구 어르신은 동산가름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고한구 어르신이 동아리 '봉개마을 아이들'이랑 대화를 나누고 있다. 미디어제주
고한구 어르신이 동아리 '봉개마을 아이들'이랑 대화를 나누고 있다. ⓒ미디어제주
봉개동 큰동네 동산가름의 중요성을 설명듣고 있는 봉개마을 아이들. 미디어제주
봉개동 큰동네 동산가름의 중요성을 설명듣고 있는 봉개마을 아이들. ⓒ미디어제주

“옛날 제주도 목사로 온 사람이 순시를 나갈 때 정의를 먼저 가는데 봉개를 꼭 거쳤어. 여기가 바로 삼거리인데 사람들이 앉아서 쉬어갔지.”

동산가름은 약속장소였다. 정의현에서 오는 사람도 동산가름에서 쉬었다 가고, 제주목을 출발한 이도 반드시 여기서 쉬어갔다. 고한구 어르신은 윗대부터 전해온 이야기를 들려줬다.

“목사가 와서 쉰다고 하니까 한번은 동네 어른이 와서 대화를 나눴다고 하지. 그 기념으로 여기에 비를 세웠다고 해.”

알고보니 동산가름은 봉개동 비석거리의 시초였다. 관리들이 자주 다니던 곳은 비석을 줄줄이 세워두는 비석거리가 있기 마련인데, 봉개동 동산가름도 그런 비석들이 줄을 섰던 모양이다. 그런데 웬걸? 비석은 단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비석이 5개가 있었지. 목사가 지나간 흔적이기도 했는데 말이야.”

고한구 어르신은 ‘복구주택’이라는 말을 꺼냈다. 복구주택을 지으면서 비석거리의 비석들을 가져다 썼다고 전했다. 봉개동 일대엔 그런 복구주택도 있다. 고한구 어르신은 잃어버린 비석을 찾으려 애를 썼다. 1990년 자신이 통장을 할 때 이야기다.

“여기에 식당을 짓는다고 하길래 통민들에게 비석이 나오면 연락을 해달라고 했어. 나중에 하나가 발견됐는데 글 위에 시멘트를 발랐더라고. 보존한답시고 감나무 아래 묻어뒀는데 4년 후에 보니 사라졌어. 몇 십년 후에 보니까 양씨 선묘에 그 비가 세워져 있다고 하더군. 비석거리라면 비석이 있어야 하는데 없어서 참 아쉬워.”

본동 이야기는 이만하고, 진목동 이야기를 조금 해볼까 한다. 진목동은 촘낭가름이라고 부른다. 촘낭을 한자로 옮기면 진목(眞木)이 된다. 그래서 진목동인 모양이다.

진목동은 커다란 나무들이 있었으니 지금은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미디어제주
진목동은 커다란 나무들이 있었으니 지금은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미디어제주

진목동 삼거리는 팽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북쪽으로는 회천으로 향하고, 이 나무 서쪽은 너벅빌레라고 부른다. 아주 너른 돌밭이 조성돼 있는가보다. 서쪽엔 마우릉이 있다. 예전에 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매립돼 물은 사라지고 작은 공원이 있다.

진목동에서 회천으로 향하는 길에 큰 벚나무 2개가 또한 있었다고 한다. 벚나무를 제주에서는 ‘사오기’라고도 하기도, ‘사옥낭’이라고도 해서인지 이 거리를 사옥낭거리라고 부른다고 고한구 어르신이 전해줬다.

정작 사옥낭거리에서 큰 벚나무 두 그루를 만날 수 없다. 얼마나 컸던지 20평을 그늘지게 했다고 한다. 봄이 오면 벚나무의 눈꽃을 보러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다고 하는데, 그 흔적을 모르겠다. 큰동네에 있던 나무와 얽힌 전설처럼 진목동의 나무들도 기억으로만 존재한다니 아쉽다. 봉개마을 아이들은 아쉬움을 뒤로 할 수밖에 없었다. 사라진다는 게 이렇게 아쉬울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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