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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태에 빠진 여대생...또다시 '격렬시위'
폭력추방 단체 등장...'제주국본' 결성
중태에 빠진 여대생...또다시 '격렬시위'
폭력추방 단체 등장...'제주국본' 결성
  • 윤철수 기자
  • 승인 2007.07.29 10:04
  •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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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
[16-마지막회] 1987년 '김윤삼 부상사건'과 '제주국본' 결성

1987년 6월, 최루가스의 따가운 눈물 속에서도 목놓아 외쳤던 '호헌철폐!'와 '독재타도!'.
그 함성은 제주의 여름도 뜨겁게 달궜습니다. 광양로터리에서 중앙로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은 식을 줄 몰랐고, 침묵하던 이들의 박수도 터져나왔습니다.

그 뜨거운 함성이 있었기에,  민주주의의 성과와 보람은 더욱 값지게 다가옵니다. 이제 세월은 흘러, 함성의 울림은 기억의 저편에 머물러 있지만, 6월항쟁의 정신은 오늘에 이어져 제주사회의 새로운 변혁의 동력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미디어제주는 6월항쟁 20주년을 기념해 제주민주화 운동사(史)를 재조명해보는 차원에서 <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를 연재 보도하였습니다.

이 특별기획은 제주지역 민주화운동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1985년부터 1987년 6-7월항쟁의 절정기를 시간적 범주로 하여 보도되었습니다. 각 연재물은 당시 언론보도 등을 통해 알려졌던 사건을 중심으로 기획되었으며, 사건 당사자의 기억을 통하여 당시 사건의 실체를 조명해보고, 현재적 의의를 모색해 보고자 했습니다. 오늘 그 마지막회를 보도합니다.  <미디어제주>

 

 [16-마지막회] 1987년 '김윤삼 부상사건'과 '제주국본' 결성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 시인>

 

1987년 6월29일. 무섭게 타오른 전 국민적 시민저항에 전두환 정권은 마침내 항복선언이나 다름없는 '6.29선언'을 하게 된다. 정권은 벼랑 끝에 몰렸고, 민주화는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국민적 대세였다. '6.29선언'은 국민의 힘으로 정권으로부터 사실상의 '항복'을 받아낸 위대한 '국민승리'였다.

그러나 국민시위는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987년 6월9일 연세대 앞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군이 산소호흡기로 27일을 버티다 끝내 숨을 거뒀다. 그의 장례는 7월9일 거행됐다. 전국에서 150만명이라는 경이적인 추모인파가 몰렸다.

제주에서도 이한열 열사 추모행사가 열렸다. 제주대학교 총학생회는 영결식 하루전날인 7월8일 학생회관 1층 로비에 이한열 열사 추모를 위한 분향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민주헌법쟁취 제주대추진위원회 주최로 학생회관 앞 마당터에서 학생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故 이한열 열사 추모식'을 거행했다.

故 이한열 열사 추모식 거행
학생회관내에 분향소도 설치

'고 이한열 열사 추모식'이 지난 8일 오후 2시에 민주헌법쟁취 제대추진위원회 주최로 학생회관 앞 마당터에서 학생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추모식은 서창우 부위원장의 사회로 고 이한열 열사의 약력소개를 시작으로 국민의례 및 묵념, 사건일지 보고와 추모시 낭송, 일간지를 통한 최루탄 부상 사례발표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한편 '민헌위'는 8일 오후부터 학생회관 1층 로비에 이한열 열사 추모를 위한 분향소를 설치했다.
<제대신문 1987년 7월10일자>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한열 열사 영결식이 열리던 7월9일에는 제주에서 전국 동시다발적 시위가 열리지 못한다. 이 부분에 대해 송형관 당시 총학생회장은 "6월항쟁 이후 학과별 기말시험이 이뤄지면서 제주에서는 전국 일정을 맞추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제주대학교 총학생회는 대신 이틀 후인 7월11일 오후 7시께 '고 이한열 열사 추모 및 살인정권규탄대회'를 제주시 중앙로에서 개최하기 위해 가두진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를 가로막는 경찰과 충돌하면서 최루탄과 투석전이 벌어졌다. 최루탄과 페퍼포그로 중무장한 경찰은 강력한 대응에 나서며 학생들을 연행하기 시작했고, 학생들은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격렬히 맞섰다.

