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버린 감투
남이 버린 감투
  • 홍기확
  • 승인 2017.0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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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149>

버스승강장에서 80세의 어르신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과 대화를 즐기는 편이다. 나보다 나이가 적거나, 동년배는 대화주제가 깊지 않고 딱히 배울 것도 없어서다. 그래서 후배나 동료보다는 나이가 많은 만남이 잦다.

 

버스 배차 시간이 35분 간격이어서 5일 동안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을 합하면, 한 두 시간쯤 얘기를 나누었던 듯하다. 나는 어르신의 경험을 뽑아내어 얻고 싶은 마음에 많은 질문을 던졌다.

어르신은 아직까지 이발소를 하고, 농사도 짓는다고 했다. 젊어서는 청소년들을 위해 많은 봉사를 했다며 이런 저런 경험을 풀어 놓으신다. 그러면서 젊을 적 너무 바쁘게 살았다고 한탄하신다.

 

4일째쯤 되자 적잖이 친해졌는지 가정사까지 늘어놓으신다.

자식이 둘이 있는데 큰 아들은 지금 중풍을 맞아 4년째 재활중이라고 한다. 저녁에 아들집에 와서 밥을 차려주고 잠을 잔 후, 지금은 아침밥을 차려주고 밭에 일하러 간다 했다. 처음에는 아들이 평생 누워서 살 줄 알았는데, 지금은 지팡이에 의지해 산책도 다닌다며 씩 웃으신다. 웃음은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슬퍼보였다.

 

딸은 육지에서 사는데 사위가 십년 넘게 백수로, 딸아이가 혼자 식당을 나가며 힘들어한다고 했다. 가끔 너무 힘들 때는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데, 80살이 넘어도 일을 할 수 있는 이유와 죽지 못하는 이유가 딸아이에게 빌려줄 돈을 벌어야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두 번째 웃는데 유난히 많아 보이는 얼굴의 주름들이 요동쳤다.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마지막 날. 어르신에게 물어보았다. 저 같은 젊은이에게 꼭 충고해주고 싶으신 말이 있으시냐고. 어르신은 진부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허공을 응시하며 탄식처럼 내 뱉는다.

 

“남이 버린 감투랑은 쓰지 말게.”

 

나는 이른바 촉(觸)이 빠르다. 촉감이 좋다는 얘기다. 어르신의 인생 경험 중 이 한 마디 조언에 내 머릿속은 벌써 수많은 선과 그림, 생각들로 넘쳐난다.

어르신의 이야기는 결론이 먼저고 이유가 다음인, 명쾌한 글이었다.

 

“자식들이 이렇게 되고 보니 후회가 많아. 젊을 적 아이들이 그냥 크는 줄 알고, 남이 버린 감투들 많이 주웠지. 표창장, 감사패만 창고 하나에 가득했어. 그런데 아들 중풍 맞고 나서 다 태워버렸네. 그 때 감투 쓰고 여기 저기 다닐 시간에, 자식들한테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내 새끼들이 이렇게 되었을까?

게다가 감투를 좋아하니, 다른 사람들이 쓰기 힘들어 버린 감투들을 다 나에게 주는 거야. 다 받아먹었지 뭐. 계속 힘들어만 지더라고. 사회활동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남이 버린 감투랑은 쓰지 말게.”

 

1962년부터 이발사를 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 분답게 청산유수다. 며칠 동안 나는 책 수 백 권을 읽어야 얻을 지혜를 단 몇 시간의 대화로 얻었다.

 

일본의 작가 와카쿠와 미도리는 『네 명의 소년, 덴쇼 사절단과 세계제국』이란 소설에서 말했다.

 

“시대의 흐름을 움켜 쥔 자만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권력을 움켜쥔 자만이 위대한 것은 아니다. (중략) 만약 무명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주인공이 아니었으면 역사를 되짚어 보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그 무명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5일간. 1938년생 어르신의 역사를 온 몸으로 배웠다.

첫째 날. 어르신은 승강장에 앉고, 나는 멀찍이 서서 얘기를 했다.

둘째 날. 어른신은 승강장에 앉고, 나는 그 옆에 앉았다.

문화에 우연이 없듯, 일에도 우연이 없다.

어떤 일이건 세상에 필요한 일이라면 가치 있는 일이다.

 

버스승강장의 5일간 무명씨(無名氏)의 역사와 철학을 배웠다.

5일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닌,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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