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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년 전, 제주4.3 흔적 찾아...'
'59년 전, 제주4.3 흔적 찾아...'
  • 문상식 기자
  • 승인 2007.04.09 07: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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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도민연대, 완전한 4.3해결을 위한 '4.3역사순례'
빌레못굴엔 무슨 일이...백할아버지의 한 자손된 사연은?

59년 전 제주 섬에 드리워진 먹구름. 무고하게 죽어간 원혼들의 한 맺힌 메아리가 봄 바람에 실려 제주 섬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바람에 몸을 맡긴 벚꽃은 4.3의 아픔에 눈물을 흘리고, 화사한 유채꽃 물결에 4.3의 암울한 그림자는 걷히는 듯 했다. 8일 아침 따사한 봄 햇살을 가슴에 품고 역사의 진실을 찾기 위해 비극의 현장으로 여정을 떠났다.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공동대표 양동윤)는 이날 4.3항쟁 제59주기 완전한 4.3해결을 위한 '도민과 함께 하는 4.3역사순례'를 가졌다.

4.3도민연대가 주최한 4.3역사순례에는 150여명의 제주도민들이 참가해 제주4.3평화공원을 시작으로 빌레못동굴, 만벵듸묘역, 동광 헛묘, 백조일손지지 등 역사의 한 가운데를 향해 4.3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59년전, 제주 섬을 휩쓴 비극의 현장에 나서다

첫 집결지인 제주시 신산공원에 삼삼오오 가족단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4.3역사순례에 나서며 4.3도민연대는 "우리는 오늘, 59년 전 제주 섬을 휩쓴 4.3광풍으로 무고하게 숨져간 천인공노할 비극의 현장을 찾아간다"고 말했다.

4.3도민연대는 "지난 3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12차 회의는 가당치도 않은 무기와 사형이 선고되었던 억울한 4.3영령, 868명을 '4.3희생자'로 결정, 의결했다"며 "그러나 우리는 환영만 할 수 없었다.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신고했던 희생자신고서를 철회했고, 또 희생자 결정과정에서 탈락, 끝내 죄인 아닌 죄인으로 남겨진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고 성토했다.

4.3도민연대는 "오늘 도민과 함께하는 4.3역사순례가 4.3이 진상규명과 희생자의 명예회복 등 그 정답을 말해 줄 것으로 믿는다"며 "4.3문제가 말끔하게 해결될 날을 맞이하기 위한 4.3역사순례에 참가해주신 여러분께 감사하다"고 말했다.

전세버스 3대에 나눠 탄 4.3순례단은 첫 목적지인 제주4.3평화공원으로 향했다. 제주4.3평화공원에 다다랐을 때 내년 4월3일 개관 예정인 제주4.3사료관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1949년 1월, 빌레못 동굴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나?

제주4.3평화공원에 도착한 순례단은 유족대표와 참가어린이 대표가 공동으로 분향한 뒤, 위패봉안실을 참배했다.

이어 4.3순례단은 1970년대 초반 유해 4구가 동굴 탐사대에 의해 발견되면서 세상에 4.3을 알리는 계기가 됐던 제주시 애월읍 어음2리 706번지에 위치한 빌레못굴을 찾았다.

어음과 납읍, 장전리에서 온 주민 30여명이 한 달 동안 굴속 공동체를 이루며 피신하고 있다가 1949년 1월 16일 애월지역 군.경.민합동 토벌대에 의해 29명이 무참하게 총살당한 현장이다.

제주4.3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은희씨가 4.3순례단의 이해를 도왔다. 4.3항쟁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1989년 대학을 졸업한 후 지금까지 4.3현장을 발로 뛰고 있는 그의 설명은 너무도 생생했다.

"봉성리 구몰동이 무장대에 습격 당한 뒷날인 1949년 1월 16일. 토벌대와 민보단이 합동을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벌여 빌레못굴을 발견했습니다. 토벌대는 굴 속에 숨어 있던 29명을 굴 입구 근처에서 학살 한 것이죠.

#"아기를 휘둘러 돌에 메쳐...", 숙연해지는 4.3순례단

빌레못굴 학살에 대해서는 슬픈 얘기가 남아 있습니다. 토벌대는 이날 7개월된 아기를 휘둘러 돌에 메쳐 죽였다고 해요. 빨갱이들의 씨는 아주 말려 버려야 한다면서요..."

순간 김 연구원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히면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설명을 듣고 있던 순례단도 숙연해졌다. 다시 마음을 진정시킨 김 연구원이 설명을 이어갔다.

"굴 입구는 좁아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토벌대는 당시 겨울이어서 굴 내부에서 김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찾았다고 합니다. 현재 굴 입구는 철문을 달아 잠가 놓았습니다. 빌레못굴 안내 표석이 새롭게 단장되어 세워져 있지요."

역사의 아픈 현장을 뒤로하고 순례단은 다음 목적지인 만벵듸 공동묘역으로 향했다.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갯거리 오름 사남쪽에는 1950년 음력 7월 7일 모슬포 섯알오름 탄약고터에서 집단학살된 민간인들을 매장한 '만벵듸 공동장지'가 있다.