당시 경찰은 공항경비대 소속 테러진압반까지 투입하며 무리하게 진압에 나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찰은 이날 시위과정에서 학생 3명과 시민 2명, 경찰 24명(경찰집계)이 부상했다고 발표했다. 또 시위대에 의해 동문파출소 일부 유리창과 경찰수송차량 2대의 유리창도 부서졌으며 시위학생의 화염병으로 전경 1명이 화상을 입었고 전경 3명이 돌에 맞아 두부파열 등으로 제주의료원에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제주일보 1987년 7월13일자 보도) 경찰의 발표는 철저하게 공권력 중심으로 이뤄졌다. 시위학생의 부상이나 강제연행 학생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경찰발표 내용이 어느정도 신뢰성이 있는지는 둘째치고, 시위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시위는 밤이 깊을 수록 더욱 격렬해졌다.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11일 밤, 제주시 동문로터리 당시 조흥은행 앞 보도에서 시위를 마치고 서 있던 김윤삼 양(당시 제주대 법학과 4년)이 한 전경이 던진 벽돌에 오른쪽 얼굴을 맞아 중태에 빠진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상황을 종합해보면 사건은 시위가 마무리되고 해산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시위가 끝난 후 김윤삼 양은 일반 시민들과 함께 나란히 서 있었다. 그 앞에 전경들이 철수를 하면서 전경버스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이 때 김윤삼 양 바로 옆에 서 있던 한 남학생이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지하상가 공사관계로 주변에 있었던 벽돌을 집어들고 전경들을 향해 던졌다. 이에 전경은 그 벽돌을 집어들고 그 학생 쪽으로 던졌는데, 이게 공교롭게도 김윤삼 양의 얼굴에 날아들었다.

벽돌을 맞은 김윤삼 양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리고 곧바로 제주의료원으로 옮겨졌다. 며칠 후 그는 서울대학교병원 이비인후과병동으로 이송돼 수술에 들어갔다. 제주신문은 1987년 7월13일자 보도에서 "동문로터리 조흥은행 앞 인도에서 시위를 구경하던 김윤삼 양(제주대 법과 4년)이 돌에 오른쪽 얼굴을 맞아 중상, 제주의료원에 입원 가료 중"이라며 당시 현장에 있던 시민들의 목격담을 전했다. 시민들은 "시위대에서 던진 깨진 벽돌이 경찰수송버스에 맞아 떨어졌는데 이 때 차에 오르려던 전경 중 1명이 그 돌을 시위대 쪽으로 던지는 순간 김양이 쓰러졌다"고 말했다.

제주대생 격렬시위
이한열군 추모, 화염병과 최루탄 공방 벌여
11일 하오부터 12일 새벽사이

제주대학생 2백여명은 12일 새벽까지 제주시내 주요 간선도로에서 고 이한열군 추모 및 정부규탄가두시위를 산발적으로 벌였다.
시위대는 11일 하오 7시께 중앙로에 진출하려다 경찰과 대치, 경찰이 일부 학생을 연행하자 투석으로 맞섰으며 시위는 밤이 깊을 수록 더욱 격렬, 화염병과 최루탄으로 공방전을 벌이다 12일 새벽 6시께 연행학생 7명이 풀려 나오자 자진 해산했다.
이날 시위과정에서 학생 3명과 시민 2명, 경찰 24명(경찰집계)이 부상했다.
이날 시위대에 의해 동문파출소 일부 유리창과 경찰수송차량 2대의 유리창도 부서졌으며 시위학생의 화염병으로 전경 1명이 화상을 입었고 전경 3명이 돌에 맞아 두부파열 등으로 제주의료원에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또한 동문로터리 조흥은행 앞 인도에서 시위를 구경하던 김윤삼양(제주대 법과 4년)이 돌에 오른쪽 얼굴을 맞아 중상, 제주의료원에 입원 가료중이다.
현장에 있던 시민들은 "시위대에서 던진 깨진 벽돌이 경찰수송버스에 맞아 떨어졌는데 이 때 차에 오르려던 전경 중 1명이 그 돌을 시위대 쪽으로 던지는 순간 김양이 쓰러졌다"고 말했다.<제주신문 1987년 7월13일자>


