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8 21:23 (목)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붉은 피
5월, 그날이 다시오면...'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붉은 피
5월, 그날이 다시오면...'
  • 윤철수 기자
  • 승인 2007.07.25 20:45
  • 댓글 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화려한 휴가>의 실제 주인공 오용태씨의 '광주항쟁'
총상입은 시민 구하려다 다리 잘려나간 '숨가빴던 상황'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 피 솟네’

2만명의 계엄군이 지방의 한 도시로 이동했다. 이 작전으로 인해 이 도시의 민간인 희생자수는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곳은 바로 광주였다. 계엄군의 그날 작전명은 <화려한 휴가>.

 

1980년 5월21일 광주 전남도청 앞 금남로. 석가탄신일로 공휴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를 느낀 시민들이 아침부터 대거 거리로 나와 규탄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친구의 죽음을 눈물로 지켜봐야 했던 고등학생들까지 학교를 박차고 나와 공수부대에 맞서 싸웠다.

'계엄군은 물러나라'고 외치는 시민들의 의지는 결연했다. 이날 낮 계엄군이 철수한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노래를 부르며 계엄군이 되돌아가기를 기다리는 시민들.

오후 1시, 전남도청 확성기를 통해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영문을 모르는 시민들은 애국가를 따라 불렀다. 그 순간 계엄군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전경들은 한켠으로 비켜서고,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 정조준 총격자세를 갖춘다.

'탕! 탕!'
갑자기 총탄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애국가'는 무차별 사격을 가하기 위한 그들만의 암호였던 것이다. 시민대열 선두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총탄에 맞아 쓰러져 피를 흘렸고, 뒤늦게야 사태의 심각성을 안 시민들은 총탄을 피해 일순간 흩어진다.

총격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어린아이, 노약자 할 것 없이 계엄군의 총격은 무차별적으로 자행됐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 울부짓는 한 어린아이의 모습이 외신기자의 앵글에 담겨졌다. 총에 맞아 피를 토하며 쓰러진 한 남자를 흩어지던 대열 속 한 대학생이 발견한다. 그 대학생은 쓰러진 그 남자를 외면할 수 없어 빗발치는 총탄 속을 낮은 포복으로 접근하여 그를 어깨에 부축하여 그곳을 빠져나가고자 한다.

바로 그때. 계엄군의 조준사격은 부상자를 부축해 빠져나가는 대학생의 왼쪽 다리를 겨냥한다. '탕'하는 소리와 함께 그 대학생은 공중에 붕 떴다가 쓰러지고, 뒤늦게야 총상을 입었음을 직감한다. 낮은 포복으로 그 곳을 빠져나가려고 필사적인 몸부림을 치는 이 청년.

하늘이 도왔는지, 그 대학생은 마침 함께 그곳에 왔던 같은 학과 친구의 도움으로 현장을 빠져나가 광주기독병원으로 긴급 후송된다.

#무차별적인 발포 속에 쓰러진 시민 구하려다 총상입은 한 대학생

 

제주4.3과 더불어 현대사의 비극인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가 2007년 7월25일 개봉돼 관객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화려한 휴가>의 5월21일 총기난사 과정에서 부상당한 시민을 구하려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낮은 포복으로 몸부림치던 이. 그가 바로 오용태씨(52. 당시 전남대 건축공학과 4년)다. 서귀포시 출신인 그는 서귀포시 토평초등학교, 서귀중, 서귀고를 졸업하고 전남대에 입학했다.

당시 군복무를 마치고 1980년 4학년에 복학한 그는 평범한 대학생일 뿐이었다.

"5월17일 전남대는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초토화되어 있었어요. 시위하던 학생들 중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폭력진압을 당하지 않은 학생이 거의 없을 정도였어요. 제가 봉사활동을 갔다가 돌아와 보니, 정문으로 들어가지도 못할 상황이었어요.  정문으로 못 들어가서 '개구멍'으로 들어갔죠. 우리과(건축공학과)에서 작품전을 준비하던 학생들까지 모두 잡혀가고 없더라구요. 교직원들만 있고 학생들은 거의 없었어요."

