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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수형생존자 증언록
4.3 수형생존자 증언록
  • 미디어제주
  • 승인 2007.07.26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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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대문) 형무소

▲강순현(83, 姜淳現) : 2000년 2월 24일, 용담2동 자택에서 채록

그래서 이제 차로 실러가기에 난 육지로만 가는가 생각을 했더니 나 혼자 다들 총살시기고 다 뭐허면서들 해서. 가는 게 그 제주경찰서 거간 혼자 나를 가뒀단 말이야. “왜 이럽니까” 하니까 거기에 거세기 허는 경감도 모르고. “저희도 모르겠습니다”고, “여기에 이렇게 이분 여기서 가둬서 뭐해야 된다고 해서 육지엔 안가고. 그래서 나 생각으로는 육지에 안가는거 보니 여기서 총살시킬려고 하는 게 아닌가 내 추측으로.

겐디 그것도 아니고, 거기서 한 일개월 거의 있으니까 송요찬이가 육지에 가면서 뭐라고 위에서 지시가 내려오는지 모르지만 “강순현이 육지로 전부 이송하라”고 말이여. 그래서 그때에 겨울 아주 추을 때주. 막 눈이 쌓이고, 아주 추울 땐데... 48년 겨울인데...

배로 실러 가가지고 상륙헌게 목포더구만. 목포 간보니까 목포 형무소로 이감허라... 나는 그럼 목포형무소로 이감하는가? 겐데 나에게 뭔 죄가 이서서 그렇게 허느냐... 건 자기네는 모른다고. 우리 군부에서 허는 일이니까 뭐 알수가 있나... 허라는 대로 지시하는 대로 자기네는 움직인거 뿐이라 해서. 목포형무소 간 보니까, 아이구 이젠 이름들도 다 잊어 부렸네... 이 묵은성에 강창호 농업학교에 그때...

강창호네 그 양반네 전부가 거기들 있더구만. 있어가지고 나 갔으니까 “강선생이 무슨 죄가 이서가지고 여까지 왔느냐?”고 그러기에 어떻하느냐고 이 사람들 죄가 있다고 해서 여기에 왔다고. 참 이상헌 일이라고 생각하고 잇다... 여기 있는 사름들이 첨말로 이상헌 일이라고 해서... 그래서 거기서 일주일 있으니까 또 나오라고 그래요. 이제 어딜로 가는가 했더니 서울로 간다고.

서울로 가면 어딜 가는가? 서울 가서 도착헌 것이 서대문 형무소라. 서대문형무소에 가서 수감을 시킨거여. 수감을 시켜놓고 아, 죄형법정주의인데... 어디까지나 아무리 군대라 할지라도 죄를 짓지 않으면 법정에서 걸 주게된거란 말이여. 원칙에. 그러니 이건 뭐 엉터리... 이건 당최 말할수가 없어. 아... 가서 열차를 타고 서대문형무소 강 도착해서 있으니까 아, 사형이라. 사형을 언돌내렸다고 그래요.

설마 요까지 와서 죽일랴고 하는구나... 속으로만 경 생각을 했죠. 뭐 헐수 없다고. 죄가 있건 없건 그 사람들 눈에 들지 안허니까 제거시킬랴 허는 거니까 뭐 헐수가 없다 생각을 했죠. 서대문 형무소가 가서 헌 일주일 있으니까 사형 언도를 났다는데... 무기징역으로 되였다는 거야.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서. 무기징역으로. 무기징역 그러면... 무기징역은 얼마간 기간을 보느냐면 30년간 본다고.

그러믄 30년간 형무소 생활을 해야 되는구나. 그래서 서대문형무소 가서 있으니까 마침 목에 병이 조금 있어가지고. 뭐 영양실조되고 뭐해가니까 목에 ‘나령(?)’이라는 병이 있어서 그것이 상당히 도져서 거의 거기서 서대문 형무소가 인왕산 거 옆에 있더구만. 인왕산 여름덜, 봄들 되가니까 인왕산 산꼭대기에들 남녀들이 짝허연 모여서 거기서 놀고들 그 옆이가 서대문형무소더구만.

그래서 거기서 있다가 거의 헌 1년동안 거기 잇으니까 몸이 첨... 그렇게 좋질 않고 영양실조되고 약도 안먹고 해노니까 거기 있으니 환자를 돌보는 의사가 형무소 있어. 그 양반이 일본에 어디 중앙대학? 어느 의과를 나온 모양인데, 그때 이야기 해도 잊어버려서. 그 양반이 날 보고 당신도 일본에서 대학을 나왔는데, 이거 참... 당신 제주도 산다는 것이 잘못이라구데...

