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4 12:47 (수)
“아~ 우리 마을에 조상의 흔적이 있었더라면”
“아~ 우리 마을에 조상의 흔적이 있었더라면”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7.11.15 15: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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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개마을 아이들] <2> 큰동네를 둘러보다

제주4.3의 아픈 기억은 봉개동에도 많은 것을 앗아가
‘봉개초등학교’와 ‘봉개공립학교’ 팻말 함께 내걸리기도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솔직히 말하면 ‘봉개마을 아이들’을 구성한지는 좀 됐다고 봐야겠다. 봉개지역 마을신문인 <봉개엔>이 만들어지면서 여기에 글을 쓰는 청소년기자들이 조직됐고, 이들을 중심으로 ‘봉개마을 아이들’이라는 동아리가 움직이고 있다. 지난해부터 봉개 지역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 초·중학생들이 마을 알아가기 도전을 하고 있던 셈이다.

구성원은 몇 되지 않지만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동네를 알아가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고 마을 탐방에 나서고 있다. ‘봉개마을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 가운데 중학생이 중심에 있다.

봉개마을 아이들은 지난 여름방학 때부터 마을 알기를 실천하고 있다. 마을 곳곳을 샅샅이 훑고 있다.

봉개마을 아이들은 봉개동의 여러 마을 가운데 두 차례에 걸쳐 봉개 본동을 둘러볼 기회를 잡았다. 이 지역을 알려주는 일은 제주유교문화발전연구원 의례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는 고한구 어르신이 해줬다.

봉개 본동은 번영로를 기준으로 한라산쪽으로 큰동네가 있고, 바닷가쪽으로 진목동이 있다.

고한구 어르신이 봉개초등학교 전신인 동고서당 터를 가리키고 있다. 현재 봉개초등학교 동쪽에 위치해 있다. 미디어제주
고한구 어르신이 봉개초등학교 전신인 동고서당 터를 가리키고 있다. 현재 봉개초등학교 동쪽에 위치해 있다. ⓒ미디어제주

우선 큰동네를 살펴보자. 큰동네는 봉개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다. 봉개초등학교 전신인 동고서당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동고서당은 1936년까지 운영됐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1939년부터는 일본식 교육을 받게 됐다고 어르신은 전한다.

초등학교가 탄생한 건 해방이 되면서다. 1945년 9월 9일 봉개국민학교라는 이름으로 인가를 받는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있다. 당시 ‘봉개국민학교’와 ‘봉개공립학교’라는 팻말 두 개가 학교 정문에 내걸렸다고 한다. 정문 왼쪽엔 공립학교, 오른쪽은 국민학교라는 팻말이 있었다고 어르신이 전했다. 봉개마을 아이들의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갸우뚱할 건 또 있다. 어르신 얘기로는 현재 봉개초등학교 연혁이 잘못돼 있단다. 초대 교장은 김순겸이라고 돼 있으나 그는 1949년에 봉개초등학교에 부임했다고 한다. 어르신 얘기로는 초등학교 인가는 떨어졌으나 선생이 오지 않아 마을에서 똑똑한 청년인 김응대를 강사로 추대했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봉개마을 아이들이 초등학교 연혁을 바로 세워야 될 듯싶다.

고한구 어르신은 갓 인가를 받은 봉개초등학교 운영이 쉽지 않았다고 말한다. 1947년 휴교를 해야 했고 1948년이 되어서야 활기를 띠게 됐다고 한다. 그 해 8월인가 9월에 이왕우 교장이 오고, 한달이 지나서 김상수 선생이 왔다. 김상수 선생은 ‘해방의 노래’와 ‘조선역사의 노래’를 배워준 인물이라고 고한구 어르신은 기억한다.

그러나 4.3은 이들 교사를 죽임으로 내몰았다. 이왕우 교장과 그의 장인이 죽임을 당하고, 김상수 교사는 간신히 피해 달아났으나 책을 가지러 왔다가 뭇매를 맞고 죽었다고 한다.

4.3은 아픈 역사이다. 솔직히 봉개마을 아이들에겐 잘 와닿지를 않는다. 오히려 봉개마을 아이들에겐 전설이 끌린다. 전설은 수령이 400년을 넘은 나무에 얽힌 이야기다.

봉개 큰동네엔 정자거리왓이라는 밭이 있다. 정자거리왓이라면 어디쯤엔가 정자도 있었던 모양이다. 여기에 큰 폭낭(팽나무)이 자리잡고 있었다.

예전 사람들은 공기 맑고 산도 좋고, 물이 있으면 정자를 짓는다. 여러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 정자였다. 고한구 어르신은 커다란 나무가 있어서 그렇게 부른 게 아닌가라는 의견을 내비쳤다. 바로 400년에서 500년은 된 나무에 얽힌 이야기다.

지금 그 나무는 없다. 고한구 어르신은 나무는 사라졌으나 전설같은 이야기를 읊었다.

“가지는 세 개였고, 그 갈라진 중심에 물이 고이는데 약이 없을 땐 그 물을 떠서 마시면 감기와 설사가 낫는다고 했지. 비가 오려면 아침 새벽이나 밤중에 자장가 소리가 이 나무에서 들린다고도 했어. 자장자장 소리가 들리는데 3일내에 비가 온다고 했지.”

4.3은 봉개초등학교에서 상처를 입혔는데, 이 팽나무에도 상처를 줬다. 나무를 아예 베어버렸다고 한다. 마을이 소개되고 어느정도 안정이 된 후 마을에 돌아온 봉개사람들은 삶을 위해 그 나무를 베어 숯을 만들어 팔았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봉개 큰동네엔 예전의 흔적을 찾기가 무척 힘들다. 봉개마을 아이들은 큰동네를 둘러보며 아쉬움이 컸다. 전설이 아니라 실제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은 봉개마을 아이들이 둘러본 봉개 본동 동산가름과 진목동 이야기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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