그의 말대로 계엄령이 내려진 광주시내에서는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이 자행되고 있었다. 골목길까지 쫓아오며 살인적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물론이고 극장내부까지도 이들의 살인적 만행은 계속됐다.

"'퍽'하는 소리가 났어요.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중학생 아니면 고등학생 쯤으로 보이는 여학생인데요, 한 군인이 곤봉으로 그 여학생의 머리를 얼마나 세게 내리쳤는지, 머리를 두 토막 내더라구요. 그 여학생은 즉사했죠."

당시 하숙을 하지 않고 전남대 교내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던 오용태씨는 금남로에서의 최초 총격이 있었던 5월21일 아침 같은 학과 친구와 함께 전남대 근처에서 걸어서 금남로까지 이동했다. 그날은 석가탄신일이었다.

"금남로 전남도청 앞에 도착하니까 11시쯤 됐더라구요. 그 당시 버스 교통 노선이 없어서 걸어서 갔거든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운동권 학생들이 아니라 대부분 평범한 시민들이었어요. 무자비한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를 느낀 시민들이었죠. 저 역시 마찬가지죠. 남들이 말하는 이념이나 사상이 투철한 운동권 학생도 아니었고, 그저 평범한 학생 중 한명일 따름이었죠."

며칠간 계속된 공수부대의 살인적 폭력에 시민들의 항거가 갈수록 거세지자 이날 시내에서는 '계엄군이 철수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래서 금남로에 모여 공수부대와 대치 중인 시민들 중 총격을 가해올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마하니, 대한민국 군인이 선량한 시민들에게 총질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우린 정당한 항의를 한 것이고, 그런 폭력적 진압광경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아무튼 5월17일 전남대가 초토화된 이후, 18일과 19일, 20일 계엄군은 정말 잔혹할 만큼 말로 못다할 만행을 저질렀어요."

<화려한 휴가>에서 묘사되듯, 금남로에 모인 시민들은 계엄군이 곧 물러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잘 가세요~ 잘 가세요~'하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 큰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계엄군에 항의하고 욕을 퍼붓는 시민들. 그 순간 만큼은 곧이어 자행될 '학살'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잘 가세요~' 노래까지는 부르지 않았어요. 영화에서는 시민들이 발포까지 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렇게 시나리오를 쓴 것 같은데요, 실제와는 조금 다르죠. 하지만, 애국가가 울려퍼졌어요. 그건 사실이예요. 그 당시 애국가가 울려퍼지면 우리나라 국민들 가던 길 모두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잖아요. 바로 그 과정에서 발포가 된 거예요.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를 따라 부르던 그 순간 발포가 시작됐어요."

오후 1시, 확성기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시민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를 감격스럽게 따라 부른다. 애국가가 울려퍼지기 시작한 순간, 계엄군은 정조준 자세로 시민들에게 총을 겨눴고, 곧바로 발포를 시작했다. 처음 총성이 들리던 찰나, 시위군중이 제 자리에서 당황한 듯 멈칫하며 필사적으로 도망가려 하지 않았던 것은 '공포탄'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저도 공포탄인 줄 알았죠. 그런데 앞 쪽에 서 있는 사람이 먼저 4-5명쯤 쓰러지더라구요. 피를 흘리면서. 그제서야 진짜 사격을 가하는구나 생각했죠. 순간 공포감이 밀려오더라구요. 그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뒤돌아서서 가려고 하는데, 먼 발치에 4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 한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어요. 그 남자는 절뚝거리며 겨우 겨우 일어나서는 걸어오다가 다시 쓰러져서는 일어서지 못하는 거예요. 누군가 가서 그 사람을 병원으로 데려다주지 않으면 곧 죽을 것 같더라구요."

#"설마하니 부상자 부축하는 사람에게까지 총을 쏠 것이라고는..."