이 사건은 6.29선언의 허구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사건으로 규정됐다. 제주대학교 사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김태완 군등 7명은 7월16일 서울로 급히 상경해 서울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내 한국기독교회협의회 인권위 사무실을 찾아 이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는 경찰의 사과 및 현장지휘 책임자의 처벌 등을 요구하며 철야농성을 벌였다. 이 상경농성은 '폭력 추방'을 전국적 이슈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들 상경학생들의 농성이 계속되자 제주출신 재경인사들은 '재경 제주도민 경찰폭력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제주도민의 민주시위에 대한 경찰폭력사태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한다. 이들은 성명에서 "정부당국은 상경농성 중인 제주대생들의 요구사항을 적극 수렴하여 이 사태를 조속히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또 "우리는 민주화를 갈망하는 50만 제주도민과 함께 이 사건의 해결과정을 주시할 것이며,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하겠다"며 "모든 재경 제주도민은 이 사태해결에 적극 동참할 것을 당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전경이 투석 여대생 중상"
제대생 7명 상경, 처벌요구

제주대 김태완군(21. 사학 4) 등 제주대생 7명은 16일 하오 6시부터 서울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내 한국기독교회협의회 인권위사무실에서 최근 제주시내에서의 가두시위 도중 전경이 던진 돌에 동료학생 김윤삼양(24. 법과4)이 부상했다고 주장, 경찰의 사과 및 현장지휘 책임자의 처벌 등을 요구하며 철야농성을 벌였다.
학생들의 주장에 따르면 김양은 지난 11일 제주시내 동문로터리 시위현장에서 전경이 시위대를 향해 던진 돌에 오른쪽 눈을 맞아 얼굴뼈가 금가고 치아가 부러지는 등의 중상을 입었다는 것.
김양은 부상후 시민들에 의해 시내 제주의료원으로 옮겨졌으며 16일부터 서울대병원 이비인후과병동에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연합]
<제주신문 1987년 7월17일자>


제주대 학생들은 방학기간임에도 불구하고 7월17일부터 18일 새벽까지 제주시 중앙로와 중앙성당 앞 길 등에서 '폭력경찰 물러나라'를 플래카드를 내걸고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 제주에서는 처음으로  사회인사를 중심으로 한 첫 단체가 결성됐다. 이른바 '폭력추방을 위한 애국도민대책위원회'가 그것이다. 대책위는 중앙성당 옥상 등에서 횃불시위와 함께 농성을 벌이며 '폭력경찰 추방'과 경찰 책임자 사과를 촉구했다. 이들은 18일 새벽 중앙성당에서의 농성을 끝낸 후 제주시 연동교회로 장소를 옮겨 농성을 계속한다.

제주대생 가두시위
제주대학생 1백여명은 17일 하오부터 18일 새벽까지 중앙로와 중앙성당앞 길 등에서 "폭력경찰 물러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지난 11일 제주시 동문로터리에서 있은 대학생 시위중 부상한 김윤삼양(22. 제주대 법학 4년)이 전경의 투석으로 부상했다고 주장, 경찰측의 사과와 관계자 처벌을 요구했는데 18일 새벽 2시께 중앙성당 마당에 들어가 농성을 벌이다 이날 새벽 6시10분께 자진 해산했다.
또한 이보다 앞서 17일 상오 11시께부터 중앙성당내 가톨릭회관 옥상 등에서 농성을 벌였던 오만식씨(29) 등 폭력추방을 위한 애국도민대책위원회 회원 11명도 18일 새벽 농성을 풀고 귀가했다.
<제주신문 1987년 7월18일자>


그리고 19일 낮 12시30분 연동교회에서 민주헌법쟁취 제주대학교추진위원회(위원장 송형관), 폭력추방을 위한 애국도민대책위원회(위원장 이지훈), 폭력추방을 위한 애국학생대책협의회(회장 박성룡) 등이 참여한 가운데 공동대책위원회가 결성된다. 공동대책위원회는 △치안본부장 공식사과 △도경국장 파면 △김윤삼 양 치료비 보상 등 5개항을 요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발표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공식사과가 이뤄지지 않자 제주대학교 총학생회는 7월20일 제주시 중심가에서 '폭력경찰 몰아내자'는 구호를 외치며 자정까지 평화적 시위를 벌인다. 20일에 이어 21일에도 오후 7시부터 자정까지 연좌시위를 벌인다.