현재 유족들의 증언이 서로 엇갈리는 부분이 있으나 이 사건의 희생자는 63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희생자들은 여러 사유로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검속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구금장소는 당시 한림면 어업창고.

만벵듸 희생자들은 음력 7월 7일 새벽 2시에 섯알오름 탄약고터 작은 구덩이에서 학살됐다. 당시 형을 이곳에서 잃었다는 7.7만벵듸 유족회 오용승 회장이 생생한 기억을 떠올렸다.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이란 광풍이 제주에 몰아쳤습니다. 한림읍 관내에서도 무차결 검거가 시작됐습니다. 순박한 농민, 교육자, 부녀자 등이 한림 어업창고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음력 7월 7일 새벽 모슬포 송악산 자락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무참히 학살되었습니다.

당시 우리 형님도 무고하게 목숨을 잃었지요. 아버지를 대신해서 우리 집안을 이끌었는데...전 어려서 그 때 상황이야 잘 모르지만, 하루는 새벽에 한림 지서에서 와서...그때는 젊은 청년들이 성 쌓아서 마을을 지키던 때였습니다.

#"호명되지도 않았는데 나간 형님...그래서 여기 있습니다"

새벽까지. 그래서 그 사람들 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모이게 해서 호명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안 나간 겁니다. 그때 그 옆에 우리 형님이 우연히 앉아 있었던 모양이예요. 그 호명 당한 사람이 안나가니까 다른 사람들이 우리 형님 쪽을 모두 쳐다봤다는 겁니다. 네가 빨리 나가면 될 건데 왜 안 나가느냐는 식으로...

그래서 어떻게 형님이 나가게 된겁니다. 그래서...여기 있습니다. 그 때 나가지 않았다면 여기 있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갑자기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오 회장의 생생한 설명에 모두가 슬픔을 억누르고 있는 듯 했다. 옷깃을 세우며 순례단은 다음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어 순례단은 안덕면 동광리에 위치한 시신없는 헛 묘를 찾았다. 동광리는 4.3당시 5개의 자연마을로 이뤄진 중산간 농촌마을이었다. 그러나 1948년 11월 중순 이후 중산간 마을에 대한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이 이루어지면서 마을은 모두 파괴됐고, 많은 주민들이 희생됐다.

그 후 유족들은 시신이나마 찾으려고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고, 시신은 못 찾았지만 비석이라도 세우고 해야 하지 않겠나 해서 죽은 이들의 혼을 불러다 헛 봉분을 쌓고 묘지를 만들 것.

#6.25 한국전쟁과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 된 사연은?

동광리 헛 묘를 찾은 순례단은 이어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586-1번지 일대에 위치한 백조일손지지를 찾았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상모리 지경이지만 사계리 공동묘지 한 자락에 위치한 백조일손지지는 1950년 8월 20일 송악산 섯알오름 자락 옛 일본군 탄약고터에서 학살된 모슬포 경찰서 관내 주민 132명의 시신이 집단으로 모셔져 있는 곳이다.

백조일손(百祖一孫)은 '조상이 다른 백여할아버지가 죽어 뼈가 엉키었으니 자손은 하나이다'라는 사연 속에서 탄생됐다. 이 곳에서는 백조일손유족회 양신하 고문이 4.3순례단을 맞이했다.

"이곳은 주민들이 학살된 6년 후인 1956년 5월 18일 유족들에 의해 조성됐습니다. 당시 유족들은 6년간 시신 인도를 강력히 거부하던 군당국과 가까스로 타협을 본 후 흙탕물 속에 뒤엉킨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양수기까지 동원하는 등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타의 시신 구별이 어려워 132개의 칠성판 위에 머리뼈 하나, 등뼈, 팔뼈, 다리뼈 등 큰 뼈를 대충 맞추고 132구를 구성해 이장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유족회의 이름도 백조일손 유족회로 정해졌고, 묘지도 백조일손지지로 이름 붙여졌습니다. 그 후 유족회는 1959년 5월 8일 묘역에 위령비도 건립했죠.

그러나 1961년 5.16쿠테타 발발 후 유족들은 다시 한번 시력을 겪어야 했습니다. 쿠테타 직후인 1961년 6월 15일 경찰에서 위령비를 파괴하고 일부 유족들에게 묘지를 이전할 것을 강요했던 것입니다. 그 즈음 23위가 다른 곳으로 이장됐으나, 4.3진상규면운동이 시작되면서 현재 7위가 다시 원래 위치로 재이장됐습니다."

양 고문의 설명을 들은 후 순례단은 백조일손지지 옆에 위치한 유물 전시실에 들렸다. 양 고문의 계속되는 설명을 들으며 순례단은 어느새 59년 전 역사속에 빠져 있었다.

바람이 다소 강하게 불었지만, 다시 봄 기운이 물씬 풍겼다. 멀리 보이는 산방산이 그 어느때보다 평온해 보였다. 순례단은 백조일손지지를 끝으로 59년 전 역사의 현장에서 돌아와 다시 한번 제주4.3을 되새기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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