대학생인 오용태씨의 마음에는 '살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쓰러진 남자를 살려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일단 그 자리를 피하고 봐야겠다며 뒤 돌리던 발길을 멈추고, 허리를 숙여 그 남자쪽으로 다가섰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영화 속에서나 보던 길거리에서의 총격은 계속됐다. 그 남자를 부축해서 자리를 빠져나오려는 순간, 오용태씨는 허벅지 부분에서 뭔가 '따끔'하는 아픔을 느꼈다고 한다. 그 느낌과 함께 그는 공중에 붕 떴다가 한바퀴 돈후 바닥에 곤두박질쳐졌다.

"저쪽에는 계엄군이 총을 쏴대고 있고, 난 그를 부축해서 돌아서서 시민들이 있는 쪽을 향해서 다섯걸음 쯤 나올 때 몸이 붕 떴어요. 통증은 못느꼈어요. 누군가 뒤에서 발길로 호대게 걷어차서 '따끔'거리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몸이 한바퀴 돌더라구요. 쓰러져 있는 상태로 다리를 보니까 다리에서 피가 샘물처럼 쏟고 있더라구요. 그제서야 총에 맞았구나 생각했죠. 그때 생각으로는 아군 적군도 아닌데 총맞고 사상자를 구해서 나오는 사람에게까지 설마하니 쏘겠나 그런 생각에서 나갔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이 부분에서 그는 당시 생각이 또렷하게 떠오르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그 부분에 대해 말을 다시 이었다.
"다리에서 피가 샘물처럼 쏟고 있으니까, 그 자리를 빠져나가야겠다 생각하고 약간 높은 포복으로 기어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게 되죠. 저 생각으로는 30m정도 기어나온 것 같은데, 현장에서 저를 구해준 제 친구에게서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3m정도 밖에 기어나오지 않았다고 하더라구요."

바로 그 부분이 영화 <화려한 휴가>의 5월21일 금남로 총격사건에서 한 토막으로 나오는 장면이다. 무차별 총격이 전개되는 장면에서 시민들은 놀라서 흩어지고, 앞쪽에 있었던 시민들은 하나 둘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부상자를 어깨에 부축해 빠져나오던 시민도 총에 맞고, 또 포복으로 현장을 빠져나오려고 사투를 벌이는 모습. 바로 이 장면이 오용태씨가 직접 당했던 실제 상황이다.

"제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본 그 친구가 내 어깨 옷을 잡고 일단 그 길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와줬어요. 근처 의원에 데려다 줬는데, 그 의원의 의사 얘기가 '다리에 동맥이 잘려져 있어 여기서는 수술 못하고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지나가던 트럭에 얻어 타고 광주기독병원으로 가게 된 것이죠."

병원으로 실려간 그는 피를 많이 흘렸던 때문인지, 의식이 없었다. 하지만 병원은 그 만을 돌보아 줄 여유가 없었다. 이미 많은 시민들이 총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들어오고 있었다. 가슴에 총을 맞은 사람, 머리가 피투성이가 되어 실려온 사람, 어쩌면 오윤태씨의 부상정도는 약과였는지 모른다. 병원으로 실려왔지만 그에 대한 진료는 좀처럼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가 숨이 멎으며 쓰러진다. 이에 의사가 급히 달려와 심장압박을 하자 그는 다시 숨을 쉬며 기적처럼 살아났다.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계속해서 실려 들어오는 환자들을 통해 밖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병원으로 간 후에는 의식이 없었어요. 정신을 차렸다가도 혼미해지고, 또 또렷해지다가 다시 혼미해지고... 수십발의 총탄을 맞고 실려온 사람도 함께 있었어요. 계엄군이 마지막 전남도청에 쳐들어가던 27일 밤. 영화에서 막바지에 나오는 것처럼 한 여성이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형제자매가 계엄군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라는 그 방송 목소리가 병원까지 들려왔어요. 지금도 그 목소리, 그 떨리는 음성의 그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어요."