이러한 가운데 공동대책위는 농성을 하면서 <민주제주>라는 긴급 뉴스를 7회에 걸쳐 제작해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민주제주>에서는 '폭력진상 규명하여 도민화합 이룩하자', '민주정부 수립하여 민주주의 꽃피우자' 등의 구호와 함께 경찰서장의 공개사과를 강력히 촉구했다.

#중재위원회, 경찰과 학생에 입장조율...마침내 경찰 '사과'

이윽고 7월21일, 제주도인권선교위원회(대표 모갑경 목사)를 비롯한 제주도교회사회선교협의회(대표 석준복 목사), 제주지역정의구현사제단(대표 홍충수 신부), 민주화를 위한 제주대학교 교수협의회(대표 고창훈 교수) 등은 폭력추방을 위한 제주도민 중재위원회를 결성했다. 중재위원회는 제주대 총학생회와 제주도경찰국, 제주경찰서에 김윤삼 양 부상사건에 대한 의견서를 발송했다.

이 의견서에서는 부상사건에 따른 학생들과 시민들의 농성과 시위가 계속됨에 따라 신속한 수습을 위해 원인과 사실을 규명해 의혹을 불식하는 한편 김윤삼 양에 대한 진단결과, 치료기간, 치료경비 등 모든 상황이 공표되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또 관계기관은 학생들과 시민들의 정당한 요구를 신속히 수렴하라고 촉구했다. 또한 학생들에게는 비극적인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서 이성적으로 대처하기 바라며 가족(김윤삼양의 가족)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할 것을 당부한다.

이 의견서가 발송된 후 며칠 후인 7월26일 낮 12시30분쯤 농성이 계속되고 있는 연동교회에서 경찰측의 입장이 발표된다. 경찰측은 김윤삼 양 부상사건과 관련해 학생과 시민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고, 8월12일까지 진상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경찰측은 또 조사결과에 대해 공개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있으며 김윤삼 양의 치료비 일체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학생측은 7월11일 사건 이후 도민들에게 불편을 드린 점에 대해 심히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중재위는 경찰과 학생측의 이러한 한발 물러선 입장을 바탕으로 5개항의 중재내용을 발표했다.

이에 9일간 철야농성을 벌이던 중재위는 '농성을 해제하면서'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7월26일 농성을 풀고 자진 해산한다. 결국 이 사건은 연일 계속된 시위와 농성으로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는 학생측 입장과 맞물려 경찰의 사과로 일단락된다.

#사건 계기로 '학외 인사' 중심 조직 구성...9월 '제주국본' 결성

김윤삼 양 부상사건은 제주 민주화운동사의 측면에서 볼때 '학생 중심'이던 민주화운동에 '학외 인사'가 동참하는 전환점이 됐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 부문별 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 결과 8월23일 '제주문화운동협의회'가 출범했다. 그리고 8월31일 '민주쟁취국민운동제주본부'(제주국본) 발기인대회를 갖는다.

제주국본은 9월6일 제주YMCA강당에서 결성대회를 갖는다. 이 제주국본은 6월항쟁과 김윤삼 양 부상사건을 거치면서 제주지역 민주인사들이 학내 후배와의 인적인 관계를 정리하고 공개적인 통합사회운동 조직의 건설에 대승적으로 합의한 결과물이었다. 이후 1987년 9월26일 성산포 천주교회에 동제주지부가, 10월17일 서귀포 천주교 복자교회에 서귀포지부가, 10월24일 대정읍 모슬포 천주교회에 서제주지부가 각각 결성됐다.

제주국본의 조직 결성의의에 대해 박찬식(2007, '제주의 6월항쟁', 6월 민주항쟁 20년사업 제주보고서)은이렇게 정리한다.
첫째, 고립분산적이었던 운동역량을 모아 체계적인 조직을 만든 점, 둘째 양심적 차원의 애국인사들과 청년학생들의 만남 속에서 과학성.이념성이 고조되었다는 점, 셋째 노동자.농민.도시빈민 등에 대한 지원, 연대가 체계적으로 이뤄지게 되었다는 점, 넷째 소수의 관념적 운동이 아니라 애국적 차원의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

제주국본은 1987년 12월 실시된 군부독재 종식을 위한 공정선거감시운동에 돌입하여 활동을 전개했는데, 이후 탑동불법 매립 반대운동, 새한병원 투쟁, 제주MBC 개표조작 사건, 모슬포 송악산 군사기지 설치반대운동 등에 적극 참여해 투쟁을 전개한다. 또 정치투쟁 뿐만 아니라지역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참여를 하는데, '한라시민학교'를 개설해 운영하고 기관지로 <제주의 소리>를 발행하기도 했다.