이 서울 올라와서 살던가해뻐려야 될텐데... 제주도 살기 따문에 그런 나쁜 영향을 받고 있다고. 그래가니까 첨 이젠 일반 죄수들하고 같이 있는 것이 안되가지고 특별한 대우를 해주더구만. 그 양반이. 김뭣이던가. 좌우간 개호과에 경호? 개호과? 개호괄거라. 개호과에 있지 말고 여기 오면 자기하고 같은 방 쓰면서 자기하고 있으라고. 있으면서 약도 좀 먹으라고 하면서.

게서 그 양반이 날 불러서 거기에 침대에 간 눕고, 특별 대우를 받고 좀 있어가니까 병이 좀 점점 좋질 안해여. 그래가니까 이 양반이 “당신은 아무래도 여기서 이병 치료허긴 힘들겠다고. 또 시일도 걸리고. 얼른 치료가 되지 않을테니 당신 어떻허든지 집으로 가야되겠다”고. 하이... 제주돈 지금 가면 시끄러웠을텐데 내가 제주도 가면 그 사람들, 서청들이 나를 살려둘리 없다고 말이야.

근데 서철이란 것이 왜 나에 주목을 했냐면, 나가 그때 관재처에 있었단 말이여. 제일중학교렌 헌디 있다가 교감으로 있다가, 그 후에 제중에 있다가, 그 후엔,관재처에 한병택이라고 있었어요. 한병택이 하고 같은 족속이다 해서 해가지고 그것이 날 구속시켜서 첫 공판에 집행유예가 들어간거주.
  그래서 난 또 이제 서대문에 있다가 내중에는 나는 신병 때문에 거기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시켰는데, 내중에 또 30년으로 해서 18년까지 해서.

거기서 이 자식들이 그냥... 그때 죄형법정주의가 아니라 이 자식들은 재판이다가 있으믄 궐석재판으로 그냥. 맻년 맻년 몬 통보가 오거든. 국방부에서. 그래노니까 이의신청도 할 수 없고. 이건 무조건 일방적이라. 의견도 듣지 않고. 그래서 거기 있다가 난 또 신병 관계로 해서 허니까 개호과장이 “당신은 여기 더 오래 있을 필요가 없다.

더 있었자 당신 신병을 치료할 수가 없으니, 당신은 집으로 가야 되겠소.”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겠습니까?” 하니까. 내가 국방부에 굿신(?)헐테니까 내신헐테니까 좌우간 고향으로 갈 생각을 허시요. 제주도엔 지금 아주 시끄러울 텐데 가면은 서청이여 뭐여 들어서 시끄러울텐데 제주도 가면 어떻허느냐, 아니 이젠 제주도는 아주 진압이 되어서 완전히 평화가 되었다고. 제주도는.

근데 그때 6.25는 아직은 일어나지 안헌때라. 그때에. 그래서 50년 6월 24일 밤차로 내가 서울서 차를 탔어. 서울서 밤차를 탔죠. 우리 작은 아덜 곧 긴발 헐 때에 그놈을 데리고, 이제는 우리 아기엄마하고 출발헌 것이 6월 24일날 밤차 서울서 타가지고 이젠 목포에 도착핸 보니까 목포에 가 계엄령이라. 계엄령이라서 내가 형무소 출감증을 받아왔지.

출감증을 받아 왔으니 군 헌병들이 나서서 “너 이놈 빨갱이 아니냐! 빨갱이 아니냐” 이럭허더구만. “난 형무소에서 지금 살다가 지금 출감해서 오는 중이라고”말이여. 이렇게 뵈우니까, 그때는 “아.. 너...” “제주도에 지금 어떻습니까?” 물으니까 “제주도는 평온허다고” 말이여. 제주도는 진압이 아주 다 되서 제주도는 사람 살만허다고 말이여. 그래서 이제 제주도에 들어온 거주게.

(서대문형무소에) 그때에 하도 오래노니까이... 기억도 있었을꺼여 마는, 지금 오래노니까 잊어부러서... 그때 제주 분들이 많했고, 지금 전라도 사람들이 많했주 그때. 전라도 사람들이 많해서, 내가 그때에 그, 내가 형무소에 간때도 일주일에 한번씩 강의를 했어. 재소자들에 대한 법의 이론이라든가, 수감생활에 대한 것이 어떤가 이제 강의를 하라고.

