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9 11:14 (금)
겨레의 애창곡 찔레꽃
겨레의 애창곡 찔레꽃
  • 문익순
  • 승인 2007.07.05 17:5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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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문익순 제주특별자치도 공보관실 사무관

1983년 애플컴퓨터의 보급과 전자기술의 발달로 컴퓨터 음악개념이 널리 알려지면서 노래방은 국민적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노래방이 전국으로 확산보급되면서, 우리 사회의 놀이문화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노래방은 계층과 신분을 가리지도 않고, 남녀노소가 즐길 수 있는 안락한 대중의 쉼터이며, 휴식처이다. 희로애락의 일상에서, 사람들이 노래방을 찾는 연유도 갖가지이다.

노래방은 50대에게도 친숙한 놀이문화공간이어서 시대적 대중문화에 익숙해진 나도 노래방에 자주 가는 편이다. 직장회식을 마치거나 친구들과 동행하는 게 다반사다.

예나 지금이나 즐겨 듣고, 부르는 나의 노래는 애상조(哀想調)의 트로트 가요 일색이다. 시대의 변화를 알지만 물려받은 가치관의 관성이 더욱 강하게 작용하는 ‘뽕짝’이 놀이의 주류인 문화 소외세대여서 그런가 보다.

하기야 이제 흘러간 옛노래에 걸맞은 나이도 되었지만 30여 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도 기존의 사고와 감정의 틀에 매어 바뀐 세태에 자신을 맞추지 못하는 세대. 7 ~ 80년대는 라디오와 TV의 음악프로에 명랑한 곡보다는 애절한 곡들이 대중의 심금을 울렸었다. 여가수의 노래라 그리 즐겨 부르지는 않았지만, 시대적 과거를 회상하며 즐겨 듣던 애절한 트로트의 선율이 지금까지도 내면에 녹아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로 시작되는 “찔레꽃”이다. 이 노래는 1941년 발표되었지만,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이었는지 반응은 미미했다고 한다.

해방 후 크게 인기를 얻기 시작하여, 민중의 노래로 겨레의 애창곡이 되었다. 찔레꽃은 1941년 암울한 전쟁 속에 향수를 달래며 가수와 작사, 작곡가 세 사람이 한림읍 명월대로 찾아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 했던가. 노랫말을 짓고 곡을 붙여 “찔레꽃”을 노래하던 사람들은 가고 없어도, 애상이 깃든 노래의 선율은 영원하다. 이 노래를 부른 백난아(1992년 작고) 가 제주 출신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백난아는 예명이고 본명은 오금숙(吳錦淑) 이라고 한다. 가수 백년설의 양녀가 된 오금숙이 태평양 레코드사에서 활약할 때 함경북도 청진을 고향이라고 쓰게 한 것이 고향 아닌 고향이 되었다고 한다.

백난아는 한국 가요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늦은 감은 있지만 북제주문화원에서 그녀의 고향 한림읍 명월리에 과거의 애절한 사연을 간직한 ‘찔레꽃 노래비’를 세웠다. 어찌, 반갑고 뜻깊은 일이 아니겠는가.

<문익순 제주특별자치도 공보관실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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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마시 2007-07-05 22:00:56
해군기지로 도민갈등을 해소해 하는 데........ 너무 한가하다. 노래를 소개할 정도니....
도의회로 난리가 나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