#8월 전대협 출범식에 송형관 제주대 총학생회장 참가

한편 전국적인 상황을 되살펴 보면 6월항쟁 이후 가장 두드러진 사회현상이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이다. 6월항쟁 이후 노동자들도 그동안 독재정권 하에서 빼앗긴 권리를 되찾기 위한 투쟁에 나선다. 6.29 이후 9월 말까지 발생한 노동쟁의는 총 3,241건으로 하루 평균 44건을 기록했다. 1980년 민주화의 봄 기간 동안의 6배가 넘는 수치였다. 1987년 6월 말 2,449개 단위노조에, 조합원 수 90만 6천 명이던 한국노총은 1988년 6월 말 5,062개 단위노조에, 조합원수 151만명으로 성장했다.

학생운동에 있어서도 조직적 발전이 있었다. 1987년 8월19일 충남대에서 전국 95개 대학 학생들이 '구국의 강철대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을 결성한 것이다. 이 전대협 출범식에는 제주에서 송형관 제주대 총학생회장이 직접 참석하며, 제주대학교 총학생회가 공식적으로 전대협에 가입하게 된다. 전대협은 1992년까지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며 군사정권을 종식시키는 최강의 조직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1993년 '한총련'으로 그 맥을 잇게 한다.

이처럼 6월항쟁의 승리는 사회 각 분야에서 많은 변화와 함께 민주화운동의 조직적 성장을 꾀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그해 12월 선거에서는 양 김씨의 분열로 인해 후보단일화에 실패하면서 전두환과 함께 12.12 군사쿠데타와 광주학살의 주역인 노태우에게 뼈아픈 패배를 당한다. 하지만 그해 12월 대선패배는 민주운동사에 있어 큰 교훈을 주었다. 바야흐로 '통일단결'을 기치로 한 자주, 민주, 통일운동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미디어제주>

이후 각종 집회에 참여할 때에는 되도록 얼굴이 노출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해졌다.
"한번 아버지에게 의심을 산 이후에는 집회에 참가하면서 많이 신경썼어요. 얼굴에 마스크도 하고, 평소 쓰고 다니던 안경도 벗어버리고, 묶어 다니던 머리도 풀어버리고, 사건이 있던 7월11일 그 때도 그렇게 하고 참가한거죠."

7월11일 시위 때, 김윤삼씨도 시위 대열 속에서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사건은 싸움이 끝난 후, 전경들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일반 시민들과 함께 조흥은행 앞 보도에 서 있었는데, 옆에 있던 한 남학생이 지하상가 공사를 하면서 놔둔 벽돌을 집어들고 버스에 올라타는 전경들을 향해서 던진 것이다.

"시위대는 이미 해산된 상황이었어요. 그 때 제 옆에 서 있던 남학생이 기분이 좀 그랬던 모양이에요. 벽돌을 집더니만 전경쪽으로 던졌어요. 그러자 한 전경이 그 벽돌을 다시 집어들어 우리 쪽으로 던졌는데, 그 벽돌이 저에게 날아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순간 정신을 잃었어요."

얼굴이 함몰되는 큰 부상을 당한 그는 병원으로 후송되는 극도로 긴박한 상황에서도 남다른 정신력을 발휘했다. 후송되는 과정에서 다시 정신을 차려 친구를 찾은 것이다. 그는 친구에게 자기 집으로 가서 방안에 있는 사회과학서적 등을 다른 곳으로 빨리 옮겨달라고 부탁한다. 지금까지 시위에 참여한 적이 없다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해온 터라 이번 사건으로 모든 것이 들통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의식이 있었어요.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친구를 불렀어요. '집에 책이 정리 안된게 있으니까 그걸 딴데로 옮겨달라'고 부탁했죠."