게서 내가 자꾸 강의를 강당에 나가서 개호 과장하고 같이 강의를 했주. 게서 전라도 사람들은 상당히 많이, 순천 사람들. 여수 순천 관련자. 여수 순천 그때 사건 내자 마자 제주도에 또 사건이 나부니까.

서대문이 한국에서 제일 중범자가 간다고 전해 들었지. 중범자. 나도 제일 중범자로 본거주. 목포형무소에 갔다가. 근데 사람이 살자니까 목포형무소에는 6.25사변 터지자 마자 목포 형무소에 사람들은 전부 총살 시켰던 모양이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는 있으니까 이북에서 쳐들어와서 문을, 점령을 해서 열아가지고 전부 석방을 시켜 준거라.

게서 그때에 문옥주가 형무소에 있다가, 그때에 이북으로 넘어가진 않고, 그사람이 독딱선을 어떻게 빌어서, 게서 인천으로 가서 인천에서 독딱선 타가지고 일본을 건너갔죠. 그래서 일본에서 결국 살다가 일본에서 이제 책도 쓰고 그렇게 하다가 요번에 한 4년 전에 그때, 간이 나빴죠 그 사람이. 간이 뱅이 있젠핸 좋질 못해서 차후에 죽고 말았죠.


#마포형무소

▲김상년(1926년생), 2007년 7월 서울시 마포구 자택에서 채록

- 읍사무소에서 근무하던 중 좌익의 계속적인 강요로 450환을 건네주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48년 가을경 경찰서에 연행되어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됨.

- 취조는 경찰서 바깥에 있는 ‘특무대’(?)라는 곳에서 경찰이 하였으며, 돈을 내게 된 경위에 대해 묻자 부모형제를 살리기 위해서 그랬다고 하니 전기고문, 비행기타기 등의 고문을 하였음.

- 유치장에 구금된 지 며칠되지 않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밖으로 불러내어 군함에 승선시킴. 이때가 초겨울인 것으로 기억됨.

- 재판은 전혀 없었음.

- 가족들은 죽은 줄로 알고 당시 처형장이었던 이호해수욕장에서 시신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음.

- 목포형무소에서 마포형무소로

그때, 그때 몇명인가도 나 숫자도 잘 몰라요. 배는 고프고, 군함 속에 조, 좁쌀이 아니라, 조 껍데기 차, 포따리 싣거 있는거 구녕들 내가지고 배 안에서 먹으면서 그랬죠. 마포 형무소로 가서 있는데. 그것이 거기 가서 알았습니다. 무기 금고라고.

거기 가서 안거 같아요. 거기서 사는 동안에, 아침에 운동 시키고 그러는데, 형무소 안에서, 그때 우리 종형님 아들 되는 용주를 이제 만났는데, 나한테 하는 얘기가 그니까, 우리 종형님 아들이니까 나한텐 삼촌 뻘 될 꺼 아닙니까? 우리 조카가. “삼촌, 할아버지 할머니 다 돌아가셨습니다. 둘째 삼춘도 돌아가셨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그때 눈물 하나도 안났어요. 눈물이 뭐입니까? 너무도 기가 멕혀서 눈물이 하나도 안나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 둘째 형님까지 다 돌아가셨다니.

- 6·25 발발

그래서 살다가 일천구백오십년, 그날이 난 25일로 알았는데, 6.25날인줄 알았는데 그 날이 아닌 것 같기도 해요. 27일 날이나, 아마 28일날. 그런데 갑자기 형무소 안이 조용해져요. 그 무렵에. 막 떠들싹 하다가 어떻게 조용해져. 그러니까 죄수들이 우리들이 창문 틈으로 황급히 내다봤죠. 내다보니까 인공기가 여기서 막 휘날리고 야단이야. 조끔 있으니까 탱크가 와서 그냥 정문을 들이박고 부수워 가지고 우리를 꺼내 준겁니다.

그래서 석방이 된 거예요. 그래서, 석방된 후에 형무소 안에서 일단은 심사하고, 또 두번째로는 시청, 서울 시청 마당이 있습니다. 시청 마당에 거기 가서 심사하고. 또 그 다음에는 학교로 임시 숙소가 학교, 학교로 가서 했는데. 우리들 보고, 나는 고향에 가겠다고 하니까 고향에 갈려면은 의용군에 편입되서 가야지 그대로는 갈수가 없다.