시민군이 완전히 진압된 후, 병원에서 그는 경찰과 군 보안대의 합동조사를 받게 된다.
"병원에 경찰서 직원하고 보안대 직원이 합동수사하러 왔더라구요. 심문을 받았죠. 저는 의사들이 보호를 해줘서, 육군병원으로 안끌려가고, 그냥 그곳에서 치료를 받게 됐어요. 치료받다가 육군병원으로 끌려간 사람도 많았어요. 자기들 눈에 더 수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미심쩍은 사람은 육군병원으로 호송해갔죠."

#"광주에 올라온 부모님 눈물만 지으시다가 '왜 피하지 않았느냐'고 묻더라구요"

병원에 입원한지 한달정도 될 무렵, 고향인 서귀포에서 부모님이 올라오셨다.
"제가 연락을 안했죠. 또 연락을 했다해도 광주가 완전히 고립돼 있었기 때문에 오실 상황도 아니었지만. 저의 부모님은 저를 보시더니만, 눈물만 지으셨어요. 딱 한마디, '왜 피해 달아나지 않았느냐'고 원통해 하시더라구요. 정말 부모님 앞에 못할 짓이더라구요. 그래도 전 살아났으니까 천만다행인 셈이죠."

그는 총알이 다리를 관통하면서 동맥과 운동신경이 10cm정도 잘려져 나갔다는 진단을 받게 된다. 동맥을 뼈 밑으로 붙이는 수술을 8번 정도했다고 한다. 그해 말까지 오랜 치료 도중 그는 신경이 끊어졌기 때문에 회복되더라도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병원측의 설명에 결국 한쪽 다리를 잘라달라고 한다.
"병원 의사들은 정말 노력을 많이 했어요. 합동조사를 할 때에도 여차하면 국군병원으로 이송돼 추가 조사를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곳 의료진들이 정말 잘 처리해주더라구요. 그 분들은 정말 헌신적으로 많은 노력을 했어요."

한쪽 다리를 잃게 된 그는 그해 12월 의족다리를 하고 퇴원을 한다. 교수가 직접 병원을 찾아 병상에서 시험을 치르도록 했기 때문에 그는 정상적으로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건축기사 1급자격증도 획득했다.

#"애들도 나중에는 이해하겠죠. 그 때 내가 왜 부상자를 외면할 수 없었는지..."

1981년 봄 그는 제주로 내려온다. 처음 제주에 내려와서는 서귀포 야간학교에서 자율교사를 맡아 활동한

다. 그 과정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이 바로 진희종씨(전남대 제적, 광주항쟁 당시 전남도청에서 시민군으로 마지막까지 항거하다 피검돼 투옥됐다가 출소)와 이영일씨(당시 인하대 졸업, 1987년 6월 '서귀포항쟁' 주도) 등이다.

그리고 1981년 12월 자그마한 건설회사에 입사한 그는 건축기사로서 일에만 매진했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어요. 인생의 행보를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사지가 멀쩡할 때에는 정상적인 신체의 조건으로 계획을 세워놓았잖아요. 그런데 다리 한쪽이 잘려나간 상태인데, 그런 바탕에서 인생을 설계하려니까 한동안 정말 암담했어요."

이것저것 생각하기도 싫고, 자꾸 광주에서의 '악몽'에 시달리면서 그는 과거 모든 일을 잊으려고 악착같이 일에만 몰두한다. 정상인 이상으로 현장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도 공안기관의 관찰은 계속 따라다녔다.
"제주에 내려와서 눈에 보이는 불이익은 없었는데, 정기적으로 조사를 하고 가더라구요. 정말 싫었어요. 한번 상처를 주고, 또다시 저에게 그런 식으로 괴롭힘을 준다는 것이...
왜냐하면 저는 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었잖아요. 그저 평범한 학생으로, 평범한 사람으로서 울분을 느껴 금남로에 갔었던 것이고, 그 과정에서 총상을 입은 시민을 도우려다가 피해를 입은 사람이잖아요. 저는 '수많은 구름 중'에 하나일 뿐이었어요."