처음 제주의료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은 그는 중태였다. 한쪽 부위가 함몰될 정도였고, 이빨도 성치 않았다. 서울대학교 이비인후과병동으로 옮겨진 그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받지 않을 경우 이마부위가 함몰된 상태로 남게 된다는 주위의 걱정 때문에 서울로 옮겨진 것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비가 오는 날 같은 때에는 머리 한쪽이 아파오기도 했죠.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을 뿐이예요."

그는 한두달 후 병원을 퇴원한 후, 다시 학교에 다닌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8년 졸업을 했다. 졸업 후 여성운동에 참여하다가 제주은행에 입사한다. 1991년 강원철씨(현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의원)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는다. 제주은행은 2000년 퇴사했으며, 2001년 정부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식 인정받았다. 자녀로는 고등학교 1학년인 딸 지은이와 중학교 1학년인 아들 지우를 두고 있다.

2007년 6월, 6월항쟁 20주년을 맞아 특별제작된 오영덕 감독의 다큐멘터리 '6월나무'에서 그는 20년간 마음 속에 꼭꼭 숨겨두었던 당시 사건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 다큐멘터리가 공개되던 날 그는 남편 강원철 의원과 함께 시사회장을 찾았다. 오영덕 감독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인터뷰에 응해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용기를 내어 인터뷰를 해줘 너무 감사드린다"며 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주부 김윤삼씨는 군사독재정권 시절 '용기있는 싸움'을 했던 그 과정은 뒤로하고, 현재 시민운동 등을 통해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들을 격려하는 말로 6월항쟁 20년을 맞는 심경을 대신했다.
"용기있게 시민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치고 싶어요. 제가 하지 못하니까요.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인데,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묵묵히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칭찬해 주고 싶어요."


* 이 기사의 내용과 관련하여 다른 의견을 갖고 있거나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고 생각되시는 분들의 적극적인 의견 개진 바랍니다.<미디어제주 편집국, 전화 725-3456>

** 이번 <16편>을 마지막으로 <6월항쟁 20주년 기념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를 모두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소장사진 및 사료 제공, 그리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여 주신 분들의 도움에 감사를 드립니다.

*** 지금까지 연재되었던 내용들을 중심으로 하여 2007년 8월 중 책자 <제주민주화운동사-타는 목마름으로> 발간할 예정입니다. 책자 발간에 앞서, 지금까지 연재되었던 내용들 중 사실과 다르거나, 수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가지신 분들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책자 및 기사의 1차적 저작권은 저자인 윤철수, 그리고 기사 및 책 속에 담긴 사진콘텐츠는 서귀포6월항쟁기념사회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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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 2007-08-07 15:54:29
이 기사에 만점을 주고 싶습니다. 운동권출신들도 잘 모르던 내용 상세히 취재해 기록하는 미디어제주 특별기획은 대상감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책이 나오면 한권 주실라나...

한마디 2007-08-06 13:40:01
한나라당님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너무 이분법적 사고 아닌가요. 이미 과거 민주와 반민주의 구분점은 사라졌지 않습니까. 그리고 요즘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지, 어느 소속인지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한나라당이면 창피하고, 노무현 꼬봉이면 자랑스러워 해야 합니다. 참평포럼가입하면 아주 어깨가 으쓱해져야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변절한 겁니까?
시민운동하면 아주 잘났고, 묵묵히 자기일을 하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

한나라당 2007-08-06 12:57:57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던 6월항쟁의 마지막 사진은 결국
그 독재정권의 산물인 한나라당의 제주도의원 가족사진이네요
시민단체에서 일하다가 한나라당으로 출마한걸로 아는데
이게 제주6월항쟁20년의 현주소 아닌가 싶네요
씁쓸합니다.
6월정신도 없어졌지만 한나라당이라해도 창피한줄 모르고
영웅시하면서 얼굴을 들이미는 현실...
이건 정말 잘못된 현실 아니지요?

의견 2007-08-05 08:38:17
미디어제주 특별기획 타늠목마름으로 잘 일ㄺ었습니다. 88년 통일투쟁 이후 사건에 대해서도 한번 조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훌륭한 기획입니다.
다른 신문과의 차별성이 돋보입니다.
짝짝짝~

섬사람 2007-08-02 15:04:29
강원철의원님 김윤삼님
비록 기사를 통한 만남이지만 반갑습니다.
온 가족이 늘 향복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