이 전투가 막 치열해서 사방이 그냥 막 총들르고 싸움하는 판이고 패잔병들도 있고 막 거시기 하는데 갈수 없는 거겠다. 그러니까 의용군으로 들어가서 총 매고 해가지고 같이 그 사람들 하고 같이 그 사람들하고 전투하면서 그 사람들 물리치면서 들어가라 이거죠. 근데, 난 뭐 총 매본 적도 없습니다마는. 그냥 문화선전부장으로 해가지고 의용군 내에 그렇게 해가지고 그걸 허고, 우리 조카는 중대장 역할로 이제 총도 매고 그렇게 내려갔는데. 근데 그 이전에 이완영이라는 사람은 옥사했습니다.

- 전남 영암에서 군량미 운반시 허리 부상, 광주로 감.

- 광주에서 인민군에게 다시 잡혀 ‘의용군야영훈련소’에 입소하게 됨.

- 서울 수복시 경찰에 잡혀 광주경찰서로 연행되었는데 과거를 반성하고 대한민국에 충성하겠다고 하여 석방됨. 이후 ‘조기환’ 경찰주임의 집에서 거주하면서 그 아들을 지도하였음. 당시 상무대 육군통신학교 위관급 문관 시험공고를 보고 조주임의 도움으로 응시할 수 있었고 취업됨.

- 통신학교 출퇴근시 영관급차로 출퇴근 하니까 주위에서 주시함. 주위의 시기로 인해 현역군인 이등병으로 입대하게 됨.

- 56년경 강원도 양양으로 발령받자 도피하여 조주임의 집에서 한달간 거주함.

- 도망병으로 전국에 수배되자 조주임의 자수권유로 자수함. 헌병대의 조사를 거쳐 대구고등군법회의 재판에서 3년형 선고 받음.

- 특별사면으로 1년 복형 후 출소함

- 출소후 장학사로 있던 사범학교 동기생들의 도움으로 학교에 복직하게 되었고, 전라남북도에서 12년간 교원생활 후 퇴직함.


▲김춘배(金椿培, 2001년 76세, 1925년생), 2001년 8월 25일 채록

- 형무소 이송 경위

1948년 12월 15일 밤 12시가 지나서 나오라고 해서 나갔는데, 그때는 수장된다고 했다. 항구에 나가서 배를 타고 목포에 내려서 하룻밤을 자고 그래서 마포(형무소)까지 갔다. 재판을 받는 것이, 형식적으로 재판관도 있고, 변호사도 있고, 그래야 형식이 되는 것인데, 피해자의 진술도 없었고, 목포형무소에 밤에 도착해서 아침에 일어나서, 거기 광장에 전부 앉아서, 거기에서 형을 호명했다.

누구는 몇 년, 누구는 몇 년, 이것만 들은 기억이 있다. 재판장에는 가본 기억이 없다.

우리가 48년 10월에 검거됐나, 11월에 검거됐나 그랬다. 그때는 아주 무서운 때였다. 우리가 나온 이후에 희생자가 더 생겼다는 말도 있다. 농업학교에 천막을 몇 십여 개를 쳐서 거기서 수용을 시켰다. 고문을 해서, 우리 눈에는 죽은 사람도 많이 보였다. 일단 취조가 끝나면 천막에 들어가서 일어나질 못했다. 결국 못 일어나서 죽었다. 그때 취조관들이 술을 먹었는지 어쨌는지 하여튼 보통 정신으로 안보였다. 냄새도 나고. 탁대위(탁성록)인가 그 사람이 지휘자인 것 같았다. 들락날락 했는데, 키는 좀 작았다.

- 체포 경위

4ㆍ3사건 당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막 잡아들였다. 나는 그 당시 봉개동 집을 떠나 성내에 온 지 몇 해가 됐다. 끌려가서 한 며칠 취조 당했다. 아버님의 노력으로 나왔다. 11월 12일경 다시 검거되었다. 검거되고 나니까, 삐라를 뿌리지 않았냐, 뭘 했느냐고 하였다. 나는 한 것이 없다고 얘기를 하고, 취조를 당했다. 결국 그 이후에 경찰에서 계엄령을 내리니까 농업학교에 탁대위 밑으로 우리가 잡혀가게 된 것이다.

나도 거기서 고문도 당하고, 한 이틀은 일어나지도 못했다. 죽는 줄만 알았다. 고문으로 민청에 가입한 것으로 억지 자백(거짓자백)하였다. 그때도 아버님이 결국 아는 사람을 통해서 도와주셨다. 그때 전기고문이 심했는데, 나는 그래도 전기고문은 덜 받은 편이었다. 고문 받은 후에는 약 3~4일은 일어나지도 못하고 밥도 못 먹었다. 그렇게 있다가 15일 밤 약 12시 넘어서 부두로 나가서 마포(형무소)로 갔다.

