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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 의미에서 다양성과 포용력
기술적 의미에서 다양성과 포용력
  • 장금항 객원필진
  • 승인 2007.02.06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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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칼럼]장금항 상명교회 목사

싱크탱크를 체계화한 것은 유대인들이었다.

세속적인 귄위를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은 기업을 경영하면서 빠져들게 되는 매너리즘을 극복하기 위해 권위에 구속받지 않는 싱크탱크를 운영하였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에서 살았던 디아스포라(박해를 피해 유대땅을 떠나 살던 유대인의 정착촌)유대인들은 사업을 하기 전에 랍비와 시인, 수학자, 철학자, 화가 가정주부, 학생등의 사람들과 그 문제를 토론하곤 했다.

한 사람의 눈으로 결정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의 눈으로 검토한 결정이 정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인은 장사꾼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에 때로 철학자의 눈이 더 깊다. 장사꾼의 마인드에는 잡히지 않는 아이템이 감성적인 시인의 눈에는 더 잘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장사꾼의 돈벌이에 대한 집착이 돈벌이에 장애가 될 수 있으므로 그 권위와 세계에 매이지 않는 전혀 다른 환경의 시인, 화가까지 불러 사업에 필요한 조언을 구하는 유대인 특유의 토론 문화가 발달하였고 그것이 싱크탱크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김 욱 「세계를 움직이는 유대인의 모든 것」)

짐직한 대로 싱크탱크를 얘기하는 것은 언로의 다양성 때문이다.

그러나 신적 개입 없이는 언어의 혼란으로(구약성서의 바벨탑의 바벨은 언어의 혼동이란 뜻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가 가능하지 않다는 성서의 세계관을 가진 나로서는 타인의 말을 존중하자는 식의 하나마나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기술적 의미로서 의견을 받자는 것이다.

뛰어난 상술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이 전략적 의미로 반대의견과 주위 여론을 수렴했던 것처럼 우리도 상대방을 설득시켜 내 의견을 관철해야겠다는 전투적 의지를 꺾고 남의 이야기를 때로 제한적 의미에서라도 듣자는 것이다.

흔히 부시정권의 정치적 기반을 ‘바이블벨트’라 불리는 미국 남부지역의 기독교 근본주의에 국한 할 때가 많지만 이념적 기반은 ‘북장로교 전통의 동부해안지역의 유대계’ 네오콘(Neocon)이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1960년대 반전운동, 흑인인권운동, 여성운동, 히피에 대한 반동으로 공립학교에서의 성경읽기, 마약, 동성애, 낙태, 남녀평등의 헌법안에 수정과 폐기를 주장하는 ‘보수꼴통’이다.

여기에 비해 네오콘은 동부지역의 유대계 출신들로 아침에 성경만이 아니라 시사신문을 읽고 학교에서 예배도 강요하지 않는 집안에서 자랐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 나왔던 그 목사처럼 시와 철학을 아는 ‘도인’까지는 아니어도 합리성과 세련된 맛은 있다. 미국인들 농담에 ‘글을 아는 기독교인은 감리교인이고, 글을 모르는 기독교인은 침례교인’이란 말이 있는데, 그것은 무식한 근본주의 신앙을 비웃는 북장로교 사람들의 자부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전통에서 자란 네오콘들이 대외정책과 경제정책에 이념적 논리를 제공하며 무식한 부시의 정치에 ‘철학의 옷’을 입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정권과 상관없이 미국기업 연구소(ATI)나 시카고대학 시카고학파를 통한 인재독식 등을 통해 그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며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논리를 계속 확대생산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성장배경이 다르고 이념적 성향도 다른 근본주의와 네오콘들이 국익을 위해 서로의 주장을 듣기도 하고 합의도 한다는 것이다.

이번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행해진 부시의 신년연설을 보면 반대하는 민주당 의원들도 기꺼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내며 경청하는 신사적인 모습을 보인다. 미국의 자부심까지를 느끼게 하는 그 광경에 ‘상고출신의 대통령’을 비하하는 우리 국회의 모습이 겹쳐져 곤욕스럽다.

미국의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합리성을 말하는 것이다. 입장과 방향이 달라도 미국이라는 국가적 가치에서는 그 ‘미천한 역사의 천박한 그들도’ 상대방의 입장을 듣는 것이다.

이미 사람사이의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하였으니 제한된 기술적 의미에서라도 나와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말을 듣자는 것이다 가슴에서 치밀어 올라도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 가식적 모습이라도......

제주의 그 많은 위로회와 자문회의, 태스크포스팀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너무 편중되어 다양한 의견 표출에 지장이 없는지, 그 성향이 한쪽으로 너무 쏠려 반대의견, 소수의견이 나올 수 없는 구조인지를 말이다. 다양성과 포용성은 흥했던 문명과 종족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상명에서 장금항 목사 / 미디어제주 독자권익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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