1987년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백년가약을 맺는다. 그리고 현재 고등학생과 중학생의 1남1녀를 두고 있다.
"결혼하고 어느 건설회사에 다닐 때 제주대 학생회에서 광주항쟁에 대해 연설을 해달라고 해서 간 적이 있었어요. 연설을 하고 그 다음날 회사에 갔는데 사장이 부르더라구요. '왜 쓸데없는 일 하고 다니느냐. 자기하고 약속을 어긴 것 아니냐. 데모하는데 끼지 말라고 얘기했지 않느냐'라며 저를 질책하더라구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항상 누군가로부터 감시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어요."

가족들에게도 웬만하면 광주항쟁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고 한다.
"애들이 가끔씩 광주항쟁에 대해 물어보면 짧게 대답만 할 뿐, 장황하게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언젠가 우리 애들도 대학에 들어가고 어엿한 사회인이 되면 광주항쟁에 대해 좀더 많이 이해를 하겠죠. 그 때 제가 왜 그곳에 있었는지, 왜 서둘러 달아나지 못하고 그 부상자를 외면할 수 없었는지..."

#"씨 뿌리는 사람 따로, 열매 거두는 사람 따로, 사회가 이 모양이니..."


 

한 때 '폭도'로까지 매도당하며 숱한 곤혹을 치렀던 세월. 2003년, 그는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됐다. 그리고 현재 풍연종합건설(주) 대표이사로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는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다. 이름없이 쓰러져간 무수한 희생자들. 그들이 있었기에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산 자'는 어쩌면 축복받은 사람일런지 모른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한가닥 그의 바람은 크지 않다.
"광주항쟁으로 인해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한층 발전된 점도 있지만, 씨 뿌리는 사람 따로, 열매 거두는 사람 따로인 사회인 것 같아서 씁쓸한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남을 배려하는 마음, 그러한 마음이 풍성해졌으면 좋겠는데..."
 

<미디어제주>
 


 

*<타는 목마름으로> 책자 및 기사의 1차적 저작권은 저자인 윤철수, 그리고 기사 및 책 속에 담긴 사진콘텐츠는 서귀포6월항쟁기념사회에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6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3 2007-07-28 10:06:12
자녀들에게도, 친지들에게0, 친구들에게도 자랑스럽게 80년 5월을 말하세요. 오용태님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진정한 용길을 보였던 청년시절 그 마음으로 지금 하시는 건설업도 대성하시고요. 존경스럽습니다. 만약 저에게 그런 상황이 주어졌다면, 그럴수 있었을까요. 아마 도망가기 나살려라 하고 도망치기 바빴겠지요. 존경합니다.

부끄러운 고백3 2007-07-28 10:04:23
한번도 그의 이름을 듣지 못했습니다. 제주대 강연했다고는 하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오용태님이 차분히 자기일을 하며 묵묵히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목숨을 걸고 부상자를 구하려는 용기, 그 용기가 진정한 용기 아닙니까. 툭하면 기자회견 하며 자기과시 단체과시하려는 시민운동가들 보다는 훨 낫습니다.
오용태님은 진정은 <의인>입니다. 박수를 보냅니다. 자녀분들에게,

한라산장 2007-07-26 15:19:24
미디어제주가 좋은 기사 뭔가 다른 기사를 만들어 내는군요. 고맙습니다.

감동 2007-07-26 11:50:10
이렇게 감동받아보기는 처음입니다. 꼭 우리 모두의 일처럼 느껴지네요.
아마 자녀분들도 오용태씨의 과거에 대해 이해해줄꺼라 믿습니다.

짱돌 2007-07-26 09:39:34
4.3은 518을 낳고 518은 민주주의를 이루는 값진 희생을 치루고.민주주의는 4.3의 진실을 여른 문이 되었습니다. 오용태님 가족에게 역사에게 절대 부구럽지 않은 삶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