- 체포 이유

나는 그때 직업이 봉개에서 성내로 이사와서, 거기에 조금 올라가면 나무가 있는데, 거기서 장작 장사도 좀 하고, 산에서 나무를 해서 몇 사람을 사서 같이 팔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생활을 간신히 이어갔다.

(경찰에게 지목을 받은 이유는?) 특별한 이유가 없고, 젊다는 것이 이유다. 그때는 증거를 대기 전에는 계속 취조를 당하고, 거의 반은 죽었다.

- 재수감

내가 62년도에 재수감이 되었다. 61년 경에 제주경찰서에서 두 형사가 왔다. 그래서 제주도에 갔는데, 그때 조사를 받고, 2~3일 정도 있다가, 그 사람들이 서울로 데리고 와서 보내주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갔다. 그래서 그 다음 해 62년 7월경에 서울에서 한번은 군인 차가 와서 서더니만, 군인 3~4명이 내려서 당신 이름이 누구냐고 하고는 가자고 했다. 그래서 따라가는데, 육군본부였다. 재수감이었다. 물어보지도 않고, 다만 잔형 집행이라고 말했다.

우리 집사람이 이한동 당시 법무관 집에까지도 갔다 왔다. 억울하게 형을 받았는데 대책이 없겠느냐고? 아주 친절하게 대하면서 노재필 변호사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우리 집사람이 계속 왔다 갔다 했다. 62년에 들어가서 그때 13개월을 살았다. 노재필씨가 (이의신청을 했는데 받아들여졌다). 제주시청에 김춘배가 20년형을 받았다고 하는 자료가 있고 다른 자료는 없는데, 그래서 그거 하나로 형을 재집행할 수 없다고 했다.

노재필씨가 그 당시 9연대장 송요찬씨한테 그 당시 48년 12월 15일 밤에 출발한 이 사람들에 대한 재판이 있었느냐 하니까, (송요찬씨가) 재판이 없었다고 해서, 그걸로 인해서 결국 석방이 된 것 같다.

- 마포형무소 생활

당시에는 폭도들이라고 해서 특별 취급을 했다. 누가 한마디를 하면 전부 끌어내서 손바닥을 내밀라고 해서 때리고, 꿇어서 앉게 하고, 다른 죄수들에 비해 상당히 심한 취급을 하고, 일을 나가게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 48년에 그렇게 되고, 아버지가 49년 어느 달이 되니까 서울에 올라와서 면회를 왔다. 6ㆍ25때 나와서 아버지를 만났는데, 아버지가 이 집 저 집을 다니면서 구걸을 해서 나를 살렸다. 한번은 아버지가 나가신 후에 비가 어떻게 쏟아지는지 그 비를 하루 종일 맞고 다녀서, 그 이후로 병이 나서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고윤보(高潤普, 2000년 86세, 1915년생), 2000년 12월 18일 / 제주시 봉개동 자택에서 채록

- 체포된 경위

그때가 계엄령이 막 시작한 때다. 밭가는 소를 보려고 가는 도중에 군인에게 잡혔다. 잡힌 날이 음력으로 11월 14일날이다.
(집 불태운 때는) 가을 음력 9월이다. 집은 군인들이 와서 사람 사는 집을 다 태워버렸다. 살 데가 없어서 각처로 막 나갔다. 삼양으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그 소를 가져가서 팔아서 먹어 살려고, 그 소를 가지러 가려다 잡힌 거다.

- 봉개동에 군 주둔

처음에 9연대였는데, 진압을 못했다. 그런데 그때 9연대도 일부가 산에 올라가 버렸다.
(학교에 주둔한 군인 수는?)
약 100여 명이 있는 거 같았다. 2연대가 진압을 했다. 봉개에 주둔은 안하고, 주둔은 함덕에 대대본부가 있었다.

- 농업학교 수용

잡혀서 제주읍 농업학교 자리에 가보니까, 소위 막사 천막에 여러 사람이 잡혀와 있었다. 그러니 거기 가서 같이 합숙을 했다. 한 15일을 경과해도 말이 없었다. 농업학교에 있는 동안 경찰관에게 취조 받았다. 군인에게는 받지 않았다. 고문이 상당히 심했다.

산에 가담했느냐고 하니, 우린 그 내막도 모른 사람이고, 또 가담할 필요도 없고, 내가 뭐 거기 가담할 이유도 없는 사람이다. 우리가 촌에서는 최고 재산을 가졌는데, 그런 사람이 거기 뭐 가담할 필요도 없는 거다. 지금 말하면, 한 가지 이유는 양식 제공을 했느냐 하는데, 그거는 일부 요즘말로 그저 몇 말 정도 했다고 했고, 만일 그걸 안주면 죽게 돼 있었다. 사실로 말을 해서. 그렇게 한 것뿐이다.

농업학교에서 전기고문까지 받았다. 다른 걸로는 별 타격을 안 받았는데, 그때 전기고문 한 거는 경찰들이다. 우리 제주도 출신들이다.
(취조하는 데 죄가 될만한 것을 고른 것은 산사람한테 쌀 한말 정도 줬다는 것뿐인가?)
폭도에게 뺏기다시피 해서 준 거 그것뿐이다. 그것 가지고 15년형인 거다. 지방법원에서 하는데, 15분도 안 걸렸다.
(취조는?) 딱 한 번 받았다.
(농업학교에 갔던 사람은?)
재판도 아무것도 안 받고 불러내서 어디 가서 처형시킨 사람도 있다고 생각된다.

- 재판

하루는 나오라고 했다. 나오라고 하며, 문 앞에 차를 세워서 그 차에 타라고. 옆에는 군인들이 포위하고 있고, 그래서 직접 내려가니 지금 관덕정 재판소였다. 재판소에 그냥 가서, 그 날 바로 직접 재판소에 들어가서, 바로 고등군법회의를 받았다. 한 70~80명이 같이 받았다. 재판이라는 게, 한 70~80명이 가서 호명만 했어. 재판인지 뭔지, 아무아무 그냥 호명만 한 것이 고등군법재판이라고 해서.

아마 판결이 거기서 나가지고 한 모양이다. 거기서 본인한테 몇 년형이라고 말도 안 하고, 죄명도 말하지 않았다. 그 후에 그 날 받아서, 그 차에 올라서 농업학교로 왔다.

(재판받을 때?)
군인들이 동참했다. 변호사는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변호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변론한 사람도 원 기억이 안 난다. 판사는 호명만 했다. 거기 출석했는가 안했는가만 확인하는 거다. 그러니 내 말이 그 말이다. 변론이란 게 없었어. 무의미한 변론이다.

- 마포형무소로 이송

다시 농업학교에 와서, 한 2~3일 후에 나오라고 해서 차에 실어서, 동부두에서 배에 실었다. 목포형무소에 가서 하루 저녁 자고, 또 뒷날 아침은 나오라고 하여, 한 새벽 4~5시경에 나오라고 하여, 거기서 또 기차에 타서 서울에 갔다. 서울 마포형무소에 가서 딱 떨어지니깐, 시간적으로 날이 저문 때다. 지금이면 한 6시쯤 거기 가서 내리니까, 거기서 저녁 주고 거기서 살았다. 계산을 해 보니, 거기서 3년을 살았다. 연도로 그런데, 날수론, 꼭 24달을 살았다. 두 해를 산 거다.

(형무소에 들어간 날짜는?)
자세히 기억은 안 나는데, 잡힌 후 20일경 후니까, 한 12월 초순, 나온 날은 내가 형무소에 나와서 25일 후에 6.25가 터졌으니까, 한 5월 그믐쯤에 나왔다. 형기와 죄명은 서울 가서 알았다. 마포형무소에 가서, 간수한테 들었다. 들어가서 간수가 차례로 그저 자연히 말해 주었다. 내란죄로 15년형이라고, 그러니 그제야 알았다. 재판 받을 때가 한 100여명 이상, 배에 타고 갈 때 한 200~300명 같이 가고, 마포까지는 그저 200여 명 같이 갔다. 제주도민만, 그 사건으로 간 게.

- 마포형무소 생활

처음에는 한 방에 4명 앉혔다. 제주도 사람만이 아니고, 잡범들과 같이 섞여 살았다.
(거기에 봉개 사람이?) 있었다. 나이 많은 이 동네 사람인데, 잘 아는 임세봉이란 사람이 같이 있었는데, 여기 와서 죽어버리고, 행불된 사람은 고석구라는 사람인데, 여기 사람이다. 집에서 면회 한 번인가 두 번인가 왔었다. 돈으로 주면, 거기서 상점에서 사서 감방에 넣어준다. 돈도 정해져 있고, 많이는 못 준다. 물품은 전해주지 못하고.

- 병보석으로 출소

(15년형을 받았는데, 어떻게 6.25 전에 나오게 되었는가?)
병 보석으로 나왔다. 그때 내가 상당히 몸이 좋지 못하니까, 환자실에 나갔다가 병 보석으로 폐가 안 좋았다. 사태 전에 아파서 한 3년 아프다가 끌려갔다.

- 서울에서 6.25 맞음

병 보석 하고 나오니 한 25일 후에 6.25가 났다. 그때 나와서 3년 후에 내려왔다. 서울 있다가 전라도 장성에 나하고 외사촌이 살아서 거기서 두 해를 살다가 내려왔다. 서울서 6.25를 겪었는데, 서울에 사람ㆍ집이 하나 없었다. 6.25가 발발하니까 서울이 제주도보다 완전히 소개되었다.
그리고 서울 가서 6.25 당해서, 그때 우리 제주도민이 내가 아는 견지로, 2,000~3,000명이 그 죄로 육지로 건너가서, 여러 형무소에 갔는데, 지금 생각에, 그때 형을 많이 받은 사람은 살고, 형을 조금 받은 사람은 죽었다. 그때 사람 살아 남은 것이 서울서만 살아났다.

서울은 서대문이나 마포형무소에 장기수, 중형 받은 사람만 갔다. 북한사람들이 들어와서 마포형무소랑 서대문형무소만 문을 열었다. 내가 그건 본 건데, 내가 증명하겠다. 그래서 잡범이던지 정치범이던지 운 좋게 그 날 나오게 됐다. 인천형무소는 소년범 형무소다. 이제 거기도 문 열어버리니까 나왔다.


▲정기성(鄭基星, 2000년 79세, 1922년생), 2000년 12월 14일 남제주군 남원면 신례리 자택에서 채록

- 귀순-취조(서귀포경찰서)

거기 내려오니까, 경찰서로 넘겼다. 서귀포주정공장(정방폭포 위) 수용소로 보냈다. 수용소에 가 있으니까, 이틀만인가 사흘만인에 형님이 내려왔다. 혼자만 살 수 없으니까 내려왔다.

서귀포경찰서에 가서 많이 맞았어. 무릎 꿇려서 구둣발로 막 찧어버리고, 장작을 놓아서 뒤로 막 틀어버리고, 올바로 걷지 못했어 그때. 고문하면서 조서를 썼다.

- 제주읍 주정공장으로 이동 - 재판

늦은 봄 되니까 제주에 주정공장으로 또 데려갔다. 어디 가는 줄도 모르고 나중에 가보니까 주정공장이었는데, 또 며칠 있다가 어디 가는 줄도 모르고 육지로 나갔다. 검찰인지 어디인지 부르니까, 약 10사람인가 12사람씩인가 불러서 쭉 앉아서, 한 사람씩 불러서 일어서라고 하여 일어서니까, 말 몇 마디 물어봐서, 좋아. 이렇게 하고는 가라고 하고.

- 마포형무소 이송

(마포형무소 가는 배에) 201명인가 202명일 거다. 목포가서 내리니까, 배에서 더러 죽었다고도 하고, 배에서 죽고 남은 걸 실어서 마포 갔다. 마포 가서, 형무소 문 앞에 죽 앉아서 안으로 들여놓지를 않아. 비는 오는데 물을 안 주니까 땅에 떨어진 물을 먹고, 몇 시간 후에야 형무소 안에 들여놓았다. 형무소 안 마당에 가서 앉혀놓은 다음 보리쌀 삶아서 물로 해서 가리미 식으로 하나씩 주었다.

(재판 때 형량 언도는?) 그건 마포가서 문 앞에 앉힌 다음에 너도 무기, 너도 무기, 그렇게 했지. 200명 모두 무기였다.

- 마포형무소 생활

(마포에 있을 때 제주도 사람들은?)
같이 있었다. 약 20명씩 같이 있었어. 원체 비좁았어. 낮에는 무릎 등이 시리도록 찬데, 밤에는 막 포 덮어서 누워버리면 괜찮고. 난 지금도 무릎, 등이 아직도 시려. 죽는 사람들은 영양부족으로, 이질병 걸리면 죽어버렸다.

- 6.25 발발

6.25가 터졌는데, 우린 6.25가 터진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기상 시간이 되었는데도 일어나라고도 안하고, 다음날 저녁 우리 식기 그릇을 다 걷어가는데, 우린 왜 걷어가는가 했다. 그 날 저녁 거기 6.25 터지니까 죄수들 먹을 양식을 다 가져다가 주어서 먹었다.

그때 교도관들은 다 도망쳐버렸다. 약 9시쯤 되니까 인민군들 총소리가 팡팡 나고, 나중엔 감방문을 단단하게 잠가서 가버리니까, 단단한 나무로 부숴서 대가리만 내밀면 끄집어 내었다. 인민군들이 다 끄집어 내었다. 나오니까 배고픈 사람은 식당에 가고, 옷 없는 사람은 옷 입으러 가고 했다.

형무소 근처에 학교가 있으니까, 나중엔 거기 있는 사람을 집중시켜서, 일가친척 있는 사람은 가도 좋고, 어디 갈 데 없는 사람은 거기로 집중하라고 해서, 거기서 밥해서 주먹밥 하나씩 줬다.

학교에서 며칠 살고 있으니까 또, 인민군들이 아무래도, 의용군인가로 갈 사람들은 가라고 하니까, 거기 갈 사람들은 갔다. 난 여기서도 그랬다. 형제가 한쪽으로 가서 다 전멸해 버릴까 봐서, 나는 산으로 안가고 공천포로 갔고, 형은 산으로 가고 그랬었다. 거기서도 그랬다.

- 형과의 이별 후

나는 서울에 명월관이라는 데 가서 며칠 살고, 그러다가 또 여기만 있으면 안될 것 같고, 걸어서 내려가다 보면, 제주도까지 해방이 되지 않을까 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리로 가도 제주까지 못 갈 거 같고, 그런데, 우리 친척 중에 한 분이 청주 살았다. 그래서 거기나 가본다고 해서 갔는데, 사흘 정도 찾아서 찾았는데, 거기도 피난 가버리니까 없었다.

형님은 의용군으로 북으로 가버렸다. 나중에는 목포로 가서 1년을 살았다. 거기서 공군부대 타이어 펑크나면 고치면서 살고 있는데, 두 번째로 우리 처가 와서 제주도 가도 아무도 뭐라고 안한다고 하여서 같이 왔다.


▲김경인(여, 1930년생), 2007년 7월. 제주시 월평동 자택에서 채록

- 귀순행 오는 사름도 석방헌 사름은 석방허고, 형무소 가는 사름은 형무소 가고. 형무소 가도 다 각각이 가부니까 몰라. 우리영 일곱이 갔자, 고치간 사람 둘 밖이 안와서. 3년 받은 사람, 5년 받은 사람, 7년 받은 사람, 1년 받은 사람 둘이 들어온디, 그 하나 친구는 돌아가시고. 여기와서. 나만 살았지.

- 4월에 귀순행 내려오니까 아맹해도 오월에 육지 갔지. 배 탕 갈 때사 형무소 가는 거 알주, 몰라. 전주 갔지. 아맹해도 형무소 간덴 헌 말은 들엉 간거주. 겐 전주 강덜 살아네 서대문 살았지.

배탄 목포에 강 내려네, 글로절로 옛날은 차도 연탄차. 연기 막 시커멓게 나는거 그런 거 타고 갔지. 같이 간 사람들, 형무소까지 다 갔어. 가네 6.25때 어디로사 간디 몰라. 소문에 듣기로는 이북 넘어간 사름도 있젠 소문은 나났주.

- (전주형무소) 그딘 우리 보기엔 여자만 보이데. 서울도 가니까 남자 잘 못보데. 무신거헌 때 나온 때 일허는 사람이나 좀 보이고. 요 무시거 허는 사름들은 활동허는 사름들은 가서 일도 허고. 우리는 영 이렇게 되부니까 방 너른디 혼 열, 열정도는 혼방에 살았지. 게니까 육지 사름이고 어딧 사름이고 막 잡통 섞어져서. 게니까 우리는 환자식으로 경 베낏디 나강 일도 안허고. 일주일에 혼번 교회에 나강, 교회에 예비도 받곡, 또 이런 글도 고르친덴 교육도 받곡.

- (형무소에서 발병) 어떵해신디사 갑자기 여기(얼굴 한쪽)가 지냉이 기는거 모양으로 막 여기가 근지러와. 확실헌 병은 아무것도 엇고. 그디서도 ‘단독’인가 무신거엔 핸 그디서도 병원있대. 보건소 모양으로. 그디강 나오면은 막 무시걸로 해서 막 피 빼고. 치료해주데.
양력 3월에 (형무소에서) 나왔다. 1년이민 닥 두덜 감해그네 열덜이엔.

- (월평 사람들) 6.25 때에 저디서 해여네 이북더레 넘어갔덴 말은 들어져도 확실힌 몰라. 계옥이허고 순추는 이북 넘어갔젠 말 들어져도. 잘 몰라. 수연이엔 헌 사람이 지금 강상문이 부인이여. 그디도 이북 넘어갔젠 소식 들은디 어딜로 어떵 들으난 죽었젠... 수연이엔 헌 사름은 7년 받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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